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등 아이들

2022 ACC 창제작공연 쇼케이스

‘수박등’은 광주 월산동에 있는 지명으로, 수박을 엎어 놓은 것으로 보이는 형상에서 그렇게 불려 왔다. ‘월산동 수박등’을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보니, 온통 재개발에 관한 글들뿐이다. 이렇게 광주에서 ‘수박등’은 서서히 잊힐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공연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 듯 보인다. 이 작품은 지난 2018년 ‘제1회 ACC 스토리 공모전 최우수상’을 받은 ‘수박등아이들’(원안 조홍준) 원작을 각색하여 공연화한 것으로 공연 제작을 시작할 때부터 많은 기대를 받았다.

# 과거와 미래의 ‘수박등 이야기’

원작 ‘수박등 아이들’은 40여 년 전인 1980년 5월, 광주 ‘수박등’에서 있었던 일을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한 작품이다. 그 당시 어린아이의 시각에는 그저 수박등에서 놀지 못해서 아쉬웠던 기억이었지만, 나중에 커서 은폐되었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그때의 시각과 사뭇 다른 퍼즐이 맞춰졌을 것이다. 그 당시 어린아이였던 이들이 이제 40~50대가 되었다.

이번 ‘수박등 아이들’ 공연에서는 그때의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을 법한 40년 후의 이야기로 소환한다. 우리는 이제 무엇과 맞서게 될 것인가? 지금 광주가, 더 나아가 인류가 마주하는 문제들은 무엇일까? 오월 정신은 이제 동시대 우리가 마주한 문제들과 중첩된다.

공연장에 처음 들어가니 의자로만 구성된 감각적인 무대가 돋보였다.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40년 후 ‘시스템’이라고 불리는 어떤 권력의 지배를 받는 미래의 어느 날이다. 홍준, 연지, 익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세 명의 평범한 아이들은 시스템에 의해 자유의지를 억압받는다.

특정한 사고와 감정을 금지당하고, 특정한 언어도 금지당하는 통제된 세계에서 우리는 언젠가 있었고, 언젠가 있을 법한 이야기임을 본다. 공연에서 현재 우리는 40년 전 과거와 40년 후 미래를 함께 보게 되는 것이다.

2022 <수박등 아이들> 쇼케이스

# 오월 정신은 계속된다.

과거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아이들에게 ‘시스템’은 계속 경고하고, 재사회화 프로그램을 통해 홍준의 기억을 또 한 번 지워버리려고 시도한다. 홍준은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연지는 기억을 지운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억을 지운다는 건, 너의 정체성, 너의 역사를 지우는 일이야”

아이들은 결국 시스템을 탈출하여 금기의 구역 ‘수박등’으로 간다. 미래의 그들에게 ‘수박등’은 온갖 독성물질과 폐기물로 인해 출입이 금지된 지역이었지만, 위험을 무릎쓰고 간 그곳에서 이들은 희망을 발견한다.

2022 <수박등 아이들> 쇼케이스

그곳은 알려진 것처럼 독성물질과 폐기물이 덮인 곳이 아니라, 생태계가 살아있는 지구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권력과 잘못된 신념을 깨부수고 은폐되었던 진실에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인공의 것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것들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5·18 그날의 기억을 가진 사이보그 ‘상목’을 만난다. 100년 동안 수박등을 지키며 ‘시스템’과 싸워온 상목은 끈질긴 시스템의 추적과 안드로이드들과의 교전을 앞두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한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억압과 항쟁은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고,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영원히 존재할 거야.”

상목은 세 친구를 위해 안식처의 입구를 봉쇄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외치며 홀로 최후의 싸움을 시작한다.

2022 <수박등 아이들> 쇼케이스

이번 ‘수박등 아이들’ 공연은 ‘수박등’이라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과거의 이야기이자 미래의 이야기를 통해, ‘오월 정신의 현대적 재해석’을 시도한다. 어쩌면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이야기이다.

미래의 우리는 이제 무엇과 싸우게 될까? 거대 시스템으로 감시당하는 사회, 인간과 기계의 대립, 환경문제 등 동시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류의 고민을 40년 전 그날에 비춰보고 가까운 미래를 상상해보는 시간이었다.

우리 광주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을 발굴하여, 광주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로, ACC만의 새로운 콘텐츠를 창작한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이번 쇼케이스를 통해 관객과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고 완성도를 높여, 2023년에는 본 공연으로 다시 선보일 예정이다. ‘수박등 아이들’ 본 공연이 어떻게 보완되어 완성될지 기대된다.

2022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 포스터

ACC에서 기대되는 다음 공연은 2022년 10월 20일에서 23일까지 상연되는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이다. 이 작품 역시 2020 제2회 ACC 스토리 공모사업 ‘우수상’ 수상작 ‘여행’(원안 변영후)을 기반으로 하여, 2020 ACC 희곡 개발 사업으로 각색한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각색 정진새)을 공연화한 작품이다.

2022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 공연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국립극단’이 공동 제작한 이 작품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반대로 횡단하는 네임리스 원 ‘그’의 이야기와 이를 위성으로 감시하고 추적하는 기상청 소속 연구원 AA와 BB,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게임 유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가 왜 시베리아 극한의 환경을 뚫고 계속 걷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온라인 순례길의 수많은 유저가 가상현실을 통해 ‘거꾸로 걷는 순례’에 동참하게 된다. 이들과 함께 머나먼 여정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by 소나영
nayeongso@daum.net
사진
ACC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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