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두 야 간다, 「용아생가」
시인 용아 박용철과 그의 생가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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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가수 김수철이 불렀던 ‘나도야 간다’라는 노래의 후렴구는 누구나 들으면 ‘아~!’ 하고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기타를 매고 폴짝폴짝 뛰던 가수도 생각나고 영화 고래사냥의 ost이기도 했던 노래는 ‘나도야 간다/ 나도야 간다/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 수 있나’ 라고 용아 박용철의 시 「떠나가는 배」를 인용하여 곡을 붙인 노래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 한국 서정시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박용철은 1930년 3월 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와 「밤기차를 그대에게 보내고」, 「싸늘한 이마」, 「비내리는 날」 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의 시작을 알렸고 여러 잡지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지만 1938년 이른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 중앙초교 정류장에서 도보로 2분을 걸으면 현대적인 주택들 사이로 흔치 않는 돌담이 보인다. 그 돌담을 따라가면 솔머리 마을에 자리 잡은 아담한 초가 한 채를 만날 수 있다. 박용철이 태어나 자란 생가로 그의 호인 용아[龍兒]를 따라 「용아생가」라고 불리는 집이다. 볕은 좋지만 바람은 조금 쌀쌀했던 날씨마저 서정적인 그런 날, 회색빛으로 바랜 이엉을 올린 초가에 들어서자 창호지 바른 문을 열고 나오신 김민승 문화해설사를 만날 수 있었다.
싸늘한 이마
행랑채가 있는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고즈넉하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대문만 넘었을 뿐인데 마치 타임 슬립을 한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공간에 선 기분이 드는 것은 담 너머로 보이는 고층 아파트와 빌라들 때문일 것이다. 앞에는 시간을 뛰어넘은 듯한 초가를 두고 등 뒤는 너무나 도시적인 풍경 사이 그 괴리감에 헤매다 대문간 감나무에 시선이 머물기도 했다. 대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것이 사랑채, 뒤로 안채, 서재, 사당이 있고 대나무 숲과 양옆으로 돌담으로 둘러싸인 소담한 집은 들어서면서부터 이상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송정리는 충주 박씨의 집성촌으로 그들의 땅을 밟지 않으면 송정리를 지나다닐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박용철은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천석꾼, 만석꾼의 집이라면 하동 최참판댁 같은 으리으리한 기와집이어야 하지 않을까. 용아 선생의 집이 이렇게 아담한 초가라는 것은 상당히 의아한 일이었다. 옛날 초가인 이 집을 용아의 아버지가 기와를 얹혀 개량하려고 하자 ‘시골집은 초가라야 어울립니다. 가을에 이엉을 올려놓은 후 은은한 달빛이 비추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노랗게 빛나는 색깔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라며 용아 선생께서 말렸다고 한다. 서정시인다운 말이다. 10월 중순 방문했을 때는 아직 새 이엉을 올리기 전이라 초가의 지붕이 꺼진 곳도 있고 회색으로 바란 색이었지만 그 모습 자체로 특별했다.
용아생가 / 김민승 문화해설사
“벼를 베고 새 볏짚이 나면 이엉을 올립니다. 11월에는 새로 올린 말끔한 지붕을 보실 수 있을 텐데 조금 빨리 오셨어요. 풍수를 공부하시는 분들도 많이 방문하시는데 이 집이 솥뚜껑의 머리 부분인 ‘정두’에 위치한 명당이라고 합니다. ‘솥’머리를 닮은 곳이라고 이 주변을 솔머리 마을이라고 하죠. 용아 선생님의 조부께서 19세기 말에 지으신 집으로 170년 정도 되었고 개인 집으로는 사당까지 있는 것이 특이하죠.”
사랑채는 방과 마루, 불을 지피는 간이 부엌과 창고가 있었다. 사람이 살지는 않고 구청에서 위임받아 관리를 하는데 사랑채를 오픈해서 문화해설사가 머물 때 쉬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생가는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시멘트 기와와 슬레이트로 개조된 집을 1995년 문화재 복원 사업으로 다시 초가로 복원했다고 한다. 살짝 들여다본 창고에는 플라스틱 의자가 쌓여있어 용도를 물었더니 넓은 마당에서 음악회나 문화사업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할 때 쓰이는 것이라고 하셨다. 사랑채 왼쪽으로는 멋들어진 소나무가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사랑채를 지나 더 안으로 들어가면 장독대를 지나 내밀한 안채가 나온다. 사랑채보다는 더 따뜻한 분위기고 더 오밀조밀하게 짜여진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안채 툇마루에 앉아서 보면 사랑채 지붕이 정원 뒤로 보이지만 막혀 있어 답답하다는 것보다 아늑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하염없는 바람의 노래
용아생가 / 김민승 문화해설사
“봄이 되면 자목련부터 피기 시작해서 동백, 생강나무 등 철따라 계속 꽃이 피고 지길 반복합니다. 5년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 두 분이 사시면서 깔끔하게 너무 관리를 잘 해주셨지만 한 분이 먼저 가시고 또 한 분이 치매가 오셔서 지금 요양원에 계십니다. 그분들이 심어 가꾸던 꽃들도 여기저기서 꽃을 피웁니다. 담 아래 봉숭아, 어성초와 더불어 정원에 로즈마리, 장미도 있고요. 역시 가장 보기 좋은 때를 꼽으라면 철쭉이 한창인 5월이라고 할 수 있죠.”
하필 방문을 했던 때가 정말 꽃 하나도 볼 수 없는 시기였다. 맥문동과 상사화가 얼마 전 졌고 꽃이 피면 멀리서도 그 향이 진동한다는 은목서는 아직 피기 전이라고 하셨다. 꽃을 좋아하는 필자지만 철모르고 피어난 개나리 몇 송이만이 보여서 너무 아쉬웠다. 맑게 푸르른 하늘, 따가울 정도로 좋은 볕, 어딜 봐도 녹색으로 푸르기만 한 정원을 보았지만 너무나 조용하고 맑은 분위기 탓일까? 피어있는 꽃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살랑거리며 스쳐 가는 바람이 위로해 주었다. 안채 왼편에 자리 잡은 「떠나가는 배」 시비를 보고 뒤로 돌아가면 사당이 있다. 문에 창호지를 바르지 않고 유리를 끼운 사당은 한참 후에 지어진 건물처럼 보인다고 하셨고 안채와 사당 사이 한 칸짜리 작은 건물이 있는데 서재로 쓰인 곳이라고 했다. 문이 잠겨 창살 사이로 들여다본 서재는 그냥 마루 바닥이 있는 창고 같은 곳이었다. 책장을 들여 책을 정리하고 책상 하나 가져다 놓으면 주위가 조용해 집중하기는 좋은 곳이었을까. 어쩌면 천재라는 용아 선생이 공부했을지도 모를 곳이라는 생각으로 한참을 들여다봤다.
이대로 가랴마는
용아생가 / 김민승 문화해설사
“용아 선생님은 어려서부터 병약하셨다고 해요.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고 학교 다닐 때도 일하는 사람이 업어서 등하교를 시켰다고 합니다. 활동사진을 보면 그대로 외워 와서 가족들에게 전해줄 정도로 머리가 좋았고 주산도 능하셔서 수학을 굉장히 잘하셨다고 합니다. 동경 유학 때 청산학원에 조선에서 유학 온 수학을 잘하는 사람이 1등을 했다고 소문이 나서 궁금해 그를 찾아간 김영랑과 친해졌다는 일화도 있어요. 어려운 친구나 후배들 학비도 대주고 이하윤, 정지용, 김영랑 등의 시집을 자비로 내주는 등 친구들을 도운 일도 잦았다고 해요. 슬하에 형제 셋을 두고 1930년에서 1938년까지 9년간 활발한 활동을 하시고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시게 됩니다. 위장병으로 금강산 요양을 가시기도 했지만 몸도 워낙 약하셨고 일에 너무 매진해 기력을 다 쓰신 것이 아닐까 싶어요. 용아 선생님의 장남이신 박용달 씨가 결핵의 권위자가 되신 것도 아버지 때문이겠지요.”
결핵은 가난한 문인들이 앓던 병이라고 알고 있던 터라 부자였고 능력도 있던 그가 병에 걸렸음에도 쉬면서 치료를 하지 못하고 왜 일찍 죽었는지 모를 일이다. 9년이라는 짧은 기간 그의 모든 기를 태워서 작품을 썼던 탓일까? 시를 쓰고 ‘시문학’ 잡지를 발간하고 비평, 셰익스피어 희곡, 괴테의 시를 번역하여 알린 번역가로도 활동을 하면서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는 살아생전 개인 작품집을 내지 못했는데 그 이유 때문인지 같은 시대 활동한 다른 시인들에 비해 그가 덜 알려진 것이 아쉽다.
망각 忘却
처음 좁다고 생각했던 초가는 한 바퀴 다 돌아보고 나자 아담하지만 결코 작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주변에 다른 초가들이 있었을 당시를 상상하면 넓으면서도 홀로 튀지 않게 잘 어울리는 부농의 집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툇마루에 앉아 바람을 맞으니 어릴 적 시골 할머니 집 굴뚝에 연기가 오르던 그때가 떠오르며 필자마저 서정적이게 만드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용아 선생이 서정적인 시를 쓴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 여겨진다. 집을 나가 뒤로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송호영당」이라는 눌재 박상과 사암 박순의 영정이 모셔진 영당이 있다. 정조가 힘차고 아름다워서 제일가는 시라고 칭찬을 했던 눌재는 1200편의 한시를 남겼고 사암집을 남긴 사암 박순 역시 문학에 재능이 뛰어났다. 그들의 직계 자손인 박용철 역시 그들의 피를 이어받았음이 분명하다. 새 이엉을 얹고 쏟아지는 달빛이 노랗게 부서질 지붕, 그 위에 눈이 쌓인 모습을 조금 이르게 상상해 본다. 툇마루에 앉아 가을 햇빛을 쬐며 몇 마디 정담을 나누었는데 두 시간은 금세 지나가고 없었다.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시간이 멈춘 듯, 혹은 그 흐름조차 의식하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 다른 시간대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용아생가 / 김민승 문화해설사
“몇 년 전만 해도 이 주변으로 예쁜 돌담으로 만들어진 골목이 많이 있었어요. 오피스텔 같은 새 건물이 들어서면서 다 사라지고 여기만 남았죠. 담 옆으로도 헛간과 집이 있었지만 도로가 날 예정이라 헐어 냈어요. 시문학파의 시작은 용아 선생님이지만 영랑생가와 더불어 시문학파기념관은 강진에 세워져 있어요. 작은 바람이 있다면 시문학파에서 현대문학이 시작되었으니 이곳에 현대문학관이 들어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 용아 선생님 전시관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시인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문학촌 같은 것도 생기면 좋겠지요. 하지만 문화사업을 하기엔 문제도 많고 문화재가 있는 마을 사람들은 별로 행복하지 않아요. 건물 층수 높이 제한이나 주차문제도 심각해지는 등 불편이 늘어나고 본인들의 이익이 없다고 생각하는 주민들이 얼마나 잘 참여하고 도와주실지도 모르겠어요.”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마당 한 켠 서 있는 동백나무에 세 번째 꽃이 피었으니 보라고 문화해설사께서 나를 불러 세우셨다. 봄에 한번 붉은 꽃이 피고, 떨어진 꽃은 바닥에 흩뿌려져 땅에서 다시 한번 피어나고, 이즈음 씨를 떨구고 난 빈 깍지가 벌어져 마치 나무에 세 번째 꽃이 핀 것 같다고 알려 주시는 해설사 선생님의 감성도 남다르셨다. 예전 어르신들이 머리에 바르시던 동백기름을 짰다던 그 씨앗을 싹을 틔워볼 생각으로 몇 개 주워 담았다. 여러 명의 문화해설사께서 돌아가면서 용아생가에 머무르시니 방문하면 설명을 꼭 들어보셨으면 좋겠다. 동절기 12월에서 2월까지 너무 추울 때는 생가에 계실 수 없다고 하시니 광산구 관광육성과에 방문 전에 미리 문의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려 나서는 길에 해가 잘 드는 툇마루 아래 길게 누운 길고양이를 보았다. 관광객이 다 떠난 밤이 되면 오롯이 이곳의 주인이 될 고양이는 너무도 도도해 떠나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한껏 기지개를 켜며 돌아눕는 여유로운 고양이가 시시각각 변하는 이곳의 경치를 항상 지켜보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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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옥수 mono755@daum.net
사진. 황인호 photoneverdie@naver.com
202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