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포먼스 <땅은 망자를 감추지 않는다>

ACC 오월문화주간

작품으로 기억하는 오월,

퍼포먼스 <땅은 망자를 감추지 않는다>
-레지나 호세 갈린도 작가

ACC 아시아문화광장 한 편에 흙무더기가 쌓였다. 무려 열세 개의 흙무더기가 야트막한 봉우리를 이루며 솟아올랐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모여든다. 자그마한 체구의 맨발의 여인이 흙산을 향해 서서히 걸어간다. 흙을 밟고 올라가 옴팍하게 파인 봉우리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삽을 든 검은 옷의 사람들이 다가와 여인을 흙 속에 묻기 시작한다. 허리 높이부터 시작해 가슴께를 덮고 어깨를 덮고…. 한 삽, 한 삽 더해질수록 여인의 몸은 흙에 파묻혀 들어가고 끝내 얼굴만 남는다.

온몸으로 흙의 무게를 감당하며 정면을 응시하고 선 여인.
결코, 외면하지도 회피하지도 않는 끈질긴 시선은 무엇을, 누구를 향한 것일까.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레지나 호세 갈린도 작가

결코, 감춰질 수도, 덮을 수도 없는 5·18의 진실을 펼쳐 보이다

이날 아시아문화광장에 작은 소동을 일으킨 주인공은 바로 과테말라에서 온 '레지나 호세 갈린도' 작가다. 저항적이고 급진적인 행위예술로 '제51회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명성의 행위예술가이다. 작가는 이날 ACC 기획전시 《걷기, 헤매기》와 연계한 작품 <땅은 망자를 감추지 않는다>를 위해 직접 흙 속에 파묻히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ACC 오월문화주간'의 행사이기도 한 <땅은 망자를 감추지 않는다>는 5·18 민주화운동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품은 제목 그대로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진실은 결코 감춰질 수도, 묻힐 수도 없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고대 마야문명에서 성스럽게 여겼던 숫자 '13'을 의미하는 열세 개의 흙 봉우리에서부터 작가의 5·18 민주화운동을 향한 시선을 짐작할 수 있다. 진흙탕에서도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흙 속에 묻혀갔지만, 끝끝내 성스러웠던 5·18 희생자들의 정신. 아무리 많은 흙무더기를 쏟아부어도 5·18의 진실을 목도한 그들의 눈동자를 덮을 수 없고, 아무리 혹독한 억압이 닥쳐와도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은 감춰질 수 없음을 퍼포먼스를 통해 우리 눈앞에 고스란히 그려낸다.

5·18 희생자들이 한 송이 사람 꽃이 되어 피어난

화산 봉우리

13명의 사람을 13개의 흙 봉우리에 묻어가는 퍼포먼스는 1시간 남짓 더디고 길게 이어졌다. 우리와 똑같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이들이 어느 날 누군가에 의해 흙에 묻혀가는 모습을, 그들의 마지막 숨결을 느리게 지켜보는 시간이었다.

흙은 쌓아도 쌓아도 자꾸 흘러내렸고 공연자들은 묵묵히 그 흙 세례를 견디며 오로지 허공을 응시할 뿐이다. 그 흔들림 없는 눈빛에서 어떤 순간에도 절대 눈감지 않겠다는 의지가 전해진다. 완성된 흙 봉우리는 마치 한 송이 사람 꽃이 피어난 듯 보이기도 하고, 화산 봉우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루할 정도로 조용하게 이어진 퍼포먼스는 의외로 마지막 부분에서 묘한 감동을 자아냈다.

공연이 끝나갈 무렵, 흙 봉우리에 파묻혀 있던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덮고 있던 흙을 밀어내며 흙무더기 밖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한다. 마치 5·18 희생자들이 세월을 거슬러 다시 살아 돌아오는 듯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얼마나 살고 싶었을까. 저렇게 걸어서 얼마나 가족들에게 가고 싶었을까. 결코, 돌아오지 못한 그들이었기에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장면이었다.

침묵의 퍼포먼스가 전하는 묵직한 메시지

'그들의 희생이 있어 우리가 있다.'

한 시간 동안의 퍼포먼스에서 작가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지만, 관객들은 묵직한 침묵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에 수많은 5·18 희생자들이 묻혀갔음을, 그들의 희생이 우리가 딛고 있는 오늘이라는 단단한 대지가 되었음을, 그들의 정신이 씨앗이 되어 또 다른 희망의 꽃을 피워내고 있음을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고….

80년 광주의 또 다른 이름

독재와 내전의 아픈 역사를 품은 과테말라

‘레지나 호세 갈린도’ 작가가 5·18에 이토록 공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나라 과테말라가 80년 오월 광주와 닮아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과테말라는 오랜 세월 내전을 겪고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그 시간 동안 수많은 민중이 피 흘리며 희생당했다. 작가의 또 다른 작품들에는 독재와 내전으로 얼룩졌던 과테말라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특히 작가에게 황금사자상 수상의 영예를 안긴 작품 <누가 그 흔적을 지울 수 있을까?>는 오월 광주의 이야기라고 해도 낯설지 않을 만큼 광주 5·18과 연결되는 지점이 많다.

1980년대 과테말라 군사 독재에 항거한 발자국들

<누가 그 흔적을 지울 수 있을까?>

1980년대 과테말라 군사 독재 시기에 일어난 희생을 상기시키는 작품으로, 작가는 사람의 피를 담은 대야를 들고 과테말라 거리에 핏발 자국을 남기며 걸어간다. 작가가 지나간 자리에는 붉은 핏빛의 발자국이 찍히고 그 발자국은 헌법재판소까지 이어진다. 역사 속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을 잊지 않으려는 작가 자신의 발자국이자, 독재에 저항하며 쓰러져간 희생자들의 발자국이기도 하다. 땅이 감추지 못한 5·18 정신처럼 그 누구도 지울 수 없는 민주화를 향한 투쟁의 흔적이다.

경제발전이라는 명목 아래 착취당한 자연과 사람들

<사람들의 강>

또 다른 퍼포먼스 작품 <사람들의 강>은 국가가 경제발전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원주민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그 결과 강이 오염되고 말라붙은 현실을 비판하고 나선 작품이다. 작가는 강이 흐르던 장소를 기억하기 위해 하늘색 천을 들고 사람들과 함께 길을 걷는다. 그리고 함께 외친다. “우리는 생명을 위해 싸운다.” “우리는 물을 위해 싸운다.” “물은 상품이 아니다”라고.

이 행진에는 어린이부터 노인들까지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혼자 걷지 않고 함께 걸을 때 더 용기가 생기고,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음을 참가자들의 힘찬 얼굴에서 느낄 수 있다.

<‘레지나 호세 갈린도’ 작가와의 대화>

  • <땅은 망자를 감추지 않는다> 퍼포먼스 마무리하시면서 매우 힘들지 않았는지요?

    가슴까지 흙이 꽉 차올라서 숨쉬기가 상당히 어려웠고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움직이면서 흙이 떨어지곤 했어요. 1시간 정도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해서 생각보다 힘들었습니다.

  • 광주에는 첫 방문인데 광주에 대한 느낌이 어떤가요?

    위대한 역사적 기억을 가진 도시입니다. 5·18을 기념하는 평화적인 시위와 행진, 콘서트 등을 볼 수 있어서 너무 뜻깊었습니다. 새로운 민주 도시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땅은 망자를 감추지 않는다> 작품을 어떻게 구상하게 되셨나요?

    기억에 대한 구출 작업이자 진실을 외치는 작품으로 구상했습니다. 퍼포먼스를 통해 항상 숨겨진 것, 침묵 되는 것, 부인되는 것을 비추고자 했습니다. 기억은 영원히 숨겨지거나 침묵하거나 부정될 수 없습니다. 땅은 죽은 자를 숨기지 않고, 진실을 뱉어낸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980년대 한국과 과테말라를 생각하면 두 나라는 아주 비슷한 이야기를 갖고 있습니다. 군사 정부, 좌파 운동과의 전쟁 한가운데에 있던 폭력적인 독재 정권. 그 폭력에 저항하며 죽어갔던 수많은 사람... 5·18은 국가 범죄이며 마땅히 심판받아야 합니다.





by
유연희 (heyjeje@naver.com)
Photo
디자인아이엠 포토그래퍼 송기호, AC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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