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왜
키르기스스탄에 문화 원조(ODA)를 시작하게 되었을까?

아시아문화칼럼

“이 영화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전 과정이 촬영되고 녹음되었습니다. This film was photographed and record in its entirety in Rome, Italy.” 고전명화 ‘로마의 휴일’ 첫 장면이다. 영화 제작자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 영화의 첫 장면에 굳이 촬영지와 녹음 장소를 명확하게 해두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미국의 원조사업으로 영화가 제작되었었던 것과 원조비용이 이탈리아에서 지출되었음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문화 분야 국제원조의 시작과 의미

미국은 세계 2차 대전 이후 유럽을 복구하고 경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마셜플랜’이라는 국제원조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공식적으로 유럽 부흥 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이라 불린 이 국제원조는 유럽의 재건축, 미국경제의 복구, 공산주의 비확산미국중심의 반공체제 구축이 주요목적이었다. 유럽 동맹국가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원조는 영화 제작과 같은 문화 분야에서도 시행되었다.

미국 정부는 원조를 받는 국가 경제 지원을 위해 해당 국가 내에서 촬영과 녹음을 해야만 하는 조건을 제작사에 요구하였으며, 쿠오바디스, 벤허와 같은 세계적 명화 등이 마셜플랜이라는 문화 원조를 통해 제작되었다. 이렇게 제작된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온 대부분의 장소가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영화 개봉 이후 이 영화에 등장한 스쿠터 10만대가 판매되었다는 설이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원조의 효과는 성공적이었다.

오늘날 미국은 문화 분야에 원조를 하지 않는 나라로 이해되지만, 마셜플랜의 틀에서 지원된 유럽의 영화제작 원조는 현대적 의미의 문화 분야 공적개발원조ODA,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의 시초로 이해된다. 영화 제작 분야에 대한 미국의 문화 원조는 인프라 구축 등에 비하면 비교적 적은 비용을 투자해 큰 효과를 거둬 유럽의 경제적 호황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의 문화원조는 이탈리아 국민들의 문화 자긍심과 국민소득 증대에 긍정적 효과를 주었다. 미국의 문화원조 경험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 키르기스스탄과 협력해 시행 중인 문화 ODA 사업에 시사점을 주고 있다.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 중심부의 알라토 광장에 위치한 마나스 동상과 국립역사박물관

알라토 광장의 대형국기와 영웅 마나스 동상 그리고 국립역사박물관은 구소련 해체 이후 독립국가로서 키르기스스탄 국가정체성을 이루는 핵심요소라 할 수 있다.

실크로드 유목국가 키르기스스탄의 문화정체성

ACC는 2012년과 2015년에 개최된 한-중앙아시아 문화장관회의 합의사항을 기반으로 2022년부터 키르기스스탄 문화부와 ODA 사업을 시행하게 되었다. 실크로드의 중간에 위치한 키르기스스탄은 1991년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유목, 알타이, 영웅 서사시 마나스를 중요한 문화 키워드로 삼아 국가정체성을 만들어 가고 있다.

키르기스스탄 영토의 90% 이상이 산지이다. 전통적으로 산악 유목민이었던 키르기스 사람들은 추운 겨울에는 계곡 아래 마을에서, 더운 여름에는 산 위로 이동해 더위에 취약한 동물들에게 신선한 풀을 먹이며 키웠다. 그래서 계절과 풀 그리고 동물에 대한 전통지식은 이들 삶의 전부였다. 또한, 이렇게 동물을 키우며 사는 개인과 집단에 대한 상호 예절은 유목민이 서로를 보호하며 살아가는 중요한 규율이었다. 기록보다 구전서사를 통해 자신들의 역사를 전해왔던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이 목숨보다 소중이 여겨온 서사시 <마나스>에는 이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 키르기스인 문학가 칭기스 아이트마토프는 마나스 구연자 사야크바이 카랄라예프를 인터뷰하고 그의 판본을 채록하면서 마나스 3부작 서사시를 “키르기스인과 동의어이며, 그들의 삶을 담은 백과사전과 같다”라고 강조했다.

ACC는 유목 문화를 중심으로 발전해왔던 키르기스스탄과 협력해 문화 발전을 지원하는 ODA 사업을 기획하면서, 구전문화와 다양한 선주민이 남긴 땅의 역사에 주목했다. 또한, 북부의 유목문화와 남부의 정주문화가 서로 다르게 발전해왔던 점에 주목하면서 문화 원조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키르기스스탄 남부에 위치한 제2도시이자 실크로드 관문도시 오쉬 전경(술라이만토오 박물관에서 바라본 모습)

키르기스스탄 디지털문화자원관리시스템 구축과 문화 발전

키르기스스탄은 1991년 독립 이후 레닌기념관 키르기스스탄 지부 건물이 건물은 흰색의 큰 묘지처럼 생겼다.을 국립역사박물관으로 바꾸고, 레닌기념관 앞에 있던 레닌동상을 뒤로 옮겼다. 그리고 레닌동상이 있던 자리에 민족 영웅 마나스의 동상을 세웠다. 소련의 잔재를 없애기 보다는 뒤뜰로 보내고, 수도 비슈케크의 중앙광장인 알라토 광장이 키르기스 민족의 위대함으로 새롭게 구성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키르기스스탄 국립역사박물관은 소련식 유물관리·전시방법을 활용해 땅의 역사를 중심으로 시기를 나누어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키르기스스탄은 국가 내 다수 민족인 키르기스인의 문화를 중심으로 국민정신교육의 산실인 국립역사박물관의 전시를 구성하고 싶었으나, 키르기스인이 시베리아 알타이 지역의 예니세이 강 상류에서 오늘날 키르기스스탄으로 이주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박물관 내 전시구성은 땅의 역사를 시기에 따라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국립역사박물관은 전국에서 출토된 수 십 만점에 이르는 유물 중 일부를 전시하였는데, 실크로드와 연계지어서 설명되는 상징적인 유물이 바로 네스토리안경교, 景敎 십자가와 황금가면이다.

[좌]키르기스스탄 국립역사박물관에 전시 중인 네스토리안 십자가 십자가 모양이 새겨진 이 점토는 키르기스스탄 북부의 추이계곡 거주지에서 발견되었다.

[우]키르기스스탄 유목민문명센터에 전시 중인 황금가면 복사본 1958년 키르기스스탄 북부 샴시마을 인근에서 발견되었으며, 기원후 5세기경에 망자의 마스크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ACC는 키르기스스탄 국립역사박물관을 비롯한 다양한 국립박물관에 문화자원 등록 및 활용이 가능한 통합디지털관리시스템을 구축하는 것과 문화자원의 디지털 아카이빙을 지원하고 있다. 아날로그 관리대장과 정보카드로 관리되고 있는 수 십 만점의 문화자원이 유목 전통 스토리텔링을 만나 2025년 이후 세계시민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서비스될 것이다. ACC의 노력의 결과가 명화 ‘로마의 휴일’처럼 극적일 수는 없지만,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의 문화적 자긍심이 올라가고 이 땅을 찾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져, 선도적인 관광국가가 되길 희망하는 키르기스스탄에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by
전봉수(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학예연구사)
Photo
AC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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