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C 테마강좌 <비인간을 쓰는 법> <거의 인간> 공연읽기Ⅰ

‘인간중심주의의 대전환, 포스트 휴머니즘을 말하다’

인간을 위해 발전해 온 인류 문화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발전’해 갈 수 있을까? 인간중심주의의 세계관으로 지배되어 온 세상은 과연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해 온 것일까? 극한을 향해 달려가는 기후 위기와 자원의 고갈은 오히려 인간중심의 사고관이 촉발한 인류의 뼈아픈 결말이 아닐까? ACC 테마강좌 <비인간을 쓰는 법>에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질문들을 마주하게 된다. 더 편리하고 더 풍요로운 삶을 위해 달려온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인류의 삶의 토대를 뒤흔들고 있는 시대, 인간은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 <비인간을 쓰는 법> 강연에서 한 인문학자의 오래된 철학적 사유의 발자국을 따라가 본다.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포스트 휴머니즘으로 나아갈 때’

‘2024 ACC 테마강좌’는 ACC SF 연극 시리즈인 <대리된 존엄>과 <거의 인간>의 공연 연계 프로그램으로 마련됐다.
그 중 <비인간을 쓰는 법>은 연극 <거의 인간>의 공연읽기 첫 번째 특강으로, 인문학자이자 서울대학교 영문과 교수인 이동신 교수가 강연을 이끌었다. 오랫동안 ‘포스트 휴머니즘’을 탐구해 온 이동신 교수는 <비인간을 쓰는 법> 강연에서 제목 그대로 인간 이외의 비인간 존재를 새롭게 쓰는 법에 관해 이야기한다. ‘포스트 휴머니즘’은 학자마다 정의가 다르지만, 대체로 기존의 인간 중심적인 휴머니즘을 넘어서는 휴머니즘의 새로운 담론으로 21세기 들어 더욱 주목받고 있는 패러다임이다.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고뇌를 담아낸 연극 <거의 인간>이 ‘AI 작가’라는 과학기술을 소재로 했다면 <비인간을 쓰는 법> 강연은 ‘과학기술’을 포함해 ‘사물’과 ‘동물’이라는 더 넓은 영역의 비인간을 펼쳐 보인다. 과학기술과 사물, 동물이라는 세 가지 비인간 존재와 인간은 앞으로 어떻게 관계 맺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이동신 교수는 이제 인간이 태도를 바꿔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포스트 휴머니즘’의 시대정신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21세기에 들어 급격히 현실화하는 기후변화, 멸종의 위기, 인류세 혹은 자본세에 관한 논의의 급증,
인공지능의 발달로 지금껏 비인간을 잘 써왔다는 생각과 혹은 비인간을 잘 쓸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21세기 상황은 ‘비인간을 쓰는 법’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무엇보다도
‘비인간’으로 인간의 “법”을 해체할 때임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21세기에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법은 이 요구를 받는 것뿐입니다.”

- 이동신 교수 -

과학기술, 동물, 사물의 관점에서 본
포스트 휴머니즘의 세 가지 흐름

이동신 교수는 인류가 오랜 시간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과학기술, 동물, 사물이라는 비인간 존재들을 도구 혹은 소유의 개념으로 치부 해왔다는 사실을 ‘포스트 휴머니즘’ 개념을 통해 문제 제기한다. 포스트 휴머니즘을 ‘궁극적으로 인간과 비인간의 차별적 구분을 철폐하고 기존의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비인간 존재의 가치를 존중하는 개념’으로 정의하며, 대표적으로 세 명의 학자의 이론을 꺼내 든다. 캐리 울프의 ‘동물’, 캐서린 헤일스의 ‘기술’, 그레이엄 하먼의 ‘사물’이라는 관점의 크게 세 가지 흐름이다.

가장 먼저 ‘동물’을 통해 포스트 휴머니즘을 전개하는 ‘캐리 울프’는 ‘동물에 대한 윤리적 관심은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 동물로서 인간 본인에 대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울프의 이론은 단순한 동물권 논의와는 다르다. 울프는 기존의 동물권이 여전히 인간중심주의적 입장이라고 비판하며, 인간이라는 정체성은 동물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기에 인간의 정체성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동신 교수는 울프의 이론을 바탕으로 동물에게 법적 권리를 부여하려는 근래의 많은 노력들도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다고 얘기한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살아있는 랍스터를 끓는 물에 삶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도 실은 랍스터를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으로 해석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권을 위한 노력에는 공감하지만 “특정한 형태의 인권을 동물로 확장시키는 일”보다 더 근본적으로 ‘인간과 동물의 구분이라는 폭력적인 토대를 해체’하는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름 아닌 인간의 ‘법을 해체’하는 작업을 말한다.

"울프는 ‘동물들의 권리를 부여하거나 인정하는 것은 인간 주체에 관한 특정한 해석을 암묵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확인하는 것’으로 즉각적으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법체계를 활용하여 동물을 보호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법의 역사를 재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간과 동물의 구분을 파기’하고 새롭게 둘의 관계를 새우는 일, 법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제도와 지식을 해체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 이동신 교수 -

‘모든 사물에 대한 놀라움의 시선을 되찾자’

캐서린 헤일스의 포스트 휴머니즘은 ‘첨단 과학기술’이 인간을 정신적인 존재로 규정짓는 것에 반발해 인간의 ‘몸’이라는 물질에 집중한다. 몸은 인간이 물질세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결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디지털 환경에서 인간이 점점 더 몸을 비하하고 정신작용만을 중요시하는 분위기에 대한 우려이기도 하다.

하이데거의 도구론을 확장시킨 그레이엄 하먼은 ‘신사물론’이라는 이론을 근거로 인간중심주의적 사물 인식을 비판한다. 그리고 ‘놀라움’이라는 개념을 연결한다. “모든 사물이 존재론적으로 엄청난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그 가능성을 드러내는 일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에 대한 놀라움을 되찾자”는 주장이다. 이동신 교수는 그동안 인간의 활동이 모든 사물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소비하고, 버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하먼의 관점은 결코 쉬운 실천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렵더라도 시도해 볼 가치가 충분한 포스트 휴머니즘의 따스한 교훈이라고 강조한다.

나만의 ‘포스트 휴머니즘’을 고민해 봐야 할 시기

<비인간을 쓰는 법> 강연에서 이동신 교수는 과학기술과 사물, 동물에 대한 세 학자의 이론을 ‘포스트 휴머니즘’이라는 한 가지 주제 안에 풀어낸다. 각각 서로 다른 주장 같지만, 공통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인간 중심적인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 비인간 존재를 존중하는 관점으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다. 그 시작은 아마도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작업에서 출발할 것이다. 나는 그동안 과학기술과 사물, 동물에 이르기까지 비인간 존재들을 어떻게 바라보며 살아왔는가? 앞으로는 그들과 어떻게 관계 맺으며 살아갈 것인가?
기후 위기로 인한 곤경과 과학기술이 빚어낸 급격한 변화로 인류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한 치 앞을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이지만, 그래서 더욱더 포스트 휴머니즘을 고민해야 할 시기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포스트 휴머니즘이란 인간중심주의를 경계하며 지금 단계의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이 내리는 가장 절실한 지시를 따르는 것이라고 제안해 봅니다... 절실함은 국경을 넘어서, 이념을 넘어서, 계급을 넘어서,
인종을 넘어서 ‘공조’하라고 지시합니다.”

- 이동신 교수 -

 

 

 

by
유연희 (heyjeje@naver.com)
Photo
디자인아이엠 포토그래퍼 송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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