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고도 찬란했을 여느 날들의 풍경

ACC 아시아 네트워크 《일상첨화日常添畵》

일상이라는 소소하고 거대한 서사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 행위이다. 어느 미술사학자는 ‘호모그라피쿠스(homographicus)’, 즉 그림 그리는 인간이라 인류가 생존했다고 말했다. 몇천 년, 아니 몇만 년 전 과연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인지도 모를 그 누군가가 그린 그림을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언어도 문자도 없던 시절, 그림은 유일무이한 소통 매체였을 것이다. 그림이 바로 언어이고, 문자였다.

깜깜한 동굴 벽 희미한 촛불 아래 그려진 그림엔 생존 키워드가 들어있고, 그들의 염원이 들어있고, 우리를 머나먼 시간과 연결해 주는 열쇠가 들어있다. 하나의 그림은 역사책과도 같다. 그림을 그린 작가가 살아온 시대의 풍경이 있고, 그 안에 작가라는 개인의 시선이 있으며, 누군가 살아왔을 시간이 녹아 있다. 거대한 서사로 기록되지 않아도 될 하잘것없는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다시 ‘시대’가 되는 궤도는 쉼 없이 이어진다. 한국과 레바논, 시리아의 여섯 작가가 지낸 일상의 풍경은 20세기 아시아의 기록이 되었다. <일상첨화日常添畵>는 일상이라는 소소하고도 거대한 시대의 단면을 담담하게 펼쳐낸다.

한국과 레바논, 시리아 세 나라 모두 20세기 초 식민의 시대를 거쳐왔으며, 미술에서도 이 시기를 통해 서구 미술이 도입되었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한국은 일제 강점기 일본을 통해 서양화가 도입되었으며, 레바논과 시리아는 프랑스의 통치 시기가 있었다. 이번 전시 작가 모두 20세기의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몸소 겪어낸 이들이다.

조국을 휩쓸던 폭풍이 사라진 후 담담하게 삶을 이어가는 이들에게 포착된 하루하루 일상의 날들이다. 더없이 평범했을 날들의 풍경들은 그림에 박제되었다. 그림은 시간을 담고, 색깔을 담고, 그날들의 자잘한 주름을 켜켜이 쌓는다. 흘러가지 않는 박제된 날들의 풍경이 차곡차곡 담긴다. 같고도 다른 풍경들, 그 시대를 살았던 누군가가 있고, 자유를 갈망하던 날들이 있고, 평화롭게 흘러가는 지극히 아름다운 일상이 스며있다.

여섯 작가의 같은 시대, 다른 시간

전시장 입구를 지나 차츰 어두워지는 공간, 발걸음을 붙드는 사진들이 있다. 김환기, 천경자, 오지호, 임직순, 아민 엘 바샤(레바논), 파테 무다레스(시리아) 총 6인의 얼굴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화가들의 치열했던 순간, 그들은 사진에 박제된 얼굴로, 누군가의 육성으로 기록되었지만, 이들이 남긴 작품은 내내 새로운 대상과 교우한다.

옅은 어둠 속 고요하게 작품을 밝히는 조명들은 과거의 시간을 떠올려 낸다. 한국 작가인 김환기, 오지호, 임직순, 천경자 모두 남도와 인연이 깊다. 전남 고흥生인 천경자, 전남 신안生인 김환기, 전남 화순生의 오지호, 충북 괴산生이지만 이후 조선대학교에 재직하였던 임직순, 네 작가 모두 일제 강점기 기간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서아시아 레바논 작가인 아민 엘 바샤와 시리아의 파테 무다레스도 프랑스에서 공부하였다. 이들은 식민이라는 같은 시대를 겪었고,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다른 시간을 살았다, 작가들이 그려낸 일상의 풍경들은 치열하고도 고요한 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서양의 인상주의를 한국적 인상주의로 개척하며 따뜻한 남도의 풍광을 내내 그려온 오지호는 화가이자 일제에 저항했던 민족주의자였다. 서양의 화구를 사용했지만, 그의 작품을 채우는 건 한국의 자연이 가진 충만한 생명감과 아름다운 색이었다. 전남 신안에서 태어나 아름다운 바다의 품에서 자란 김환기에게 신안의 바다는 자신의 근원이었다.

일본 유학과 프랑스 미국에서의 작가 활동을 이어가면서도 더욱 끈질기게 매달렸던 것은 자신의 뿌리였다. 전시된 단 몇 점의 작품 속 푸른색은 신안의 너른 바다를 연상케 한다. 색채의 마술사라 불리던 임직순은 조선대학교에 재직하며 호남의 서양화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자연 속 색채와 빛을 탐구해 가던 작품은 점차 내면으로 귀의하며 대상의 본질을 추구했다. 천경자는 전남 고흥 출생으로 해방 이후 서양화의 증가와 추상미술의 발현 등에도 불구하고 동양화가라는 자신의 길을 묵묵히 고수하였다. 색이 바랜 먹빛과 오래된 스케치의 흔적을 보노라니 작가의 섬세한 손길이 스치는 듯하다.

서아시아 레바논의 작가인 아민 엘 바샤는 프랑스 유학과 이탈리아 스페인 활동을 거쳤지만, 작품의 근간에 스민 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들의 일상 풍경들이다. 따뜻하고 선명한 색채의 형상들에 베인 작가의 시선을 따라 20세기 레바논의 풍경들을 다시금 바라보는 기분이다. 전시장의 맨 끝, 시리아 출생인 파테 무다레스의 작품이 있다. 어두운 벽면 위로 마치 영화 스틸컷처럼 그림들이 떠오른다. 어린아이의 그림 같은 두터운 화면 위 아련한 형상들엔 많은 서사가 축적되어 있다. 로마와 파리 유학 시기를 거쳤지만, 작품의 근간은 가족의 이야기, 사회 정치적 문제 등 자신의 땅으로부터 출발한 이야기들이다.

찬란하고도 평범한 일상의 나날들을 위하여

천천히 전시장의 작품을 따라 걷다 보면 작가가 바라본 풍광이 보이고, 작가의 시선이 머문 어느 장소들이, 이들이 끈질기게 파고들었던 내면의 세계로 다가간다. 남도의 풍광에서 비롯한 한국의 자연과 정신, 나아가 아시아의 역사로 차근차근 시선이 옮겨져 간다. 이들이 살았던 여느 날들의 일상은 그림에 차곡차곡 내려앉았다.

하나의 그림은 거대한 시간을 품고, 광활한 풍광을 압축한다. 바다와 섬과 항구도, 산과 평야와 정원도 제각기 색과 형상으로 공명을 만들어 낸다. 일상의 나날들이 모여 역사의 궤적을 일구듯, 작은 모래알 물 한 방울로부터 시대의 풍경은 일궈진다. 빠른 발걸음보다 느릿느릿 전시장을 어슬렁거려 보자. 천천히 무등산을 바라보고, 망망대해에 고요히 서 있는 섬을 바라보고, 그라나다의 어느 도서관에 앉아보고, 레바논의 집들 사이를 걷고, 시리아의 시골길을 걷는다. 그렇게 그림들을 따라 시간을 넘나들어 본다. 일상의 나날들이 자아낸 찬란하고도 평범했을 한때를 교감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오늘의 일상도 삶의 궤적이 되어가리라 생각하며.





by
문희영 (moonhy19@naver.com)
Photo
디자인아이엠 포토그래퍼 송기호
공감 링크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