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지는 소리, 보이는 향기, 듣는 빛의 향연

「감각정원: 밤이 내리면, 빛이 오르고」 전시 리뷰

이슈&뷰


밤이 내린 후의 도시풍경은 번쩍거리는 네온사인과 시끌벅적한 소음 대신 고요한 유령도시로 변화했다. 시국에 발맞춘 비대면 서비스와 오락 거리가 우후죽순 생겨났음에도 집콕 생활로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은 여전하다. 문득 어디라도 나가 걷고 싶은 그런 날, 기분 좋은 밤을 선사할 특별한 산책로를 소개한다. 현재 ACC에서는 야외 면적 중 4,000제곱미터 규모의 미디어아트 전시 「감각정원」이 펼쳐지고 있다. ‘흐름(flow)’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는 8인의 국내 예술가가 참여해 어두웠던 건물 외벽과 정원에 색색의 빛을 드리우고 있다.



오도함, 「당신의 피부가 듣는다」, 2021
오도함, 「당신의 피부가 듣는다」, 2021

먼저 전시가 시작되는 하늘정원 입구로 가면 오도함 작가의 「당신의 피부가 듣는다」 설치작품을 체험할 수 있다. 운영 본부에서 조금 떨어진 잔디밭 중앙에 보이는 작품의 모습은 마치 너른 평원에 불시착한 소형 우주선을 연상시킨다. 예약 시간에 맞춰 가면 관람자의 스마트폰 블루투스 기능을 통해 작품 음향장비에 연결하도록 안내받을 수 있다. 오로지 1인을 위해 주어지는 10여 분의 시간 동안 관객은 불투명하고 폭신한 거대 튜브 우주선에 올라앉아 직접 선곡한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작품이 주는 특별함은 바로 청각 컨텐츠인 음악으로부터 발생한 파동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작가가 우연히 알게 된 청각 장애인 음악 팬의 음악감상법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인데, 핸드폰 스피커를 켜고 침대 매트리스 아래 고정시키면 표면으로 흘러오는 진동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비로소 온몸을 누일 수 있는 튜브 위에 올라 자연스럽게 닿는 피부로 음악을 전달하는 작품으로 재탄생되었다.
필자는 올여름 바닷가에서 즐겨 들었던 음악 「Neil Young-Harvest Moon」을 재생했다. 이는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에서 정적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두 주인공이 이어폰을 나눠 끼고 들으며 소리없는 춤을 추었던 곡인데, 작품 공간 안팎으로 청각과 촉각을 짜릿하게 자극하며 울려 퍼지는 순간,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황홀경을 느꼈다. 단독으로 체험하는 작품이지만 꽤나 큰 볼륨으로 재생되는 음악 덕에 실은 나의 최애곡에 담긴 취향을 먼 반경까지 흘려보낸다는 사실도 매력적이다. 평상시 이어폰이나 일반 스피커를 통해 음악을 들을 때는 느껴 보기 힘든 촉각적 자극과 불투명한 소재 바깥으로 보이는 탁 트인 정원과 하늘의 밤 풍경이 시각적 재미까지 더하는 이 작품을 나만의 선곡과 함께 체험해 보기를 추천한다.



고기영, 「에메랄드 빛의 숲」, 2021
고기영, 「에메랄드 빛의 숲」, 2021

오도함의 작품을 체험한 후 본격적으로 ACC 건물 외벽을 돌아가는 길, 어두웠던 길목이 아른거리는 푸른 빛으로 물들어 있다. 바로 고기영 작가의 「에메랄드 빛의 숲」 작품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외벽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무미건조했던 건물의 벽면부터 냉각타워, 낮이 되어야 존재감을 볼 수 있었던 작은 배롱나무 숲까지, 만연한 초록의 빛과 찬란하지만 자연물 본연의 모습을 감추지 않을 정도의 절제된 오색의 빛들이 가득하다. 마치 영화 「아바타」에 등장하는 신비로운 숲의 한가운데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들려오는 곤충들의 울음소리는 이 작은 숲이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을 한껏 더한다. 절로 탄성을 자아내는 이 광경은 「감각정원」 전시공간의 심장부인 냉각타워부터 작품이 설치된 곳곳으로 퍼져 나가며 전반적인 공간의 조화로움을 이끌어내고 있다.



고기영, 「에메랄드 빛의 숲」, 2021
고기영, 「에메랄드 빛의 숲」, 2021

이번 전시 중 단연 이목을 끌었던 작품은 소방도로가 시작되는 5번 게이트 부근에 설치된 미디어 파사드 작품이 아닐까. 이는 미디어(media)와 건물의 외벽을 뜻하는 파사드(facade)가 합성된 용어로 말 그대로 건물 외벽을 스크린처럼 활용한 미디어 아트 작품을 칭한다. 요즘은 각종 야간 명소나 페스티벌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시방식이기도 하다. ACC는 지난 2020년에도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프로젝트의 일환이었던 「야광(夜光)전당」 전시를 통해 외부 공간을 활용한 미디어 아트 작품들을 선보인 적이 있다. 이런 야외 전시의 장점을 꼽자면 날씨, 자연물 등의 주변 환경과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실내보다 자유로운 감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용세라, 「흘러가는 말」, 2021
용세라, 「흘러가는 말」, 2021

이곳에서는 권혜원, 문창환, 용세라, 최성록 총 4명의 작가의 작품을 순차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영상은 건물 외벽뿐만 아니라 길고 완만한 경사의 소방도로를 타고 내려오며 마치 거대 이미지 속 관객을 품을 듯한 압도감을 뿜어낸다. 마침 작품의 시작점이자 메인 스크린인 건물 외벽 앞에 도착했을 때 전시 포스터에 실린 시그니처 디자인을 중심으로 제작된 용세라 작가의 「흘러가는 말」이 상영되고 있었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듯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자연을 표현한 이 작품은 화려한 색채의 그래픽 이미지가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흐르며 쾌활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SNS에서 대중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짤막한 시로 인기를 얻고 있는 하상욱 시인의 재치 있는 시가 보는 재미를 더한다.

이처럼 뜻밖의 조화로 신선함을 주는 것은 비단 용세라의 작품뿐만이 아니다. 자연의 경관을 집안으로 빌려오는 ‘차경(借景)’의 개념에 관심을 둔 권혜원 작가의 「풍경을 빌리는 방법」은 카메라로 포착해 낸 먼 곳의 이미지를 관람자의 눈앞에 다시 펼쳐 놓는다. 작가는 전시공간 안팎으로 유일하게 부족하게 느껴졌던 물의 풍경을 작품의 매개로 빌려 오기 위해 무등산으로부터 도심을 따라 영산강까지 흐르고 있는 광주천의 현재 모습과 옛 문헌 속 이미지를 영상에 담았다. 이 밖에도 자신의 사주팔자에 담긴 나무, 불, 흙, 쇠, 물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인간이 무심코 소비하는 자연의 모습을 담은 문창환 작가의 자전적 메타버스 「더 나은 세계」, 설화 속 창조신화에 등장할 법한 애니메이션 이미지로 구성된 가상공간의 풍경을 통해 디지털 시대 현대인들의 감각을 자극하는 최성록 작가의 「시작의 계곡」을 감상할 수 있다.



신미경, 「香水(향수)와 鄕愁(향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021
신미경, 「香水(향수)와 鄕愁(향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021

‘흐름’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이번 전시의 포인트는 작품이 기존의 공간 구조 및 조경과 함께 어우러지는 장소 특정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위에서 소개한 작품들이 대형 스크린 역할의 건물 외벽과 산책로를 연상케 하는 소방도로 위 관객의 동선을 고려해 의도한 작품이었다면, 냉각타워 뒤 작은 광장에 설치된 신미경 작가의 「香水(향수)와 鄕愁(향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외부 환경과 보다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면 잘 찾아온 것이다. 겉보기에 성곽을 이루는 돌과 조각상 사이 어딘가를 떠오르게 하는 이 작품의 비밀은 바로 비누로 만들어진 조각이라는 것이다. 물처럼 흐르는 기억의 순간을 단단히 고정하는 감각이 ‘향기’라고 말하는 신미경 작가는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이와 같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15톤에 육박하는 이 비누조각은 햇빛, 비와 바람을 곧이곧대로 맞으며 자연에 의한 풍화로 점차 모습이 변해간다. 방문 당시인 9월 중순, 이미 풍화에 의해 불투명해지고 크랙이 생긴 표면을 볼 수 있었는데 전시가 종료되는 한겨울이면 어떤 모습일지, 가을바람에 실렸던 향기는 여전한지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잊지 않고 다시 방문해보기로 한다.



리경, 「더 많은 빛을 _ 기쁨 가득한」, 2021
리경, 「더 많은 빛을 _ 기쁨 가득한」, 2021

신미경 작품 좌측의 짧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볼 수 있는 리경 작가의 설치작품 「더 많은 빛을 _ 기쁨 가득한」도 놓치지 말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오르고 기우는 자연적 흐름 그 자체인 달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달 본연의 은은하고 푸근한 빛을 효과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작가노트에 의하면 사물을 구분하거나 개별화하는 햇빛과는 달리 달빛은 사물을 융합하고 포용하는 빛이라고 한다. 화려한 이미지와 사운드로 시청각을 자극했던 작품을 지나 신미경, 리경 작가 특유의 차분하고 고요한 작품을 통해 「감각정원」에서의 특별한 밤산책을 마무리해보는 것은 어떨까.

산책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듯 걸음을 옮기며 작품이 전하는 촉각, 시각, 청각, 후각의 자극을 모두 즐겼다면 이번 전시를 만족스럽게 즐겼다 말할 수 있겠다. 전례없던 방역 사회가 도래하며 천지의 자연을 즐기는 것마저 어려워진 요즘, 전시 「감각정원」은 진정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디지털기술 발전의 이로운 생산물이 아닐까. 단조로운 일상 속 많은 생각은 접어두고 감각의 문을 두드릴 준비가 되었다면 오늘 저녁 ACC로 밤산책을 나서 보자. 전시는 12월 31일까지 계속된다.

  • 글. 김민지 mingjeek@gmail.com
    사진. 황인호 photoneverdie@naver.com

    20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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