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주목할 아카이브

화무십일홍 花無十日紅.
열흘 붉은 꽃은 없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못 가 지고 만다고 한다.

2015년 9월 21일. 오른편에 열린마당 배롱나무, 아시아문화박물관 아카이브,
Timothy Hursley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건축 사진

하지만 화려했던 봄꽃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서 7월부터
석 달 열흘 홀로 꽃을 피우는 나무가 있다.

2024년 8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열린마당

배롱나무꽃, 백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고 백일홍.
배롱나무꽃이 피면 여름이 시작되고,
배롱나무꽃이 지면 여름도 끝난다.

한여름을 지키는 백일홍.
뜨거운 태양은 꽃을 더 붉게 하고,
장맛비는 더 많은 꽃망울을 터뜨리게 한다.

꽃 한 송이가 백일을 피는 것은 아니다.
피는 때가 다 다른 꽃망울들이 원추 모양 꽃차례를 이어가며,
이 가지에서 꽃이 지면 저 가지에서 꽃이 피고
수많은 꽃들이 그렇게 피고 지고를 거듭하며 백일 동안
한 그루의 나무를 꽃피운다.

2024년 8월. 소나기가 지나간 자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열린마당 백일홍

꽃이 세 번 떨어지고 가을이 오면 맑고 매끈한 가지가
자태를 드러낸다. 오래전부터 배롱나무는 깊은 산사나
서원에서 키워왔다. 일 년에 한 번 앙상한 뼈마냥 해마다
껍질을 벗는 배롱나무처럼 자신을 비워내며 계속 정진하라는
뜻에서였다. 그래서 여름의 푸르름 가득한 숲을 비추는
백일홍은 사람들의 마음도 비추는 등불이다.

그 여름의

2024년 7월의 여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열린마당 배롱나무숲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했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이성복, ‘그 여름의 끝’,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그 여름 너와 나는 떨어지는 꽃이 되고 피는 꽃이 되어
서로를 바라보며 백일 꽃을 피웠다. 그래서 붉은 꽃이
지면 그때부터 그리움이 시작된다. 배롱나무꽃의 꽃말은
떠나간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다.

Photo
아시아문화박물관 아카이브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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