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칠하는 사람>

시간이라는 벽에 붓질을 하는 사람

전남도청이라는 공간의 축1980년이라는 시간의 축에서
도청을 무대로 그 시대를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5·18을 기억해 보는 시간,

연극 <시간을 칠하는 사람> 속으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지난 17일부터 21일까지 ACC 예술극장 극장 1에서 5·18 최후 항전지였던 옛 전남도청과 그곳에 있던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공연 <시간을 칠하는 사람>을 선보였다.

공연은 2018 ACC 창작스토리개발사업 '광주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시나리오 공모를 통해 선정된 <시간을 짓는 건축가>(송재영 作)를 모티브로 제작되었으며, 3년여 간의 제작 과정을 거쳐 2020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 공연에 이어 2021년부터 3년째 ACC 창제작 레퍼토리 공연으로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처음 목표는 5·18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죽지 않았다.
최대한 드러내지 않고 관객들이 생각할 여운을 주고자 했는데 많이 드러났네요...”

- 윤시중 연출가 인터뷰 중 -

<시간을 칠하는 사람>은 전남도청 벽을 하얗게 칠하던 칠장이 김영식의 일대기이다. 극은 2008년 도청이 철거되는 현장에서 주인공 영식이 도청에서 뛰어내리며 죽었음을 암시하는 데서 시작한다. 시간은 거슬러 영식이 도청에서 일하던 아내 명심을 만나게 되는 1960년으로 올라가 아들 혁이 태어나면서 행복한 가정을 일구며 살아가는 영식 가족의 이야기로 잠시 평화를 맞이한다. 그러다 1980년 성인이 된 혁과 아내 명심이 광주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고, 홀로 남은 영식이 도청 곳곳에 묻어있는 아들 혁이와의 아름다운 추억과 80년 5월 가족이 희생되던 악몽의 시간을 넘나들며 괴로워하는 것으로 극은 마무리된다.

이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모든 공간의 축은 전남도청이다. 5·18 최후 항전지였다는 점에서 전남도청은 늘 아픔과 비극의 공간으로 연출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 영식의 일터이자, 아내 명심을 만나고, 아들 혁이가 태어나 뛰어놀던 놀이터로 평범한 일상의 추억이 하나둘씩 채워지는 공간으로서 전남도청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공연은 1960년부터 2008년까지 광범위한 시간의 축과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 극장 4면의 공간을 모두 활용하였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객석의 비밀과 연출의 힘, 배우들의 동선이 압권이다. 고정된 객석과 달리 사방으로 분할된 4개의 구역으로 객석의 방향을 이동하는데, 관객은 배우들의 힘으로 이동하는 객석에 앉아 극의 시간과 공간의 축을 넘나들며 여행한다.

“보편성, 꼭 광주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람들, 어떤 장소에서도 느낄 수 있는 보편성을 5월 광주 이야기를 통해 확장해 나가고 싶었다.”

- 이상직 배우 인터뷰 중 -

그러나 처음에는 놀라고 신기했던 객석의 이동이 어느 순간 불편해지는데 이는 스토리의 전개와도 맞닿는다. 헬기, 탱크 소리가 울려 퍼지고 쓰러진 배우들 사이에서 객석이 힘겹게 방향을 전환한다. 우스갯소리로 ‘배우들 이제 힘이 빠졌나?’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혹시 ‘이것도 연출인가?’라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1980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방관자, 할 수 없었던 자들의 무기력함을 의미하는 것인지, 희생당한 자들의 억울함을 상징하는 것인지, 또는 현시대를 살아가면서 맞이하는 부조리에 무기력해지는 나 자신을 반성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감정의 소용돌이가 힘겹게 전환하는 객석의 움직임을 통해 ‘이건 나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처음 <시간을 칠하는 사람>이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5·18을 지우려는 행위와 5·18을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충돌하는 이야기'인가 라고 예상했다. 또한, 많은 작품에서 그러했듯이 5·18의 잔혹했던 참상이 많이 드러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작품은 도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다루었고, 그 일상의 행복이 무너진 순간은 잠시 연출된다.

다만,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통해서, 도청이라는 공간의 상징성을 통해서 5·18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이것은 이 공간에서 우리가 살아왔고, 들어왔고, 그 정신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동안 5·18을 다룬 정서적으로 강력하게 표현한 좋은 작품들을 많이 봐왔다.
그러나 이번 공연의 목표는 절대 (말로써 연출로써) 강요가 아니라
공연은 공연으로서 관심을 가지고 밝고 경쾌하게 연출되면서도
5·18을 생각하는 씨앗으로서 역할을 하면 좋겠다.”

- 이상직 배우 인터뷰 중 -

극의 큰 줄기를 담당하는 시간과 공간의 축 외에도 연극의 재미와 이해를 돕는 다양한 장치를 곳곳에 숨겨놓고 있다. 특히, 극 곳곳에 나타나는 세 명의 할머니와 사과가 그것인데, 나중에야 그 할머니가 '생명'을 점지하는 삼신할머니였다는 점을 깨달으면서 극 초반에 세 할머니가 건네주는 풋사과를 받은 명심이 영식과 사과를 나눠 먹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다는 점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또한, 그 연장선에서 헬기 소리 아래 쓰러지는 명심과 희생자들을 대신해서 흩뿌려진 사과들이 '생명'을 은유적으로 비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 본 기자는 '왜 사과일까?' 나만의 생각으로 'apologize(謝過)'가 아닐까? 희생당한 광주시민에게 '사과'하고 있으며,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작품에 대한 나만의 해석을 펼쳐보았다.

2023년 올해 공연은 끝이 났다. 연출가와 배우, 창작진들이 또 어떠한 변주를 통해 5·18을 기억하고, 이야기할지 다음 공연을 기약하며, 연극 <시간을 칠하는 사람>의 감상을 마친다.





by
채지선 (history-2000@hanmail.net)
Photo
디자인아이엠 포토그래퍼 송기호, AC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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