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은 보자기다

2023 ACC아시아콘텐츠 공연개발 시범공연 《식탁과 기억》

식탁의 사전적 의미는 ‘음식을 차려놓는 큰 탁자’이다. 하지만 식탁에 차려지는 것은 음식만이 아니다. 식탁은 인간을 둘러싼 자연적, 사회적 환경을 직접 반영하는 작은 세계다. 관계와 욕망, 기억 등 다양하고 다층적인 내면의 실체를 마주하는 장소이며, 사회문화현상과 시대적 징후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공간이다. 식탁은 늘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매일 다른 모습으로 우리의 일상을 지탱한다. 먹는 행위에 말과 소리를 더하고, 감정을 나누는 친구로 거기에 있다. 때로는 수다스럽게, 때로는 침묵하며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2023년 ACC아시아콘텐츠 공연개발 주제로 ‘식탁과 기억’을 선정하였다. 전년도와 달리 제작단체를 선정하는 대신 공모를 통해 역량있는 연출가를 선정하고, 인문, 사회학 분야 전문가, 공연분야 전문가, ACC가 함께하는 연구모임을 진행하였으며, ACC의 주도로 프로듀싱 체계를 구축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선정된 연출가는 유선후(무용), 김미란(연극)으로, 인간의 필수불가결한 활동인 ‘식(食)’의 자리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상성과 복합성을 연구하여 비언어적 몸짓과 영상미가 돋보이는 《속삭임의 식탁》과 내러티브가 강조된 입체낭독극 《파인 다이닝》을 선보였다.

《속삭임의 식탁》은 현대 도시인들의 심리적 징후를 드러내는 ‘혼밥 현상’을 예술적 판타지로 그려냈다. 혼밥이라는 말이 일상어로 자리잡은 시대에 “왜 혼자만의 식사가 편해지는 세상이 되었을까”하는 물음에서 시작된 작품이다. 혼자만의 식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거나 혼밥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무용수의 몸짓과 미디어 아트, 현장에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형상화되며 고요한 식탁에 파고를 불러일으킨다.

‘혼밥이라고 하여도 괜찮아’의 준말이자 공감과 치유의 의미로 지어진 섬 ‘혼밥래도’. 혼밥을 먹어도 망설여지지 않는 특별한 이 섬에는 다양하고 맛있는 혼밥 메뉴와 함께 좋은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어느 날 주인공 혼밥러는 <혼밥러를 위한 소셜다이닝>초대장을 받는다. 그는 식사를 하는 동안 선택된 고독을 즐기는 한편, 내면에 잠자고 있던 감정이 깨어난다.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은 고독의 또 다른 이름, 외로움이다. 긴장과 각성이 사라진 몸에는 본능만이 남아있다. 최고의 메뉴로 온전한 식사를 할 수 있는 혼밥식탁에서 주인공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자아를 꺼낸다. 그리고 숨겨두었던 욕망과 상처에 위로를 건넨다. 그 과정은 인생의 사이클과 닮았다. 혼밥 식탁에 앉은 우리의 진짜 표정을 비추는 듯 하다.

《파인 다이닝》은 말과 시간으로 차려진 내러티브의 식탁이다. 배우들이 직접 희곡을 읽는 낭독극에 음악, 무대디자인, 움직임 등 연극적 장치를 더해진 입체낭독극이다. 관객은 ‘작별 준비 노트’에 적힌 영학의 삶과 레시피를 공유하는 날 초대된 손님으로 참여한다. 작품은 경양식당의 주방장이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지며, 도시화와 산업화라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 속에 사라져간 존재들을 기억하고 애도하고자 기획되었다. 마지막에는 사연의 실제 주인공이 등장하며 감동을 더 한다.

이야기는 텅 빈 레스토랑에서 시작한다. 주인공 영학의 딸 미란은 문득 부모님과 예고 없이 이별을 맞이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작별 준비 노트’를 작성하기 시작하며 아버지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다. 전북 무주 출신의 영학은 학교를 포기하고 생계를 위해 농사를 지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80년 도시화의 흐름 속에 서울로 이주한 영학은 근면함을 재주로 화려한 경양식당에 취직을 하게 된다. 주방의 허드렛일을 하는 이라이와 사라다, 세칸 직급을 거쳐 어엿한 주방장이 된 그는 한때 ‘사람이 대접받는 시대’를 살아간다. 그러나 외환위기가 닥치고, 경양식의 시대가 끝나며 반짝였던 인생의 시간도 막을 내린다. 미란은 ‘작별 준비 노트’를 쓰는 동안 아빠에게 경양식이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닌 인생의 친구였음을 알게 된다.

2023 ACC 아시아콘텐츠 공연개발로 제작된 《속삭임의 식탁》과 《파인 다이닝》은 식탁이라는 공간을 과거에서 현재로 견인하고, 상상의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두 작품을 보고나면 식탁은 인생을 담아내는 보자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누구와 함께든 무엇을 먹든, 우리는 식탁에서 인생의 순간을 담아낸다. 수많은 사연과 기억을 간직한 공간인 식탁. 오늘 우리는 이 공간에 어떤 인생을, 세상을 차려내게 될까.





by
송지혜 (tarajay@naver.com)
Photo
디자인아이엠 포토그래퍼 송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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