남북분단이 낳은 작가 박조열
박조열의 희곡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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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희곡의 장을 열다
박조열은 함경남도, 박씨 일가가 모여 살았던 집성촌 기회리에서 2남 5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몸은 허약했으나 열심히 놀고 공부 잘하는 영특한 소년이었다. 그는 연극을 경험한 적이 없던 중학교 시절에 희곡 읽기의 재미를 발견했고, 함흥 고급중학교를 졸업하자 나이 열아홉 살에 중학교 문학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북한 공산당 사회에서 지주의 아들이라는 출신과 당에 비협조적인 태도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고, 6·25를 만나면서 흥남부두에서 의도치 않게 군인이 되어 스무 살에 홀로 월남했다. 군대에서는 교육과 글쓰기에 관련된 일을 하며 12년의 세월을 지냈다.
1963년 전역 후 박조열은 남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의 연구생이 되었고, 이 연극아카데미는 그를 작가의 길로 안내했다. 그의 첫 희곡 <관광지대>(1963)는 극작 워크숍의 습작도 아니고, 어느 날 문득 떠오르는 발상으로 단숨에 써낸 작품이었다. 우리의 현대연극은 전통극의 구비문학과는 달리 문자로 존재하는 텍스트로서의 희곡 문학과 함께 출발했는데, 1960년대까지도 사실주의 희곡이 주류였다. 이에 반하여 박조열의 <관광지대>는 이근삼의 <원고지>(1960)로 시작되는 한국 연극사의 탈 사실주의 양식에 있었다. 당시 사실주의 희곡들이 일본의 식민지와 남북분단 전쟁으로 인한 시대 상황에서 그 비극적 정조(情操)를 그리고 있었고, 우리 전통극의 희극 정신을 잃게 했는데, 박조열은 희극 <관광지대>로 오영진과 이근삼에 이어 우리 희곡의 희극 세계를 열었다.
<관광지대>는 부제 ‘판문점 명도소송’이 말하듯, 주인공인 육군 일등병 한남북이 곧 남북 회의가 열릴 판문점 회의실에서 이곳이 자신의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이요 땅이라는 사실을 주장한다. 더불어 회의는 남파 간첩과 월북 황소를 바꾸려는 남북 간의 유치한 싸움으로 진행된다. 한남북은 판문점의 철조망이 부모님 부부싸움의 분계선이었으며 “두 분의 전쟁 기간은 대개 사흘이면 끝나기 마련”이었다고 회상한다. 이처럼 극 공간은 남북의 분단 상황과 그 부당함을 풍자하며 희화화한다. 부모님의 화해나 다시 자신의 땅을 찾아 그곳에 세울 관광호텔을 꿈꾸는 한남북의 판문점 명도소송은 통일에 대한 염원이 함의되고 있다.
이 첫 희곡은 그해 고등학교 연극경연대회에서 초연되어 최우수상을 받았고, 80년대까지도 대학생들이 즐겨 공연한 작품이었다. 박조열의 글쓰기는 남북분단과 통일이라는 소재로 시작되고 그것으로 끝이 날 만큼, 작가는 남북분단 현실에 오롯이 집중하는 극작 세계, 곧 분단을 소재로 하는 희곡의 장을 열었다.
극작의 모태(母胎)
분단 희곡의 장을 여는 것에는 박조열이 실향민 작가라는 그의 정체성이 있다. 필자는 작가를 2010년 연극 구술사에서 만났다. 구술 부탁을 드렸을 때만 해도, 자신이 쓴 작품이 많지 않아 별로 하실 말씀이 없을 거라고 했다. 그의 희곡 작품은 총 10편으로 과작(寡作)이다. 그러나 그는 라디오와 TV 극을 다수 집필했으며, 또 연극사에 남을 만한 비평적인 업적들을 내놓고 있었다. 하실 말씀이 없을 거라는 구술은 총 5회에 걸쳐 13시간을 넘어갔다.
작가는 이미 자신의 희곡집에서 그의 창작은 “생사조차 알 길 없는 북쪽 땅 나의 혈육과 고향 산천을 향한 정념의 소산”임을 밝혔다. 그런데 막상 구술이 진행되니 그것은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가 왜 글을 쓰고, 왜 남북분단과 통일이라는 주제의 글쓰기에 천착하고, 왜 작품 창작을 중단해야 했는지 그 이유가 너무나도 분명했다. 구술 2회차까지 북녘의 혈육과 고향에 대한 그의 기억은 구술 가운데에 현재 진행형이 되었고, 그는 잠을 설치며 심신의 병이 났다. 그래서 구술이 이 주제에 머무를 때까지는 필자는 청자여야 했고 질문은 어려웠다. 구술의 이러한 상황은 작가에게 북의 혈연에 대한 그리움, 고향과 남북분단 전쟁의 기억이 그만큼의 크기로 그의 생애를 지배했다는 것을 알게 했다. 5회차 구술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생애 삼 분의 일 정도는 북에 혈육을 생각하고, 무슨 불효했던 거 후회하고, 슬퍼하고, 이런 걸로 보낸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삼 분의 일. 좀, 좀 과장하자면.
그러나 과장 아니라는 생각을 해.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생각도 하고. 어떻든… 북에 가족 혈육들의 생각을 잊은 적은 한, 진짜 하루도 없어요.1)
박조열의 글쓰기에는 그 시작과 끝에 북녘의 가족이 있다. 그는 1991년 국립극장에서 요구한 새 작품으로 남북분단이 가족에게 주는 비극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북녘 가족의 비참한 소식을 듣게 되면서 그는 몇 달을 앓아야 했고, 그 큰 슬픔은 그에게서 글쓰기의 힘을 앗아갔다. 남북분단과 통일은 작가에게 삶의 절실한 현재적 문제였고, 그것이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었기에 회갑에 처음으로 간행한 『박조열 희곡집: 오장군의 발톱』(학고방, 1991)에서 그는 “이 희곡집을 북녘땅의 혈육에게 바친다”는 헌사를 썼다.
모티브 ‘경계선’과 새로운 양식
첫 희곡 <관광지대>의 모티브 ‘경계선’은 이후 <토끼와 포수>(1964)에서 두 연인의 사랑 이야기로, 그리고 <목이 긴 두 사람의 대화>(1966)로 이어진다.
<관광지대>는 그가 남북분단에 대한 장편 소설을 구상하던 중에 쓴 희곡이다. 당시 작가는 브레히트2)니, 서사극이니 하는 연극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에 그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쓴 것이 서사극 양식이 되었다. 그러나 남북이 경직되어 있던 1960년대, 터부시되던 통일문제를 다루고 미군을 냉소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관광지대>는 정보과 조사를 받았다. 그래서 다음 작품 <토끼와 포수>(1964)는 <관광지대>의 모티브 ‘경계선’은 이어가되 사랑 이야기로 썼다. 이 희극은 김정옥 연출의 민중극장 공연으로 대성공을 이루어서 1965년 동아연극상 대상 · 연기상 · 희곡상을 받았고, 무명의 박조열을 <토끼와 포수> 작가로 각인시켰다. 창작 희곡상은 최초여서 이를 계기로 작가의 건의 아래 동아연극상에 희곡 부문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 박조열은 자신에게서 희극적 글쓰기의 재능을 발견했다.
모티브 ‘경계선’은 <목이 긴 두 사람의 대화>(1966)에서 다시 통일문제를 다루므로 알레고리3)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막이 열리면 경계선 양쪽에 대립 관계의 A, B가 서 있고, 각기 나타날 대장을 기다린다. 작가는 두 대장의 부재를 통해 우리의 남북 현실, 곧 분단의 통일을 주도할 각 진영의 지도자가 부재한 현실을 그린다. 나중에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는 C가 나타나는데 가랑이가 경계선을 타고 있어서 앉지도 서지도 못한다. C는 어느 이데올로기에도 속하지 않는 민족의 통합된 존재로서 표류하는 통일의 형상화다. 이 희곡은 사건 없이 통일에 대한 기다림만 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1952)를 닮아 있는 부조리극이다. 작가는 그 집필 과정을 구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작품을 반쯤 썼을 때 더 쓸 수 없어서 여석기 선생한테 보여줬는데, 선생의 추천으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1952)를 작가가 읽게 되었고 이후 금방 작품을 끝낼 수 있었다고 했다.
<고도를 기다리며> 보면서 그, 양식, 내가 유도하고 있는 양식에 대한 의문…이 없어진 거지.
‘아. 이 뭐 <고도를 기다리며> 이런 작품도 있는데 내가 못쓸게 뭐 있냐. 응. 내 생각대로 하자.’4)
그리고 박조열은 1976년 <가면과 진실>과 <조만식은 아직도 살아있는가>를 발표했다. 작가가 이전 작품들에서는 풍자와 알레고리, 우화, 아이러니로 분단과 통일문제를 간접적으로 표현했다면, 이 두 작품에서는 당시 국가가 독점하고 있던 자료들을 토대로 하는 기록극 양식으로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었다. 두 작품의 시대적 동기는, 남북이 분단 이후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최초로 통일에 관련된 합의를 발표했으나, 오히려 비난전이 시작되고 서로의 통일 비전과는 거리가 멀게 그 갈등이 더 첨예화되었던 시대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작가의 통일에 대한 절절한 기다림과 염원은 작가에게 희곡쓰기의 새로운 양식 시도를 지속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희극적, 비평적 글쓰기
박조열에게 연극은 무엇보다 재미가 있어야 했다. 그렇기에 당시 기존 연극계의 진지함과 비극적 정조, 그리고 계몽주의적 주제 편향에 있는 사실주의는 그에게 진부함이었고 범속(凡俗)함이었다. 이를 거부한 작가의 작품은 탈 사실주의 양식에 있고, 또 가볍고 희극적이다. 그는 작가가 되기 전 이미 희극적이고, 비평적인 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를 좋아했다.
작가의 글쓰기에서 그 희극성은 작품 제목과 이름, 극 상황에서 역설적 대비를 통해 나타난다. 제목 <관광지대>, <토끼와 포수>, <오장군의 발톱>, <가면과 진실> 등이 그러하다. <관광지대>는 ‘판문점 명도소송’이라는 부제에서 관광지대의 가벼움과 판문점의 진지함이, <오장군의 발톱>에서는 장군의 무게감과 하찮은 발톱이, 그리고 <가면과 진실>에서는 가면과 그 반대 개념인 진실이 대비된다. <관광지대>의 주인공 한남북의 이름은 남과 북이 하나라는 뜻의 통일을 언어유희하고 있고, <오장군의 발톱>의 오장군의 이름 역시 관료 C가 말하듯 “오장군, 다섯 개의 장군, 다섯 개의 별, 파이브 스타아……”일 수 있는 언어유희다. 극 상황의 예로서 <관광지대>를 보면, 주인공 한남북이 6ㆍ25 전쟁 중에 인민군에게 “국군 만세”를 외쳐서 죽게 되는 아버지의 비극적인 사건을 묘사하는 장면이 있다. 작가는 남북전쟁이 가져온 비극을 아버지의 만세가 죽음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그려내며, 또 주인공이 관객에게 아버지의 그 비극적 상황을 지문에다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가볍게 전하라고 한다. 그러니까 작가는 비극적 내용을 희화화하는데, 그 방법은 역설적인 대비의 아이러니를 통해서다.
그리고 <오장군의 발톱>에서는 순박한 농부 ‘오장군’이 동명이인으로 인해 잘못 받은 징집 문서로 입대하고 문제 사병이 된다.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오장군의 모습은 사사건건 우스꽝스럽다. 그런 주인공의 순박함은 오히려 그를 공작원으로 발탁되게 하고, 그는 적국에서 가장 완벽한 연기를 한 공작원으로서 총살된다. 주인공은 총살되기 전 “(하늘을 향해 혼신의 힘으로) 엄마야…… 꽃분아…… 먹쇠야…….”를 외친다. 엄마, 꽃분이, 먹쇠는 농부였던 오장군의 세계요 그의 전부였는데, 적국의 사령관은 “그는 죽음까지도 연기로 장식했다.”고 하며 주인공의 마지막 말을 흉내 내고 경례한다. 사병들도 경례한다. 이 작품에서도 박조열은 주인공의 비극을 비극적 정서에 두지 않고, 죽음의 진지함을 연기로 보며 경의를 표하는 엉뚱함의 가벼움으로 역설적 대비를 이루게 한다. 그 아이러니가 희극적이다.
이러한 극 상황의 아이러니는 관객에게 연극적 환상을 부순다. 동시에 관객을 무대 상황에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무대와의 거리에서 극인물들보다 우월한 자리에 있게 한다. 즉 관객은 냉철한 의식으로 무대 상황을 해석하며 비판이 가능해진다. 그러니까 박조열은 전쟁, 분단이라는 무거운 소재의 비극성을 역설적 대비를 통한 희극성으로 전환하면서 관객이 이 문제를 감상에 치우치지 않고 생각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의 연극사에서 박조열은 분단의 비극을 희극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의 글쓰기는 독보적이다.
<오장군의 발톱>은 1975년 9월 극단 자유극장의 연습 중에 예술윤리위원회(후에 공연윤리위원회)의 대본 검열로 공연 불가가 되었다. 당시의 군사정권은 이 희곡이 군을 희화화했다는 것이다. 초연은 1988년에야 극단 미추의 손진책 연출로 이루어졌고, 백상예술상 · 대상, 연출상, 희곡상을 받았다. 작가는 초연 팜플렛에 공연 불가였던 희곡의 과거사에 대해 언급했다. ‘작품 규제를 하자고 선창한 자가 연극인이며, 연극계의 완벽한 침묵이 불쾌했다. 그 일로 자신이 연극협회 극작분과 위원장으로 선출되면서, 공연법 반대 운동부터 시작한 거다.’5)라고. 그는 실제로 1986년 2월, 연극협회에 극작분과위원회가 창설되고 그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자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제도의 위헌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5월, 월간지 『한국연극』에 「표현의 자유, 그 한계상황과 개선책」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는데, 이 글은 당시 예술계, 특히 연극계에 큰 반향을 몰고 왔다. 1988년에도 『한국연극』에 7회에 걸쳐 「표현의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연재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작가의 글들은 공연법에 반대하는 유일무이한 최초의 시평(時評)이었다. 1961년 12월 31일 제정된 공연대본 사전검열제는 1989년 1월 1일 폐지되었다. 한국 연극사는 공연법 폐지 운동에 관한 박조열 작가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공개적 논의와 그 투쟁을 누락시켰다가 21세기에 간행된 『한국 근·현대 연극 100년사』(집문당, 2009)의 8장 ‘평론’에서 짧게 언급했다.
“사람에게 사람만큼 관심 있는 게 있어요?” 6)
박조열은 주류적 흐름에 동요되지 않는 기질을 일찍부터 보여주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반일 소년으로, 북한 공산당 사회에서는 비협조적인 청년으로, 그리고 작가가 되어서는 당시 주류를 따르지 않는 탈 사실주의와 새로운 양식의 글쓰기를 보여 주었다. 그는 그런 꼿꼿한 기질에다 예리한 안목과 지적 관찰력으로 당대의 주류 작가인 오영진의 민족주의를 비평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박조열은 작가로서 그의 작품들에서 인간을 보여주려 했다. 그에게는 ‘인간이 극작가와 연극에 유일한 소재고 생명이고 구원’이며, 연극은 그런 인간을 보여주는 가장 '인간적인 예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들에서 비희극적인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있는, 가장 인간적인 인물들을 만난다. 그런 작가 박조열이 한국 연극사에 있었음에 감사 한다.
저자 이인순
이인순은 독일 뮌헨대에서 전공은 연극학으로, 부전공은 독문학, 철학으로 공부했고, 연극미학으로 석사를, 드라마투르기와 공연분석으로 연극학 박사가 되었다. 구술사연구 책임연구원을 지냈고 인하대에서 강의했으며, 드라마트루기와 연극평론을 하며 구술채록연구들과 논문들, 공저 그리고 2023년 『연출가연극과 드라마트루기』(푸른사상) 등을 썼다.
- by
- 이인순 (sonnenblume58@hanmail.net)
- Photo
- ACC 제공, 디자인아이엠 포토그래퍼 송기호
1) 박조열 구술. 이인순 채록. 2010년도 한국 근현대예술사 구술 채록 연구 시리즈 198: 박조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0, 204-5쪽.
2)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서사극을 창시한 독일의 극작가이며 연출가이자 시인이다.
3) 알레고리는 원래적 대상을 다른 것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대상의 1차적 의미를 넘어 더 풍부한 의미를 만들어내는 문학적 표현 양식이다.
4) 박조열 구술. 이인순 채록, 121쪽.
5) 위와 동일, 161-2쪽.
6) 위와 동일, 1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