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하고 해 뜬 날>리뷰

세상에 떠오른 두 개의 태양

“잘 오셨어요. 여러분, 반갑습니다.”

공연은 흰옷을 입은 여덟 명의 소리꾼이 활짝 웃으며 관객을 맞이하는 노래로 시작한다. 노래가 끝나자 무대 중앙에 유튜브 화면이 켜진다. 신화학자 김도영이 심각한 얼굴로 이 모든 사태를 지켜만 볼 수 없다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선포한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하늘 위로 두 개의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보름 안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세계 인구 절반이 사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신화학자 김도영은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그녀를 따라나선 사람은 가두리 양식장을 운영 중인 이대수와 주니어 올림피아드 출신의 수학영재 고등학생 박수아다. 세 사람은 유라시아를 넘어 태양을 활로 쏘아 떨어뜨린다는 영웅, ‘사일신’을 찾아 길을 떠난다. 그런데 두 개의 태양이 떠오른 절체절명의 시기에, 왜 두 사람은 신을 찾아가기로 한 걸까? 극본과 연출을 맡은 박인혜 연출가는 현재 우리가 겪는 문제의 힌트를 신화에서 찾으려고 했다고 한다.

고전 신화에 늘 관심이 있었습니다.
신화는 공동체의 바람과 세계관이 투영되어서 만들어지는 것이잖아요.
기후문제를 생각하며 선조들이 자연을 인식하는 태도는 무엇이었을까,
세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방식을 살펴보게 되었고 그때 사일신화가 떠올랐습니다.

사일 신화는 구체적인 내용을 달리하지만, 동아시아에서 여러 개의 태양이 떠올랐다는 신화의 원형을 지니고 있다. 몽골 신화에 등장하는 명궁 에르히 메르겐 몽골 신화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명사수이다. 그는 대지에 일곱 개의 태양이 떠올라 심한 가뭄이 들자 여섯 개의 태양을 활로 쏘아 떨어뜨렸다고 한다. 중국의 요임금 시기 예(羿) 신화에 따르면 동시에 열 개의 태양이 떠올라 초목이 모두 불탔는데 기우제를 지내도 소용이 없자 명궁인 예를 통해 아홉 개의 태양을 떨어뜨렸다고 전해진다.

‘쨍하고 해 뜬 날’의 전체 서사는 현재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바리데기’1)와 같은 구성을 따르고 있다. 여기에 현대적 해석을 더 해 다양한 볼거리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킥보드를 타고 유리국의 문지기가 등장하고, 판소리에 힙합이 더해지며, 미러볼이 움직인다. 무대는 순식간에 별세계(別世界)로 바뀌며 내면에 흥을 돋우는 바이브(vibe)로 꽉 채워진다. 소리꾼과 객석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대동’이라는 두 글자가 더욱 선명해진다.

판소리는 품이 넓은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다채로운 특성과 매력을 지니고 있어 그 안에서 어떤 부분을 쓸 것인가가 연출가의 몫이죠.
특히 판소리는 여타 장르에 비해 손쉽게 열거하는 사설이 있는데요,
여기에 서사에 필요한 다양한 장치를 넣어 관객들이 쉽게 극에 이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박인혜 연출가는 여덟 명의 소리꾼이 지닌 다양한 음색이 각 장면에서 활용되기를 바랐으며, 변화하는 공간의 질감을 전달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천신만고 끝에 세 사람은 사일신을 찾게 된다. 그러나 상상 속의 영웅과 다른 모습에 실망한다. 게다가 유리국에 살고 있는 신들은 ‘신빨’이 떨어진 B급 신들이 대부분이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신은 여전히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인류 위기에서 인간을 구하고자 나선 신들이 있었으니, 불꽃 같은 붉은 날개를 지닌 ‘주작’, 신들의 무기를 만드는 장인 ‘헤파이스토스’, 생명 잉태의 신으로 불리는 제주도의 ‘생불 할망’이다. 오랜만에 세상 구경을 나선 신들은 인간들과 함께 낡은 자동차를 타고 인간세계로 향한다. 그러나 이 여정마저 쉽지 않다. 뜨거운 태양 열기에 타이어가 녹아 차가 멈춘 것이다. 이에 헤파이스토스가 신력을 발휘해 자동차를 고치고 신과 인간들은 무사히 인간세계에 도착한다.

자, 남은 것은 두 개의 태양 중 하나를 떨어뜨리는 일이다. 서울에서도 가장 높은 건물, 126층 꼭대기에 서서 신과 인간들은 태양과 마주 선다. 자신만만하게 첫 주자로 나선 신은 주작이다. 주작은 주문을 걸어 태양을 주무르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이어 헤파이스토스가 드론 100대를 띄워 세상을 멈추려 하지만 소용없다. 신과 인간 모두 절망한다. 이대로 인류의 절반이 목숨을 잃는 것일까.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 객석은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그때 박수아가 나타나 노래를 시작한다. ‘왜 저 태양은 두 개가 되었을까’로 시작하는 노래는 기후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이 여전히 멈추지 못하는 세상, 자연의 섭리를 무시한 인간의 이기심이었음을 깨닫게 해준다. 그때 생불 할망이 생명 꽃과 죽은 꽃을 내어준다. 생불 할망의 꽃은 ‘삶과 죽음의 순환’을 의미한다. 제주도의 생불 할망은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전해준다. 그제야 두 개의 태양 중 하나가 떨어지고 지구는 원래의 모습을 찾아간다.

여성이 가진 모성과 아름다움의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인혜 연출가는 제주도 생불 할망의 등장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소리꾼-배우이자 연출가로 작업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그녀는 본 공연을 준비하며 아시아의 신화를 소재로 기후 위기 문제를 현대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어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밝혔다.

신을 닮은 인간의 이야기, 신화 속 지혜를 통해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인간의 이야기는 과거뿐 아니라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올해는 가장 더운 여름이자, 다가올 여름 중 가장 시원한 여름이었다고 한다. 신명나는 판소리와 함께 현실 속 기후 문제를 주제로 한 ‘쨍하고 해 뜬 날’, 막이 내리고도 한동안 묵직한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다.

1) 바리공주는 한국 신화에서 관북지방에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상의 인물로, 흔히 무당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발리공주(鉢里公主) 혹은 사희공주(捨姬公主)라고 하여 바리때를 지니며 베푸는 공주를 뜻하였다. 해원 굿의 원형으로 오구굿의 한마당에서 나오는데 남자가 아닌 확실시 되는 여신이다. 바리데기라고도 한다.




by
송지혜 (tarajay@naver.com)
Photo
디자인아이엠 포토그래퍼 송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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