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유토피아, 자본주의 리얼리즘 넘어서기

아시아문화칼럼

ACC 혼합현실 랩 <아시아 뉴토피아: 상상 너머의 공동체> 연구 개발 및 전시 논평
지구 행성 위기와 다중재난 상황 속 유토피아의 ‘상상력’

다중위기와 다중재난의 시대다. 지구 생명 절멸의 기후위기, 인간을 위협하는 지능형 기술의 도래,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국지전과 대규모 인종 학살이 자행되면서 인류의 미래 불안과 구조적인 위태로움이 점차 증대하고 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대안과 공존의 삶을 위한 새로운 상상과 기획의 요청이 여기저기에서 일고 있다.

ACC 혼합현실 랩 <아시아 뉴토피아 : 상상 너머의 공동체>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이번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혼합현실(MR) 연구 개발 및 전시 「아시아 뉴토피아: 상상 너머의 공동체」는 이렇듯 거세지는 다중위기와 재난 상황에 맞선 또 다른 방식의 상상력 모색에 다름 아니다. 전시는 인류 문명의 발상지로서의 아시아적 유토피아 모델을 환기하고, 이를 통해 아직 도래하지 않는 새로운 공동체 모델을 동시대 상상력을 통해 재해석하고 이를 시각화하고 있다.

이번 전시 기획은 왜 이 시점에 아시아 공동체와 유토피아에 주목하고 있을까? ‘역사의 종말’1)로까지 평가된 서구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와 인간의 영혼조차 자본의 용광로에 땔감으로 밀어 넣는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2) 현실에서, ‘더 나은 삶’을 지향하고 새로운 공동체 실험(뉴토피아)의 모델로 아시아적 가치를 새롭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특히, 전시 관련 조사연구에서는 전후 서구 열강 식민주의에 반대해 미래 아시아 속 공동 번영의 가치와 평화 원칙 선언을 세웠던 1955년 아시아 국가들의 ‘반둥회의’를 중요하게 다루면서3), 오늘 전쟁 등 다중위기와 심화하는 기후 재난 현실에서 아시아 유토피아란 화두가 왜 다른 삶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되는지를 충분히 암시한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 연구에는, 유토피아적 이상향이라는 문명사적인 원류를 찾으면서 그 근원에 아시아가 자리잡고 있음을 살피고 있다. 그래서,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희구를 보여줬던 아시아 문명이 중요하게 검토된다. 전시는 아시아 문명의 발상지와 도시 건축을 통해 당대 인간이 품었던 이상향을 찾고 그것을 다시 ‘아시아 뉴토피아’에 투영하기 위한 문명사적 원형으로 활용한다. 이를테면, 인간주의적 도시 공동체 욕망의 수메르 바벨탑, 메소포타미아 문명도시 바빌론의 공중정원, 평화에 대한 갈망을 담았던 중국 무릉도원의 이상향, 인더스 모헨조다로의 과학적 배수 체계를 갖췄던 공중목욕탕 등 계획도시, 영원불멸의 삶과 연계된 이집트의 피라미드 문명 등은 전시에서 미래 아시아 공동체의 모습을 형상화하기 위한 주요 데이터이자 상상력의 근거가 된다.

아시아 문명과 이상향에 대한 이들 기초 연구 데이터는, 전시 작업 안에서 생성형 인공지능과 미디어아트 창작의 힘을 빌어 상상의 미래 도시를 읽는 눈으로 투사된다. 즉 유토피아적 이상향이 미래 아시아 도시 공동체의 상상력으로 흡수되어 시각화된다. 이를 통해, 전시는 아시아 뉴토피아의 인공지능 합성 이미지, 공중 미래도시의 3차원 축소 디오라마 모델링, 혼합현실을 통한 체험 공간을 구축하고 있다.

아시아 뉴토피아와 새로운 공동체의 도래

오늘 다시 ‘유토피아’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더 나은 삶’ 혹은 ‘다른 삶’의 가치는 무엇일까? 유토피아(utopia)는 그리스 어원으로 보면, ‘좋은 곳(eutopia; good place)’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곳(outopia; no place)’이란 양가적 의미를 지닌다. 언뜻 그 어원이 모순인 듯 여겨지나, 이는 완결된 이상향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그에 이르는 과정이 강조되는 공동체 지향을 내포한다. 즉 인류의 유토피아는 먼 미래의 동경이나 희망 사항의 목록이라기보다는 당대 사회가 추구했던 변혁 공동체 실험의 실천 의지와 동력의 총체라 할 수 있다.

또 다르게 유토피아는 인간종이 뭇 생명과 공존하며 호혜적 관계를 찾고 공동 번영을 추구했던 역사적 사례와 실험을 투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특히 ‘아시아적’ 고대 문명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서구의 합리주의적 전통과 또 다르게 아시아 문명의 “생산, 소비, 공유, 순환의 공동체적 가치”를 구현하려 했던 전통에 있다.4) 그래서일까? 전시에서 아시아적 고대 문명이 미래 도시와 건축에 투사되어 나타나는 ‘뉴토피아’의 특징은, 이를테면 호혜적 관계성, 다양성, 포용성, 커먼즈(공유), 생태주의 등 개방적인 가치로 수렴되는 모습을 띤다.

물론 아시아의 미래 유토피아의 모습은 이념의 시대에 목도됐던 깃발과 목적 혹은 동일성의 가치 기준에 따라 규정되거나 고정된, 그런 본질주의적인 공동체가 더는 아님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화려한 첨단 기술로 무장한 ‘소셜 픽션(SF)’같은 자본주의 리얼리즘 세계를 가정하지도 않는다.

프랑스 철학자 장-뤽 낭시의 ‘단지 그렇게 있는’ ‘무위(無爲)의 공동체(inoperative community)’처럼, 우리가 찾는 유토피아의 상은 타자성이 동일성과 전체성으로 환원되지 않으면서도 자연과 문명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비)인간 존재들의 상호 얽힌 변화무쌍한 공동체에 가깝다. 그래서, 이탈리아 철학자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식으로 덧붙이자면, 우리의 ‘공동체(communitas)’는 보편적이고 고유한 집단 정체성의 구성 공간이라기보다는 어떤 결핍과 소외가 계기가 되어 이질적이고 몫 없는 타자들이 ‘함께’ 모여 의무를 지고 나누고 공유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에스포지토는 이를 두고 “공통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다층적으로 열린 가능성의 공동체6)라 하는지도 모른다.

「아시아 뉴토피아」 전시와 연구 프로젝트는, 오늘 우리의 생태 곤경과 전쟁 위기를 넘어서는 하나의 방법으로 고대 아시아 문명을 투과해 미래 유토피아의 구체적 상이 미래에 어떠할지를 관객 스스로 잠시 상상하게끔 이끌지만 긴 여운과 잔상을 남기는 효과를 냈다. 다만 아쉽게도 인류의 축적된 인간 창작 데이터를 무차별적으로 대거 사전 기계학습(머신러닝)한 후 사용자가 원하는 특정의 프롬프트형 질문에 맞춰 합성물을 생산하는 오늘날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아시아 유토피아의 생성 이미지에는, 기술 태생적인 한계 탓에 우리 인간이 역사적으로 이뤄내지 못했던 이상향을 제대로 구현해내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어쩌면 이는 인류 유토피아의 미래 밑그림조차 생성형 인공지능 등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에 의탁할 수밖에 없는, 동시대 정치 상상력의 빈곤과 고갈에 이른 상황을 직시하게 한다.

‘아시아 뉴토피아’의 전망에는 그렇게 아시아 유토피아 미래의 시각적 재현과 현실 재현 불가능성이 함께 녹아 있다. 이 시각 재현의 전망을 구체적 역사의 페이지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아시아 고대 문명의 역사적 전통을 오늘의 현실 속 생태사회 구상으로 다시 소환할 보다 구체화된 유토피아 기획이 필요하다. 지구 생태에 조응하는 수준에서 프로메테우스적 문명 기술을 채택하는 지혜로운 도시 계획은 물론이고, 다중재난을 대비하고 다른 삶을 모색할 수 있는 전보다 더 겸손하고 경계와 외연이 열린 ‘도래하는 공동체(the coming community)’ 모델 구상이 요청된다. 그런 연유로 미래에 인류가 함께할 생명 공동체 모델은 인공지능의 연산 통계적 평균값을 내는 첨단 기술 능력에만 의존하기엔 여러모로 무모하다. 결국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미래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발밑 재난 현실을 타개할 ‘공통적인 것(the common)’을 찾아 마련하는 길 외에 없다.

  • 1) Francis Fukuyama 저, 1989. 이상훈 역. 『역사의 종말』, 한마음사.
  • 2) Nancy Fraser 저, 2023. 장석준 역. 『좌파의 길: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서해문집.
  • 3) 장성권 외, 2023.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혼합현실 조사연구: 아시아 뉴토피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4) 국립아시아문화전당. 2023. 「아시아 뉴토피아: 상상 너머의 공동체」 연구개발 및 전시 리플렛 내용.
  • 5) Jean-Luc Nancy 저. 2022. 박준상 역. 『무위의 공동체』, 그린비.
  • 6) Roberto Esposito 저. 2022. 윤병언 역. 『코무니타스: 공동체의 기원과 운명: 공동체의 본질은 무엇인가?』, Critica, 서문 제목 인용.

이광석

칼럼 기고자 이광석(李光錫)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T정책대학원 디지털문화정책 전공 교수로,
테크놀로지, 사회, 생태가 상호 교차하는 접점에 비판적 관심을 갖고 연구, 비평 및 저술 활동을 해오고 있다.

 

 

 

 

 

by
이광석(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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