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아시아 표류기 모음집 『지영록知瀛錄』

아시아문화칼럼

우주에서의 표류를 테마로 한 게임 《브레스엣지Breathedge》나 영화 《마션Martion》, 《그래비티Gravity》 등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이미 2021년 한 해만 우주를 여행한 사람이 28명이 된다 하니 일반인들을 겨냥한 우주 여행이나 달 관광 상품이 상용화될 날이 성큼 다가온 듯 하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과 달, 작열하는 태양은 태고부터 인간의 호기심과 상상력의 원천이었고, 도전정신으로 가득 찬 이들이 목숨을 걸고 우주선에 몸을 싣고 있다. 우주선이 활주로를 이륙하는 비행기만큼 많아지면 정말 우주에서 표류할 사람들도 많아질지 모르겠다. 약 두 세기 전, 바닷길이 거의 유일하게 해외로 가는 수단이었을 때 바다에서 목숨을 잃는 일이 허다했다. 영화 《타이타닉》의 소재가 되었던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1912년, 불과 한 세기 전 일이었다. 배, 비행기, 우주선으로 이동 수단은 발전을 거듭했으나, 미지의 공간이 주는 두려움, 실존하는 위험, 이를 극복하고자하는 인간의 용기는 그리 큰 차이가 없다.

17세기에 바다로 나가는 일은 노련한 뱃사람의 경험과 허술한 배, 그리고 천운 정도밖에 믿을 것이 없었다. 지금이야 비행기로 서울에서 1시간 내외, 광주나 부산에서 3, 40분이면 제주도에 갈 수 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한양에서 제주까지 가려면 족히 두 달이 걸렸으니 참으로 먼 길이었다. 그러니 바다에서 표류하다 살아남은 이의 이야기가 오죽 신기하고 흥미진진했을까. 제주목사 이익태李益泰(1633~1704)가 자신의 저서 『지영록』에 아시아를 표류했던 외국인과 제주사람의 이야기를 적은 이유도 그래서였으리라.

이익태는 본관이 연안延安, 자가 대유大裕로 1668년 문과에 급제하고 1694년 제주 목사로 발령을 받았다. 1694년 5월 8일 한양을 출발하여 6월 21일 해남 도착, 22일 보길도를 출발하여 29일 제주도에 당도했다. 그는 꼬박 두 달 남짓 걸린 여정과 약 2년간 제주목사로 일하며 보고 듣고 행한 바를 적어 『지영록知瀛錄』을 펴냈다.

이익태 영정, ©국립제주박물관.

『지영록』 첫장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지영록』의 구성은 전반부, 후반부 크게 둘로 나뉜다. 전반부에서는 이익태 본인의 이야기가, 후반부에서는 네덜란드, 중국, 일본, 제주 사람의 표류담이 적혀 있다. 전반부는 1694년 5월 2일부터 1695년 11월 13일까지 약 1년 6개월간 적은 이익태의 일기로 제주도 문화와 역사, 자연 경관과 풍습, 17세기 제주의 행정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와 기록이다. 제주도 최초의 인문지리지로 중요성을 인정받아 2018년 보물 제2002호로 지정되었으며, 원본은 이익태의 후손인 연안이씨 야계종친회에서 기증하여 국립제주박물관의 상설전시실에서 관람할 수 있다. 후반부는 이익태가 부임하기 이전인 1652년〜1693년까지, 즉 효종부터 숙종대까지 제주에서 발생한 주요 표류 사건 기록을 조사하고 14편을 골라 실었다.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두 편이 『하멜 표류기』로 잘 알려진 「서양 사람 표류기」와 「김대황金大璜 표해일록」이다.

「서양 사람 표류기」는 네덜란드 호르큄Gorcum 출신 핸드릭 얌센 하멜Hendrik Y. Hamel과 그 일행의 표류기를 다룬다. 하멜은 1651년 동인도회사에 취직하여 1653년 7월 상선 스페르베르Sperwer호를 타고 대만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태풍을 만나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漂着했다. 이들은 온갖 고초 끝에 1666년 탈출에 성공해 나가사키를 거쳐 1668년 네덜란드로 귀국한다. 무려 14년만의 일이었다. 귀국 후 1668년 『네덜란드선 제주도 난파기Relation du Naufrage d'un Vaisseau Hollandois』 및 부록 『조선국기Description du Royaume de Corée』를 발표했다.

『하멜 표류기』 첫 장. 이 책은 1670년 불어번역본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이는 조선의 지리·풍속·정치·군사·교육·교역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멜표류기』로 널리 알려져 있고, 제주, 여수, 강진 등에 하멜박물관이나 기념관이 세워졌다. 2015년 고향 네덜란드 호르큄에선 하멜의 생가로 추측되는 곳에 ‘헨드릭 하멜 박물관’이 문을 열어 하멜과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네덜란드 헨드릭 하멜 박물관

『지영록·서양 사람 표류기』에서는 『효종실록』을 비롯하여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같은 공식 기록에서 볼 수 없는 인간애 넘치는 묘사가 눈에 띈다. 제주 관아는 여러 차례의 신문과 통역을 통해서도 국적을 알 수 없자 제주에 표류해서 조선으로 귀화한 박연朴延을 제주로 내려 보내 달라고 한양에 요청한다. 박연의 본명은 얀 얀세 벨테브레Jan Janse Weltevree로, 1627년 우베르케르크Ouwerkerck호를 타고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제주도에 표착했다. 박연은 다른 동료 2명과 조선에 귀화해 훈련도감에 배속돼 명에서 들여온 홍이포紅夷砲의 제조법·조작법을 조선군에게 지도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박연과 고향 사람과의 첫 만남은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박연과 표류해 온 서양 오랑캐 3인은 처음에 서로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자세히 살피다 말하기를 “나와 형제 같은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이로 인해 서로 이야기를 하며 슬픔에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박연 역시 눈물을 흘렸다. 다음 날 박연이 서양 오랑캐를 죄다 불러 각자 사는 곳의 이름을 말하게 했는데 모두가 남만 땅에 살고 있었다. 그중 한 어린아이가 나이는 겨우 열세 살이고 이름이 데네이스 호베르첸이었다. 그 아이 홀로 남만국에서 박연이 살던 곳과 가까운 지방 사람이었다. 박연이 자기 친족에 대해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살고 있던 집은 무너져 옛터엔 풀이 가득하고 아저씨는 돌아가셨지만 친척은 살아 있습니다.”라고 했다. 박연이 더욱 비통함을 이기지 못했다.

이미 조선에 귀화한지 이미 30여년이 다 되어 갔으나,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고향에 돌아갈 길 없게 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박연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독자로 하여금 울컥하게 만들 정도이다. 또한 『지영록』은 처음 제주에 도착했을 때의 네덜란드인의 복장, 눈동자 색과 피부 빛깔, 예의범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자 쓰는 방식, 우리나라와 반대로 이름을 앞에 쓰고 성을 나중에 쓰는 풍습, 손짓 몸짓 등을 활용한 의사소통방식까지 매우 소상한 기록을 남겼다.

한편, 「김대황 표해일록」은 1687년 제주진무濟州鎭撫 김대황 등 24명이 제주목사가 직책을 교대할 때 진상하는 말 3마리를 싣고 화북진禾北鎭에서 육지로 출항했다가 추자도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한달 여를 표류하다가 오늘날 베트남 호이안, 즉 안남국 회안부安南國 會安府에 표착한 일을 적었다. 1688년 7월 중국 복건성 상선에 쌀 600포를 주기로 약속하고 출항, 광서-광동-복건-절강 4개 성 연안을 경유하여 서귀포에 돌아온 날이 12월 17일이다. 표류한 지 16개월 만에 비로소 고향 땅을 밟았다. 「김대황 표해일록」은 베트남-중국-조선을 거쳐 돌아온 송환 절차와 여정은 물론, 17세기 베트남의 물산, 행정과 풍습까지 소상히 적었다. 조선 사람이 베트남을 간 일이 거의 드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니와 표류해서 베트남까지 갔다 생환한 기적 같은 이야기도, 베트남의 풍속 기록도 모두 놀랍고 진기할 뿐이다.

안남국 사람들의 의관제도는 신분의 고하나 남녀의 차이가 없이 한 가지였다. 그래서 귀천을 구분할 수 없었다. 모두 이를 검게 칠했으며, 지위가 높은 사람은 말총 모자를 썼다. 크고 작은 공문서에는 모두 정화正和 연호를 쓰고 있는데, 무신년은 바로 정화 9년이었다. 집집마다 노루·사슴·물소·코끼리·공작 등의 가축을 많이 기르고 있었다. 또 물소로 밭을 갈고 코끼리를 타며, 소와 말도 있었는데 체격이 크고 뛰어났다. 농장은 모두 무논이었으며 밭곡식은 없었다. 산림山林은 모두 뽕나무와 삼麻이었다. 1년에 2번 벼를 재배하고 8번 누에를 쳤다. 풍속은 순박하고 넉넉해 음식과 물자가 풍족했다.

「서양 사람 표류기」와 「김대황 표해일록」은 17세기 조선과 외국이 서로를 어떻게 인식하였는지를 보여주기도 하거니와 아시아에서 표류민이 발생하였을 시 조사 과정이나 표류민에 대한 구휼救恤과 배려, 송환까지 하나의 체계화된 국가 간의 공식적 처리 방식이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더불어 명·청 교체기의 혼란, 삼번의 난, 동남아 화교 상인의 출현, 류큐의 일본 복속, 17세기 아시아 민간 무역 체계와 주요 물품, 민간 풍속까지 당시 동아시아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이익태는 『지영록』 에 왜 표류기를 넣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서문에 “지금을 이을 뒷사람을 기다리는 마음에서” 였노라고 밝혔을 뿐이다. 17세기에 조선은 아직 달나라에 토끼가 산다고 믿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 14년 만에 조선을 탈출해 네덜란드로 귀향한 하멜, 베트남까지 떠내려갔다가 살아 돌아온 김대황의 실화는 놀랍다. 이익태의 집필 의도가 무엇이든 하멜과 김대황의 표류가 21세기 우주 여행을 실현하고 있는 뒷사람들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는 이유다.

국립제주박물관 고전번역총서 『지영록』 내려받기





by
안재연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학예연구사)
Photo
ACC 제공, 국립제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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