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C 따라 동네 한 바퀴

포토 에세이

반듯반듯 말끔하게 다듬어진 보도블록은 갓 한두 살이 되었을까 싶은데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가로수는 언제 묘목이었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울 만큼 긴 나이가 체감된다. 유난히도 긴긴날 이어지는 야속한 비 덕분인지 가로수들은 하늘을 향해 점점 키를 더 키워가고 있다. ACC 주변을 따라 걷다 보면 몇 해를 보냈는지 어림조차 어려운 나무들이 가득한 게 이 동네의 나이도 꽤 오랜 시간을 품었음이 확실하다.

하늘마당 아래 장동로터리 앞 가로수와 우고 론디노네 조각

긴 시간 광주의 흔적이 자리한 곳, 광주의 원도심 동구는 ACC를 기점으로 볼거리 즐길 거리 가득한 문화예술의 소소한 공간들과 광주의 역사가 공존하는 곳이다. 긴 시간 담겨 온 사람들의 삶 내음 가득 베인 동네를 찬찬히 둘러보자.

광주읍성유허

광주의 오랜 역사 한 꼭지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자리에서부터 시작된다. 고려 시대부터 있었던 광주의 읍성, 조선 시대까지 쭉 이어지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일제의 읍성 철거령에 의해 철거되었지만, 문화창조원 입구에는 그 흔적이 남아있다. 흔적은 하나이지만, 실제 사대문처럼 읍성의 문이 있었던 흔적은 또 있다.

전남여고 옛정문 앞

예술공간 집 전경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도보로 7분여 거리, 한때 예술시장으로도 시끌벅적했던 대인시장의 입구에서부터 전남여자고등학교로 가는 길은 동계천이 흘렀었고, 동문 다리가 있었다. ‘동문’이 있었다는 흔적이다. 이곳엔 아주 오래된 약국인 ‘동문약국’도 꽤 오랜 세월 그대로이다. 광주의 읍성, 동문이 있던 곳 가까이에 세워진 중앙초등학교가 있다. 개교한 해는 1907년이다. 한때 광주의 명문 초등학교였지만, 원도심의 주민들이 외곽으로 다 사라지면서 지금은 전교생이 31명밖에 되지 않는다. 건너편엔 1927년 개교한 전남여자고등학교가 있다. 교정 안 건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솟아오른 나무들이 학교의 나이를 바로 짐작하게 한다.

필자가 운영하는 갤러리인 ‘예술공간 집’도 전남여자고등학교 바로 앞에 있다. ‘예술공간 집’은 어릴 적 살았던 한옥을 갤러리로 탈바꿈한 아담한 전시공간이다. 가끔 전남여고 졸업생이시다며 동문 모임 후 갤러리에 오시는 흰머리 지긋한 할머니들을 뵐 때면 그분들의 긴긴 세월 앞에 경건해지곤 한다. 전남여고 담벼락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샌가 젊은이들의 활기가 넘쳐나는 명소가 된 동리단길로 접어든다.

광주의 외곽에 신도심이 생겨나고 많은 이들이 그곳으로 이사를 나가면서 한적했던 원도심인 동명동, 장동 등이 다시 북적인 건 근 10여 년 사이일까. 이제 ‘동리단길 카페 거리’로도 불리는 이곳에 언젠가부터 하나둘 학원가가 들어서며 카페와 상점들이 들어섰다. 2015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개관하며 더 많은 이들이 모이고 ‘동리단길’이란 이름이 자연스레 붙었다.

갤러리 혜윰

도심 속 멋진 공원인 하늘공원이 자리한 곳 인근이다. 주말이면 더 북적이며 생기 넘치는 동리단길의 곳곳엔 근사한 예술공간들도 자리한다. 하늘공원 아래 가로수만큼이나 우뚝 솟은 우고 론디노네의 조각이 있는 곳, 네 갈래의 길이 교차하는 지점이라서인지 ‘장동 로터리’로 불리는 곳이다. 한 서른 걸음 정도 걸으면 될까. 한옥을 개조한 아담한 갤러리가 있다. 사진, 공예 중심 ‘갤러리 혜윰’이다.

2018년 5월 개관한 이래 사진과 공예 장르의 다양한 전시를 꾸준히 열고 있다. 동명동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모던&컨템포러리 갤러리 ‘솅겐갤러리’가 있다. ‘솅겐조약’의 역사적 의미를 빌려온 이름이다. 현대미술의 자유로운 소통과 교류의 장소를 추구하며 꾸준히 전시를 개최해오고 있다.

동구 인문학당

현대미술을 추구하는 공간이 있다면 한국과 일본, 서양의 양식까지 근대의 시간을 품은 공간이 있다. 1954년생으로 70여 년 시간을 품은 집이다. 광주 동구청 소유였던 이 집은 지난 2022년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다시 리모델링되었다. 양옥과 한옥이 오묘하게 어우러진 집터엔 문화 예술의 내음 가득한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광주 동구의 ‘인문학당’으로 역사, 예술, 여행 등 끝없는 이야기들이 여전히 재생 중이다. 햇살 좋은 날 그저 마당에만 앉아있어도 긴 시간이 베인 집의 안온함에 마음속 평화를 충전하기 충분하다. 광주의 가장 오랜 동네여서일까. 유난히 긴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들이 곳곳에 박혀 있다.

ACC와 전남여고의 가운데 ‘비움박물관’이 있다. 2016년 3월 개관한 이곳은 1960년대 이전 우리 민속품 3만여 점을 보유한 박물관이다.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시간 여행을 하듯 오랜 부엌살림, 사랑방, 행랑채, 마당, 출산&장례문화 등에 있던 오래된 물건들이 과거로 훅 잡아끈다. 바로 인근 예술의 거리가 있고, 은암미술관이 있다. 한때 인사동처럼 벼룩시장이 열리기도 했던 예술의 거리엔 표구점, 화방, 액자 집, 갤러리 등이 북적북적 모여있다. 간혹 들여다보이는 창문 너머 보석 같은 작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움박물관

원도심이라는 단어를 증명하듯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왔던 곳들이 많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 온 병원, 상점들, 광주극장 등 변화하는 것들 사이 변화가 아닌 또 다른 지속을 만들어낸 ‘김냇과’도 있다. ACC에서 예술의 거리를 지나 5분여 걸어가다 보면 바로 눈에 들어오는 파란색 건물이 있다. 실제 병원이었던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복합예술공간으로 재탄생된 곳이다. 갤러리, 카페, 호텔이 공존한다. 음악회, 강연, 토크 등 다채로운 문화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이다. 건물 외관의 파란색부터 마음을 환기해 준다.

ACC 따라 보통의 발걸음 20여 분 안에 수많은 공간이 콕콕 박혀 있다. 조금은 특별하게 예술로 동네 한 바퀴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는 건 어떨까.





by
문희영 (moonhy19@naver.com )
Photo
문희영, 황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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