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물에서 건져 올린 접시에 담긴 옛 사람의 이야기

아시아문화칼럼

바다를 건너 흐른 600년 전 동북아시아의 문화 교류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접시 한 점

지난 2016년 국립중앙박물관은 신안해저선 발굴 40주년을 기념하는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이라는 전시를 열었다. 이 전시에는 1976년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한 이래 1984년까지, 11차례에 걸친 발굴을 통해 출수出水한 신안해저유물이 소개되었다. 당시의 전시는 수량에서 정말 압도적이었는데, 도자기가 중심인 2만여 점의 유물과 동전 1톤(대략 28만 개)이 출품되었다.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 전시. 출수 도자기와 목재

전시장을 가득 채운 도자기는 하나 같이 절정에 이른 중국 원나라 도자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관람객의 눈길을 오랫동안 사로잡은 작품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경덕진요景德鎭窯에서 제작한 청백자靑白磁 접시였다. 2만 4천여 점의 출수품 중 단 하나에 불과한 작은 접시지만, 이 유물은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을 대표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시를 쓴 접시 청백자유리홍쌍엽문시명반 靑白瓷釉裏紅雙葉文詩銘盤

시를 쓴 접시. 중국(원), 14세기, 지름 16.4cm, 높이 1.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접시가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순도 높고 품위 있는 유약의 하얀 빛깔과 그 아래에 숨겨진 옅고 은은한 나뭇잎 그림, 그리고 두 줄의 글자 때문이다. 이 모두는 이름 모를 도공이 흙과 불을 다그쳐 얻어낸 것이다. 이 시기 경덕진요의 백자는 청색 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유약층을 가진 것으로 흔히 청백자, 청백유자기라 불렸다. 이러한 발색은 유약 속에 14%까지 포함된 산화칼슘의 영향이라고 한다. 이 유물도 어느 정도 청색이 감도는 것은 맞지만, 전반적인 발색은 순백자에 더 가깝다.

이 작품에 작용한 불의 놀라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색을 더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요술'이 베풀어졌기 때문이다. 바탕에 그려진 두 개의 나뭇잎 문양에 대충 대충 무신경하게 넣은 듯한 안료가 '불'과 만나면서 옅은 붉은 빛을 띠게 된 것이다. 이 분홍색에 가까운 색은 도공의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닌 불의 조화 같다. 이런 색을 띤 자기를 홍록채紅綠彩라 하는데, 몽골이 지배한 원대에 황실과 귀족을 위해 제작한 최고급 그릇이다.

이런 종류의 자기는 대부분 회화의 진채와 같은 강렬한 색채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작품은 담담한 담채에 더 가깝다. 우윳빛의 품위 있는 하얀색 사이에 자리한 이 색채는 은은하면서도 화려하다. 이 빛은 열에 녹아 유리처럼 변한 유약층의 아래에서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온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유형의 자기를 유리홍釉裏紅이라 부르기도 한다.

청백자 접시. 중국(원), 14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시냇물에 실려 보낸 사랑 이야기

이 작고 하얀 접시 위에는 담담한 성정으로 써내려간 오언절구의 빛바랜 글 두 줄이 보인다. 이 접시에 글을 쓴 도공은 분명 검은 빛을 생각했겠지만, '불' 혹은 ‘바닷물’의 조화는 이를 붉은 빛에 더 가까운 색으로 바꿔 버렸다. 그 시구는,

流水何太急 흐르는 물아 너는 어쩜 그리도 바쁘게 흘러가니?
深宮盡日閑 이 구중의 궁궐은 온종일 한가하기만 하단다.

이다. 궁궐에 사는 누군가가 궁궐을 지나 여염으로 흘러가는 시냇물을 보며 자기 신세를 한탄한 내용이다. 이 글은 송대의 인물인 장실張實이 쓴 ‘『유홍기流紅記』’라는 글에 나오는 오언절구의 시이다. 그에 따르면, 시와 관련한 고사의 배경은 당 희종(재위 873~888년) 연간이라고 한다. 이 시점은 당 전역을 휩쓴 농민의 저항인 황소黃巢의 난이 발생한 시기와 겹친다. 만당晩唐, 836~907도 이제는 시들어 당제국의 몰락이 어느 누구의 눈에나 '선'해가던 시기였다.

이 접시에 기록한 시의 원문은 다섯 글자의 한자로 된 시구 네 개로 구성한 오언절구로 되어 있다. 하지만 그 중에 두 구만 기록되었다. 접시에 기록되지 않은 나머지 두 구는,

殷勤謝紅葉 내 말 못할 그리움을 단풍잎에 담아 보내려는데,
好去到人間 부디 사람들 사는 곳에 잘 전해 주렴.

이다. 비로소 접시에 담긴 글의 전체적인 내용이 확인된다. 이 시는 궁궐에서 사는 혼기 찬, 그러나 황제의 부름을 입지 못한 궁녀가 쓴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용이 마치 <아가씨와 건달들>에 나오는 '아들레이드의 애가' 같은 느낌을 준다.

당나라 시대 어느 궁녀가 무료함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 시를 낙엽 한 장에 쓰고 몰래 물에 띄워 보냈다. 그러나 누군가의 답변을 기다리며 보낸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낙엽이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젊은 남성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시의 내용에 호기심을 갖고, 이름 모를 궁녀에게 보내는 위로와 위안을 담은 시를 낙엽에 써서 궁궐 상류에서 흘려보낸다. 그리고 궁녀는 우연히 시냇물이 실어다 준 시가 쓰인 낙엽을 발견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시’ 두 편으로만 상상될 뿐인, 서로를 그리워하게 된다. 물론, 이들의 소망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홍엽제시도 紅葉題詩圖. 중국(명), 전 당인(唐寅, 1470~1523) 작, 47x102cm,
Clark Center for Japanese Art and Culture 소장

당제국의 몰락은 그 현실감 없는 일을 현실로 '변화'시켰다. 당 황실이 궁궐 밖으로 궁녀 일부를 돌려보내는 과정에서 나이 서른의 ‘궁녀 한씨’가 그 안에 포함되었다. 그는 한영韓泳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기거하게 되는데, 그동안 자신과 잘 맞는 배필도 만나게 된다. 그 사람이 바로 우우이다. 그는 궁녀 한씨의 단풍잎 편지를 우연히 발견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답장을 써서 시냇물에 띄웠던 인물이다. 그리고 부부가 된 두 사람에게 다시 한번 우연적 필연이 작용하여, 서로가 간직한 단풍잎 편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 뒤로 이 부부는 슬하에 5남 3녀를 두어 다들 귀한 집에 시집장가 보냈으며, 남다른 금슬로 백년해로했다. 여기까지가 북송 초기 문언필기소설인 『유홍기』의 내용이다.

정말로 그들은 ‘그후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을까?

9세기 말에 해당하는 희종대의 당제국이 몰락 직전의 상황인 것은 맞지만, 『유홍기』에 언급한 궁녀의 환가還家가 사실인지는 알기 어렵다. 그런 일은 노년의 궁녀가 궁을 떠나는 것이 아닌 바에야,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발생하기 어렵다. 또한 우우의 답시로 전해지는 글은 궁녀의 시를 얻어서 쓴 것이라 보기 힘들고, 그런 고사나 시를 접한 뒤의 감회에 가까운 내용이다. 비슷한 시가 무척 많아 그 중에는 고려와 조선의 선비가 남긴 것도 있다.

사실 이 이야기의 모티프는 당 덕종(재위 779~805) 때의 인물인 고황顧況이 남긴 시에 있다. 비슷한 내용의 글이 맹계孟棨라는 당 희종 때의 인물이 쓴 『본사시本事詩, 886』에 실려 전하고 있다. 어느 날 고황은 친구와 함께 낙양의 상양궁上陽宮 인근을 걷고 있었다. 그는 궁궐을 지나 흐르는 시냇물에서 우연히 ‘큰 오동나무 잎에 새겨진 어느 궁녀의 시’를 줍는다. 시의 내용에 흥미를 느낀 그는 자신의 감회를 나뭇잎에 써서 궁궐로 들어가는 시냇물 상류에 흘려보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누군가가 답시로 보이는 어느 궁녀의 시를 얻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고황은 당시의 궁궐 생활이나 궁녀와 관련한 시를 여럿 남긴 중당中唐, 766~835 시기의 시인이자 관료이다. 그의 시는 궁정의 관료로 생활하는 가운데 봤거나 겪은 일을 주로 담고 있다. 후대의 인물로 『본사시』의 저자인 맹계는 고황이 쓴 ‘궁녀의 시에 대한 답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옛 이야기를 기록했다. 여기에는 궁녀에 대한 그리움이나 애정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낙양의 상양궁에 거처하던 그 궁녀는 결국 궁을 벗어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궁녀의 삶을 동정한 후세 사람들은 다른 시대를 살았거나 가상의 존재일 우우를 상대로 내세워, 그 한 많은 삶을 애도하고자 한 것 같다. 이름 없는 궁녀는 이로써 한씨라는 '성'을 얻고, 꿈만 같은 혼인도 하게 된다. 이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중국을 넘어 한국과 일본에도 전해지고, 시대를 뛰어넘어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는 환상동화가 되었다. 그 때는 어느 나라에나 제왕이 있었고, 일반의 여성과는 다른 삶을 강요받은 궁녀가 살았다.

큰 물을 건너 전하려 한 작은 접시 속 사랑 이야기

이 작은 청백자 접시 위 두 장의 잎은 바로 이 고사에 나오는 단풍잎이다. 그러니 한 장에는 궁녀의 시가, 다른 한 장에는 우우의 답시가 실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굳이 두 편의 시가 모두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이름 모를 원나라 경덕진의 도공은 궁녀의 시를 두 단풍잎에 한 구씩 쓰는 것으로 귀찮은 일을 마무리 지었다.

아득한 과거에서부터 동북아시아의 한·중·일은 한문학의 고전과 그에 기반한 지식 및 사유를 공유해왔다. 그리고 지리적으로는 황해라는 지중해가 세 나라 사이에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두 개의 단풍잎과 두 구의 시만으로도, 이 작은 접시에 담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이 접시가 가진 문화적 상징성이 있다. 그것은 단순한 물물의 교류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문화의 공유를 뜻하는 것일지 모른다.

신안해저선에는 같은 모습의 도자기가 많게는 수백 점, 적게는 서너 점씩 실려 있었다. 그런데 이 접시는 오직 한 점이 실려 있었을 뿐이다. 주문자는 14세기를 살아간 어느 귀한 신분의 일본인이었다. 그는 접시에 새겨진 한씨 부인과 우우의 고사 즉, ‘홍엽양매紅葉良媒’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누군가(?)는 접시의 생김새와 도안, 그리고 시구에 대한 꼼꼼한 주문서를 작성했다. 아무래도 그것은 ‘주문서’라기보다는 간절한 부탁을 담은 편지에 더 가까운 내용이었을 것이다.

수개월 뒤 원의 경덕진에 전해진 이 어느 일본인의 주문서에 도공은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본인도 몰랐던 ‘홍엽’의 고사를 전해 듣고는 온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었을지 모른다. 아마도 그는 고사의 두 주인공이 서로에 대해 가졌던 애틋함만큼이나 깊은 호기심을 담아, 이 일본의 ‘누군가’가 주문한 그릇을 빚었을 것이다.

그는 정성스레 준비한 고령토를 접시 모양으로 얇게 빚고, 나뭇잎 부분은 다른 그릇 바닥보다 살짝 높여 윤곽이 드러나게 한 뒤, 그 안에 잎맥을 새겨 넣었다. 그리곤 그늘에서 천천히 건조한 그릇 위에 준비한 안료로 붉은 잎을 칠했다. 다만, 주문자가 부탁한 시를 전부 써넣지는 않았다. 글자로 가득한 접시는 번잡할 것이 분명했다. 이 정도 크기라면 두 구면 충분하고, 그것만으로도 주문한 이의 뜻이 충분히 담길 수 있다고 보았다.

바탕의 나뭇잎과는 다른 안료로 써내려간 글이 마른 뒤, 도공은 그릇 전체에 유약을 바르고 마르길 기다렸다. 그는 한 점씩 소중하게 갑발에 넣은 작품을 가마 안 좋은 곳에 먼저 넣은 뒤, 여러 개씩 포갠 도자기를 마저 넣고 불을 지폈다. 1,300도가 넘는 고온의 불은 안료와 유약 그리고 자기의 바탕흙에 화학적 변화를 불러왔고, 이 결과물이 바로 ‘시를 쓴 접시’가 되었다. 얼마 뒤 도공은 다른 평범한 작품과 구분하여, 이 얇고 작은 접시를 포장했다. 이 그릇이 잔잔하고 온화한 바다를 건너 일본의 그 누군가에게 잘 도착하기를 빌며….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보물선을 깨우다: 아시아 해양 실크로드> 전시. 프로젝션 맵핑으로 재현된 신안보물선의 침몰 모습(우측 위).
이 전시는 ACC와 광주과학기술원,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주)사일로랩이 공동 연구개발한 결과물을 선보이는 것이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2022년에도 <보물선 3.0>으로 신안보물선과 관련된 미디어아트 기반의 전시를 진행한 바 있다.

그러나 도공의 바람과 주문자의 애타는 기다림에 대한 응답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시를 쓴 접시’를 실은 무역선은 1323년 6월경 원의 경원(지금의 닝보)을 출발해 일본의 하카타(지금의 후쿠오카)로 향했다. 하지만 이 배는 고려의 다도해를 가득 채운 크고 작은 섬과 암초 사이를 지나다 그만 침몰하고 만다. 그리고 이 접시는 659년이 지난 1982년, 수중 발굴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 독특하고 아름다운 접시는 주문자에게는 도착하지 못했지만, 바다 속에서 600년이 넘는 시간을 온전히 버텨내 우리에게 왔다. 반면에 1323년의 배달 사고 때문에 그 어느 일본인이 새 작품을 다시 주문했고 그것이 주문자에게 잘 도착했다면, 그것은 이미 사금파리로 변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접시는 적어도 이 글을 쓰는 시점까지는 ‘홍엽양매’ 고사를 담고 있는 세계 유일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시를 쓴 접시’는 이제 소장처인 한국뿐만 아니라 제작처인 중국, 그리고 주문처인 일본 모두에게 높은 가치를 지닌 한 시대를 기리는 ‘대표작’이 되었다. 어느 한 14세기 일본인 주문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열망의 산물이 지금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 작품의 하나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서해를 둘러싼 도자기 주문·제작·유통 시스템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 사회의 폭넓은 인문학적 교감도 포함되어 있다.

이 접시에 적힌 시의 권위있는 전문가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流水何太急 물은 무슨 일로 저리 빨리 흐르나
深宮盡日閑 심궁의 난 진종일 아무 일 없는데
殷勤謝紅葉 내 신세 그윽이 단풍잎으로 알리니
好去到人間 하마 세상에 닿으려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정병설 교수 역

  • <함께 읽으면 좋은 글>
  • 맹계, 「제엽시題葉詩」, 『본사시』 정감情感 제1, 886.
  • 장실, 「유홍기」, 『청쇄고의青瑣高議(유부劉斧 편)』 전집前集 권5, 11세기.
  • 국립중앙박물관,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 국립중앙박물관, 2016.
  • 모리 다쓰야, 「원대의 도자기 유통」, 『아시아 도자문화 연구』 3, 2020.
  • 이시찬, 「송대 소설집 『청쇄고의 소고」, 『중국소설논총』 35, 2011.
by
배재훈(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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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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