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도 달콤한》

ACCxGB 지역-아시아

# 인간 존엄에 대한 탐구

2022 ACC×GB 지역-아시아 《쓰고도 달콤한 Sweet Sorrow》 에 다녀와서

나를 인지하고,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고, 또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세상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
“인간의 존엄성”이란 그리 어려운 추상적 개념이 아닐 것이다.
나를 소중히 여기는 데서부터 출발하여, 나와 너, 우리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
《쓰고도 달콤한 Sweet Sorrow》 전시를 통해 각자가 생각하는 인간 존엄에 관해 탐구해 보자.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문화창조원 복합전시 6관에 가면 재미있는 포스터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쓰다’-‘달콤하다’ 반대 관계에 있는 두 단어를 전시 타이틀로 삼고 있는 2022 ACC×GB 지역-아시아 《쓰고도 달콤한 Sweet-Sorrow》이다. 한 입 베어진 링 도넛이 포스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데, 우리는 보통 도너츠 하면 ‘달다’가 절로 연상되지 않나? 포스터를 보면서 과연 이 전시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궁금증이 들었다.

2022 ACC×GB 지역-아시아 《쓰고도 달콤한 Sweet-Sorrow》 포스터

《쓰고도 달콤한》 전시에 대한 사전 정보가 아무것도 없을 때 나는 포스터를 보고선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나?’라고 생각했다. ‘땡!’ 도넛 이미지와 ‘쓰고도 달콤한’이라는 텍스트의 함정에 빠져 정답을 너무 쉽게만 찾으려 했다.

그렇다면 《쓰고도 달콤한》 이 전시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전시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잠시 안내서를 들여다보자.

도덕과 윤리의 추상적인 개념 안에서 무감각해진 존엄을 꺼내어 시각언어로 되새김해보는 시도로 예술가의 다양한 관점과 방식에서 인간 존엄을 고찰한다. 예술가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바라보고 하나가 아닌 다양성을 논의하며 실천적 대안을 모색한다. 예술가의 시선으로 씁쓸한 현실의 일면을 마주하고 작품이 지켜내는 달콤한 가치를 함께 들여다보길 바란다.

즉, 도넛, 초콜릿, 포스터 배경 속 우유 혹은 연유로 추측되는 갖가지 달콤함에만 빠져 도넛 단면이 연출하고 있는 사람 얼굴 형상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것처럼 본 전시가 말하고 있는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 무뎌진 나에 대한 성찰,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틀렸다고 하는 태도에 대한 반성, 또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취해야 하는 마음가짐’ 등에 대한 ’제대로 마주하기‘를 논하고 있다.

작품과 ’제대로 마주하기‘는 전시를 감상하는 내내 이루어졌다. 얼마나 무지의 실수를 반복하며, 반성과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는지 지금부터 작품 속 이야기를 함께 들여다보자!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거리예술가 다보츠 作,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다보츠 作,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이 작품을 보고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드나? 사전 정보 없이 작품을 마주하였을 때 나는 얼핏 화려한 미러볼 조명 같기도 하고, 사람의 ’재미있는, 익살스러운, 짓궂은 혹은 음흉한‘과 표정을 떠올렸다.

과연 맞는지 이제 작가의 이야기를 마주해보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살고 있다는 작가는 혼잡한 대도시 속에서 복잡한 사회와 가난, 비체계적인 사회제도 속에서 먹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생존을 인간이 아닌 괴물의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괴물처럼 되어야 한다.” 즉, 작가는 치열한 삶의 생존을 위해 탑재할 수밖에 없는 내 안의 괴물을 이 작품에서 위와 같은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우리 안의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다. 나 또한 내 가족, 친구, 동료 그리고 처음 만난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을 제각각 대한다. 때로는 사랑스럽게, 친절하게, 냉정하게 등 상황에 따라 나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타인 앞에 마주한다.

다른 모습으로 누군가를 속이는 것이 아닌 이상 내 안의 괴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터. 작가가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 또한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니, 의식이건 무의식이건 내가 드러내는 모습 모두가 나! 라고 하는 나의 다양성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다음으로 만날 작품은 전나환 作, <The Q> 연작과 <퀴어론>

전나환 作, <The Q>

처음 작품을 마주했을 때 나는 작품 속 다양한 사람들, 즉 성별, 키, 생김새 각기 다른 모두가 한곳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에서 저 캔버스 너머의 무언가가 일출일지 일몰일지, 혹은 신호등일지 모를 그냥 평범한 일상, 현실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이제 작가의 이야기를 마주해보자.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보여준 <The Q>(2018~19)와 <퀴어론>(2019)은 6개월에 걸친 퀴어/비퀴어 당사자와의 내밀한 인터뷰와 사진 기록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모두 한곳을 바라보며 행진하는 인물들로 재현된 <The Q>, 그리고 작가가 인터뷰 대상자에게 질문한 ‘퀴어 커뮤니티와 퀴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발췌한 <퀴어론>을 통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루는 너와 나 우리의 다양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마주하게 한다.

그래서 다시 한번 작품의 설명을 듣고 나는 이 작품에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내 생각을 마주보기 해보았다. 이 작품은 같은 하늘 아래, 땅 위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나와 다르지 않은 너와 우리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종종 다른 것을 틀렸다고 하며, 너도나도 당연한 것을 받아들여라! 포용해라! 인정하라!고 무슨 관용을 베풀 듯이 이야기한다.

인간의 존엄이란 주제 앞에서 분명 잘못된 태도일 것. 그동안의 나는 어떠했는지 돌이켜 보며, 또한 독자 여러분에게 <퀴어론>에서 인터뷰 대상자들이 말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주의 깊게 들여다봐 주기를 권하면서 이 작품의 감상을 마치고자 한다.

세 번째로 만나볼 작품은 설치 미술가 민성홍 作, <스킨_레이어> 연작과 <예민성을 위한 연습>, <적응태도 위장망>

민성홍 作, <스킨_레이어>

이 작품은 작가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기 전까지 작품이 형상하고 의미하는 바를 추측하기 가장 어려웠다. 즉 옷걸이, 가구 다리, 카페트, 비닐 등 소재도, 재질도, 형태도 제각각인 재료들이 모여 새로운 형체로 형상화된 작품 앞에서 '넌 누구?'를 반문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작가 인터뷰와 큐레이터의 설명을 듣고 다시 작품을 보고, 또다시 들여다보고 나서야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인간의 존엄’이 무엇인지가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분에게도 도움을 주고자 민성홍 작가의 말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창작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존엄이라는 개념 자체는 제 작업에 있어서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나 시점에 대한 이야기가 우선일 것 같다. 우리가 어떤 상황이나 제도에 의해서
그 틀 안에서 보여주는, 규정되는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정의나 의의가 아니라
그 스스로가 가질 수 있는 주체적인 부분, 개별성 그리고 그 고유성이 드러나게 해주는 것들이
제가 창작자로서 할 수 있는 존엄에 대한 해석이기도 하다.”

- ACC 제공 영상 속 작가 인터뷰 -

작가는 남겨진 사물들을 수집, 변형, 재조합하는 과정을 통해서 또 다른 형상을 만들어 낸 것처럼 ‘의자’라는 완성된 형태만이 나의 자아를 드러내는 게 아니라 ‘부러진 의자 다리 한쪽’과 같은 개별 요소 하나하나에도 각각의 정체성이 있고, 쓰임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본래의 정체성이 상황과 쓰임에 따라 또 다른 정체성으로 바뀔 수 있음을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 또한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 가는 나의 정체성, 우리의 정체성을 생각하게끔 한다. 즉, 나의 부족한 점 때문에 ‘나는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이야’가 아니라 너와 만나 우리를 이루어 나와 네가 가진 각자의 장점을 더하고, 단점을 보완하면서 함께 더불어 가는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 이러한 우리 삶의 모습을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게 아니었나 나만의 해석을 덧붙여본다.

네 번째 작품은 캄보디아 퍼포먼서 스베이 사레스 作, <왕좌의 날개>와 <해바라기 너머로>이다. 여러분은 ‘날개’하면 떠오르는 것은? ‘해바라기’를 보면 떠오르는 생각은? 다음 작품을 같이 감상해보자.

스베이 사레스 作, <왕좌의 날개>

멀리서 이 작품을 마주하였을 때 떠오른 건 ‘하트 ♡’였다. 지극히 직관적인 해석이긴 하나, 작품과 거리 두기 한 상태에서 작품의 ‘날개’라는 단어와 ‘하트’ 형상의 모습을 보고 ‘천사’, ‘희망’, ‘사랑’과 같은 긍정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 또한 작품과 작가의 의도 및 이 전시의 주제와 제대로 된 마주보기가 안되어서 생긴 오류이자 해석의 차이였는데, 이제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작가는 1960년대 후반 캄보디아 내전 시기에 태어나,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 성장한 경험을 바탕으로 정치적 탄압 속에서 겪은 자기의 경험을 작품 속에 투영하고 있다. <왕좌의 날개> 작품 속 ‘날개’의 의미는 애초에 내가 생각했던 의미와 전혀 상반된 어두운 일면을 담고 있었다. 즉, 날개를 수식하는 ‘왕좌’라는 단어에서 ‘권력’, ‘힘’을 떠올리듯이 작품 속 날개가 갖는 내면의 목소리는 ‘사랑’이 아니었다.

여기에 또 다른 특별한 전시가 있다. <해바라기 너머로>라고 하는 작가의 퍼포먼스를 담은 단채널 비디오 작품으로 이 작품 또한 작품에 대한, 그리고 작가 삶에 대한, 그리고 작가가 태어나고 자란 캄보디아의 배경지식이 없다면 작가가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 바를 제대로 의미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

앙코르 와트라는 공간에서 해바라기 마스크를 쓰고, 트로(크메르 전통 현악기)를 연주하는 작가의 모습은 같은 공간 내 다른 사람들에게 시끄러운 소음이자 불편함과 불쾌함을 초래하는 행위로 비칠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관광지인 앙코르 와트와 캄보디아에서 벌어지는 현대 식민주의 형태의 대외관계를 상징하는 ‘해바라기’가 캄보디아의 정치 사회적 상황 속 또 다른 의미를 함축하여 세상 밖에 표출하고 있다.

다섯 번째로 만나볼 작가와 작품은 베트남의 쩐 루엉 作, <럽 로애>로, 전시장 가장 안쪽 암막 커튼을 젖히고 들어가면 두 개의 큰 스크린 속에서 빨간 스카프가 휘날리고 있는 영상을 마주하게 된다.

쩐 루엉 作, <럽 로애>

빨간 스카프는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라고 하는 노랫말 가사를 떠올리게 하면서 우리나라 공군을 떠오르게도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빨간 스카프, 빨간색은 북한, 중국, 쿠바(체게바라)와 같은 공산 사회주의 국가(인물)를 떠올리게 만든다.

영상을 보면 빨간 스카프가 홀로 펄럭이는 모습도 나오지만, 한편 펄럭이는 스카프가 내 몸을 때리는 듯한 퍼포먼스가 나오기도 하는데, 이 영상을 접했을 때 ‘빨간색-신체’에 의미를 두고, ‘체제가 나를 구속하고, 통제하고, 상처 주는 상황의 연출인가?’라는 생각을 얼핏 해보았다.

이 작품에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내 생각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 작품의 설명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전시 출품작 <럽 로애>는 작가가 2007년부터 시작한 퍼포먼스 작품 <Welts>에 기반한 3채널 비디오 설치 작품으로 여러 국가의 식민지였고 분단과 전쟁을 겪은 베트남의 역사와 1960-70년대 베트남 전쟁과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을 겪고 자란 작가의 경험을 영상 속에 투영한다.

특히, 작가는 이념이 낳은 세뇌와 탄압의 상처들을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빨간 스카프와 신체의 상처로 함축하여 행위예술 영상으로 나타낸다. 이 작품 속 작가가 말하는 인간의 존엄은 개인의 표현을 억압하는 사회, 정치적 유산과 정책에 저항하는 나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네 번째 스베이 사레스 作, <왕좌의 날개>와 <해바라기 너머로> 다섯 번째 쩐 루엉 作, <럽로에> 두 작품 모두 작가가 말하는 인간의 존엄과 제대로 된 마주보기를 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걸어온 삶에 대한 이해와 베트남-캄보디아 역사적 경험에 대한 배경지식을 먼저 알아보고 작품을 대하기를 권하는 바다.

마지막으로 땅으로부터 전하는 우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매리 作, <지층의 시간>

이매리 作, <지층의 시간>

이매리 작가는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위의 다섯 작가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맨몸으로 작품과 마주하였을 때 난 ‘지층’이라는 단어와 두개골과 발굴터의 이미지를 통해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기록한 것인가?’라고 단순하게만 유추하였더랬다.

작가의 이야기를 제대로 마주보기 위해 브로슈어 속 작품 설명을 읽어보고, 다시금 작품을 마주하였을 때, 그때 눈에 보이는 것은 캔버스 위에 그려진 영단어 ‘and’였다. ‘아! 땅 위의 시간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처럼,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돌아갈 것인지, 나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나의 역사에 대해 자각하는 타임이라고나 할까!

작가는 인류 존재의 근원을 ’땅’에서 찾는다. 땅은 인류 이전에 존재했던 것들부터 인류가 탄생하고 문명의 발생과 더불어 국가와 민족, 제국들의 흥망성쇠에 관한 대서사를 켜켜이 품고 있는 지층의 시간이다. 땅은 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한다. 땅은 인류사(人類史)의 모든 기억을 담고 있는 저장고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의 인간 실체도 존재하지 않으며, 지속적으로 인간의 역사와 평행하는 땅의 역사를 추적하며 인간 존재와 실존에 몰입하고 있다.

금, 은, 석탄, 흑연 등 자연으로부터 나온 물질을 재료로 활용하는 것 또한, 인류의 역사, 나의 역사, 태초 본연의 나의 뿌리를 탐구하는 시간을 표출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현장에서 작가를 만나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이야기를 직접 이야기를 들어볼 기회가 생겼는데, 작품에 투영하고 있는 인간 존엄, 인간 본질에 대한 가치 탐구와 이를 시각화하는 방식에 대한 작가의 열정과 애정을 온몸으로 흡수할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참여 작가 6인의 개인적 경험에서 시작해 이데올로기, 난민, 성소수자, 빈부 격차, 인간 실존, 소외계층을 발생시키는 사회시스템의 성찰을 통해 주변으로 시선을 확장하여 인류 보편의 가치를 제시하고자 한다.”

나는 인간의 존엄이란 어려운 개념이 아니라고 본다. “나의 본질을 탐구하고, 나를 제대로 들여다볼 줄 알고,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고, 또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내가 해야 하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에 대한 탐구일 것!

현대 미술로 인간 존엄성을 묻는 《쓰고도 달콤한》 전시는 바쁜 일상에 무뎌져 가는 나를 다시금 제대로 마주할 수 있도록, 나에게 ‘나와 너, 우리’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끊임없이 나에게 말을 전달하고 있다.

전시 관람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전당을 오가며, 바쁜 와중에 우연히라도 《쓰고도 달콤한》 전시 포스터를 발견하게 되거든 한입 베어 문 링 도넛 단면에 마주 보고 있는 두 인간의 모습 속에서 ‘나의 외면과 나의 내면’을 마주하고, ‘나와 다른 너’와 마주하고, 그리고 도넛으로 ‘이어진 우리’를 마주해보라!

인간의 존엄이란 나를 인지하는 데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나를 생각하는 시간을 본 전시와 함께 가져 보기를...

《쓰고도 달콤한》 전시는 11월 27일까지 계속 진행되며, 전시장 입구에 도슨트의 전시해설과 함께 작품을 관람할 수 있으니,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으신 분은 도슨트의 전시해설을 이용해보시는 것을 추천한다.

  • 전시 기간

    2022.8.25(목) ~ 11.27(일)

  • 전시 장소

    문화창조원 복합6관

  • 참여 작가

    다보츠 Darbotz, 민성홍 SungHong Min, 스베이 사레스 Svay Sareth, 이매리 Maelee Lee, 전나환 Jeon Nahwan, 쩐 루엉 Tran Luong





by 채지선
history-2000@hanmail.net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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