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숨 쉬게 하는 ‘틈’의 가치에 주목하다

2023 ACC 공모 전시 《틈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바쁜 일상의 연속에서 잠시 숨돌리며 나를 챙기는 ‘쉴 틈’, 너무 심하면 곤란하지만, 어느 정도는 친근함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빈틈’, 시멘트와 아스팔트에도 자그마한 생명을 피워내는 ‘틈새’, 답답한 공간에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을 들여주는 ‘창틈’,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적당한 사이의 ‘관계의 틈’,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놀 틈’,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는 잠시 잠깐의 ‘틈’… 우리는 알게 모르게 참 많은 ‘틈’에 기대어 살아간다.

‘틈’은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면 있는 줄도 모르게 사소해 보이지만, 그 사소한 ‘틈’이 없으면 인생은 숨 가쁜 달리기가 되곤 한다. 평상시 많이 생각해 보지 못한 ‘틈’의 묵직한 가치에 주목한 전시회가 ACC에서 마련됐다. 2023 ACC 공모 전시 《틈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에서는 일상의 주변에 머물러 있던 ‘틈’을 주인공 자리로 소환한다. 전시 공간부터 작품까지 ‘틈’의 주제 의식을 제대로 보여준다.

《틈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전시는 ACC의 익숙한 전시관이 아닌 예상 밖의 장소에서 진행된다. ACC 예술극장 로비에 자리한 오픈홀. 주로 공연을 관람하기 전 대기하거나 잠시 쉬는 장소로 공연 일을 제외하고는 비어있는 ‘틈’과 같은 공간이다. 예술극장과 전시관을 연결하는 사이 공간이기도 하니, ‘틈’을 보여주기에 이보다 적절한 곳도 없다. ACC의 빈틈에서, 이곳과 저곳을 연결하는 사이 틈에서, 우리의 틈을 내어 둘러보는 ‘틈’ 전시.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 2월 공모를 통해 선정된 이은정, 유지원 두 작가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틈’의 공간적, 시간적 의미를 함축한 두 작품이 우리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며 슬며시 말을 걸어온다. ‘당신은 어떤 틈을 살고 있나요?’ 혹은 ‘당신을 살게 하는 틈은 어떤 틈인가요?’라고…

예술극장 오픈홀의 계단을 올라가면 특별한 주인공이 기다리고 있다.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반겨주는 다섯 그루의 굵직한 나무들. 땅에 뿌리박힌 나무가 아닌 이은정 작가의 손끝과 발끝에서 태어난 작품 ‘모두의 나무’다. 이 나무가 탄생하기까지 작가는 전국 곳곳을 다니며 수많은 나무를 들여다보고 쓰다듬고 얘기를 걸고 사진으로 담아왔다. 수백 그루 나무의 이미지를 인쇄해서 그 사이사이를 바느질로 이어 붙였다. 형태는 한그루이지만 결코 하나가 아닌 수백 그루 나무를 한 몸에 품고 있는 ‘모두의 나무’다. 작가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무와 나무의 줄기를 하나로 이어 붙인다. 수많은 나무를 품고 있는 다섯 그루의 나무가 어깨동무하며, 거대한 연리지가 되어 하나의 존재로 연결된다.

작품 ‘모두의 나무’는 아시아문화전당에 있는 ‘목격자 나무’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고 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총격을 입은 나무들로 오월 광주를 온몸으로 기억하는 존재들이다.

작가는 과거의 아픔을 간직한 ‘목격자 나무’의 상징성을 실내 공간으로 재구성하여 우리 모두가 다시금 그들을 목격하게 한다. 우리 또한 나무와 연결되며 함께 목격자가 되는 것이다. 바느질에는 붉은 색실을 사용해 80년 광주의 혈흔과 회복의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했다. 사이사이를 꿰매어 붙인 바느질 자국이 마치 상처를 치유하고 봉합하고 회복시키는 흔적으로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떻게 이걸 다 꿰매었을까’하는 놀라움이 서서히 감동으로 바뀐다. 존재와 존재를 연결하기 위해, 서로의 틈을 이어주기 위해 손끝이 아리도록 바느질을 이어간 작가의 노력도, 완성된 작품의 모습도 감동이다. 그 애쓴 시간이 금세 마음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얘기를 건네온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고…

오픈홀의 하얀 벽면에 마치 건축 현장을 허물고 남은 잔해처럼 보이는 작품들이 설치됐다. 건축용 특수 판지를 찢고 뜯어서 하나하나 제작한 뒤 벽면에 재조합한 유지원 작가의 작품 <판타스마고리아>다. 작품의 제목인 ‘판타스마고리아’는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언급한 개념으로 ‘비현실’, ‘환상’, ‘환영’, ‘주마등’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작품 <판타스마고리아>를 통해 인식의 틈을 비집고 들어서는 주마등 같은 깨달음의 순간을 전하고자 한다.

건축물이 해체되고 남은 파편들은 우리 눈앞에 ‘시간의 틈’을 열어 보인다. 개발로 인해 끊임없이 생산되는 새로운 건축물과 동시에 숱하게 폐기되는 폐건축물의 시간 간격. 그 시간의 틈은 너무나 쉽게 사고 또 쉽게 버리는 현대인의 소비 속도이기도 하고, 빠르게 변해가는 도시의 속도이기도 하다. 작가는 우리가 버린 과거의 잔해를 여실히 보여주며 스스로 질문하게 한다. 이토록 쉽게 버리면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인지, 개발을 통해 얻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현재와 과거의 ‘틈’, 생각의 ‘틈’을 들여다보게 하는 작품이다.

2023 ACC 공모 전시 《틈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는 9월 14일부터 시작해 올해 마지막 날인 12월 31일까지 이어진다. 정형화된 전시관을 벗어나 열린 공간에서 만나는 전시인 만큼 더 가볍고 편하게 즐길 수 있다. 가을바람 따라 잠시 시간의 틈, 마음의 틈을 내어 거닐어 보면 좋겠다. 빈틈 사이로 더 큰 즐거움이 찾아드는 시간이 될 것이다.





by
유연희 (heyjeje@naver.com)
Photo
디자인아이엠 포토그래퍼 송기호, ACC 제공
공감 링크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