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공연・보는 희곡

ACC 창·제작 희곡집

#ACC


귀한 책을 읽었다. 모두 7권으로 공연을 마친 희곡집이다. 일반적인 소설이나 평론, 그 밖의 관련 서적을 대하다가 희곡집을 읽는 데는 생각보다 깊은 집중이 필요했다. 평소 읽었던 책들이 문장이 담고 있는 뜻을 이해하는 위주였다면, 공연을 위한 희곡은 상황과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상상하면서 읽어가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상상력 가동이 어려울 때면, 동작을 취하거나 큰소리로 목소리를 내며 읽는 상황극도 간간이 있었다.
7권의 희곡집은 ACC 창·제작 공연작품을 책으로 발간한 것이다. 종이책과 전자책(E-BOOK)으로 동시에 발행했는데, 공연이 끝난 작품을 희곡으로 출판한 것은 공연 출판계에서도 이례적인 일일 것이다. 책의 내용과 구성은 ACC 예술극장 등에서 선보인 창·제작 공연 5편과 어린이 공연 2편으로 한글과 영문, 공연 사진 등이 같이 엮어져 읽으면서 가졌던 상상이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내용만큼이나 책의 표지 색깔도 다양하다. 다시 생각해보면 표지의 색깔과 담고 있는 내용이 어딘지 같은 맥락이다. 내용을 표지의 색깔로 먼저 알게 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7권의 책은 2018년, 2019년, 2020년에 공연된 작품으로 보지 못한 공연을 희곡으로 본 셈이다.

희곡의 내용은 외국의 유명 희곡을 번역 각색한 작품부터 우리의 전통적 가락인 판소리 형식까지 다양하다. 또, 5.18 민주화운동 내용을 시작으로 오월 관련 내용과 친구들과의 우정, 한 마리 새와의 교감까지 감동과 교훈을 주는 내용이다. 게다가 두 편의 동화는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이 읽어도 깊은 여운을 남길 만큼 아름답다.


ACC 창·제작 공연작품을 책으로 발간한 7권의 희곡집

다시 생각하게 하는 ‘산다는 것’

희곡의 내용을 중심으로 7권의 책을 세 가지로 분류해 보았다. 그 첫 번째는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내용으로 『나는 광주에 없었다』(2020), 『시간을 칠하는 사람』(2020), 『보이야르의 노래』(2019)이다. 두 번째는 우리 가락인 판소리를 기조로 만들어 낸 창작 판소리로 부모의 교육이 자녀들의 삶을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적나라하게 알려준다. 『스토리인 아시아』(2019), 『드라곤 킹』(2019)이다. 세 번째는 삶을 통과하는 고통의 모든 것에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레드 올랜더스』(2019), 『여왕과 나이팅게일』(2018)이다.

 『나는 광주에 없었다』(2020)

첫 번째에 속하는 『나는 광주에 없었다』(2020)는 제목이 발산하고 있는 것처럼 오월항쟁에 관한 내용이 액자식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공연 중 관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관객 참여형으로 꾸려졌다는 점이다. 광주시민 모두가 폭도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모두가 진정한 자유를 선택하고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덕분에 오월항쟁을 겪지 않은 세대들이 진정성 있게 읽을 수 있고, 공연을 볼 수 있도록 촘촘하게 구성되어 이해를 돕는 역할을 해낸다.

『시간을 칠하는 사람』(2020)

『시간을 칠하는 사람』(2020)은 ACC의 2018 창작스토리 콘텐츠개발 사업을 통해 선정된 ‘시간을 짓는 건축가’를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1980년 오월항쟁의 최후 항전지였던 ‘전남도청’과 그 건물에 얽힌 페인트공의 이야기이다. 아들은 도청의 벽에 그날을 상징하는 그림을 그리고, 페인트공인 아버지는 흰색으로 끊임없이 덧칠하며 기억을 지우는 역할을 한다. 시간을 칠하는 사람이란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아들은 시간을 기억하려 하고 아버지와 그 밖의 인물들은 시간을 지우려는 완곡함이 돋보인다. 결국, 오월항쟁의 중심에서 아들과 아내를 잃고서야 시간은 결코 덧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보이야르의 노래』(2019)

『보이야르의 노래』(2019)는 방글라데시의 작고 아름다운 마을에서 펼쳐지는 소녀 ‘리아’와 로힝야 소녀 ‘쿠시’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결국은 국가폭력과 인권유린에 관한 광의적 의미를 담고 있어서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내용으로 분류했다. 방글라데시의 제한된 구역에서 거주하는 로힝야 소녀 쿠시는 방글라데시 소녀인 리아와 금방 친해지면서 친구가 되지만,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일방적인 불평등과 언어폭력, 거주지 제한에 항거할 수 없도록 길들여진 까닭에 습관처럼 지내면서도 매번 절망한다. 방글라데시 소녀인 리아는 로힝야족이 거주할 주택을 짓는 일로 돈을 버는 오빠가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로힝야족은 제 나라로 돌아가야 하며, 결국은 멀리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처음으로 의문을 갖는다.

『스토리인 아시아』(2019)
『드라곤 킹』(2019)

두 번째의 분류에 속하는 『스토리인 아시아』(2019)와 『드라곤 킹』(2019)은 현대적 재해석의 판소리로 읽을수록 재미가 있다. 아마도 공연으로 직접 보았다면 뻥, 터지는 웃음으로 답답함이 시원하게 뚫렸을지도 모른다.
『스토리인 아시아』(2019)는 아시아권의 인도네시아와 미얀마 설화를 원작으로 꾸려졌다. 두 가지 이야기가 한 꾸러미 안에 희곡으로 담겨 있는데, 꼭두각시를 만드는 아버지를 둔 아들, 웅이는 집을 떠날 때 아버지로부터 지혜, 선, 지식, 힘이란 이름을 가진 네 개의 꼭두각시를 선물 받는다. 웅이는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상황에 알맞은 꼭두각시를 부르는데, 꼭두각시는 거짓말처럼 나타나서 상황 대처 방법을 탁월하게 알려준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미얀마의 이야기인데 아이를 갖고 싶은 부부의 이야기이다. 엄마의 꿈에 나타난 거인은 열일곱 살이 되면 자신과 결혼을 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씨앗 하나를 준다. 부부는 씨앗을 심고 잘 키워 커다란 열매를 얻는다. 열매는 오이였는데, 오이 안에는 여자아이가 들어 있었다. 부부는 아이를 정성스레 양육하는데 어느새 자라서 열일곱 살이 되었다. 약속한 대로 거인이 부부를 찾아오자 부부는 딸인 티문마스를 피신시키는데,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엄마가 일러준 대로 어렸을 때 엄마가 불러주었던 자장가를 부른다. 자장가는 난관을 헤쳐 나가는데, 도움을 주며 티문마스는 세상은 결코 혼자서는 살 수 없으며 주변을 돌아보며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드라곤 킹』(2019)은 판소리 다섯 마당 가운데 하나인 수궁가(水宮歌)를 현대적인 재해석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디지털 애니메이션과 판소리, 소리꾼과 배우의 라이브 퍼포먼스가 융합된 하이브리드 공연인 셈이다. 인간 내면의 모습을 유머러스하고 풍자적으로 그려낸 수궁가와 애니메이션이 누가 보아도 재미있고 유쾌하게 진행되는 내용이다.

『레드 올랜더스』(2019)
『여왕과 나이팅게일』(2018)

세 번째 분류는 『레드 올랜더스』(2019)와 『여왕과 나이팅게일』(2018)이다. 『레드 올랜더스』(2019)는 아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인도의 시성(詩聖)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의 상징희곡 〔붉은 협죽도 꽃 (Red Oleanders)〕를 번역, 각색한 희곡이다. 억압과 폭력이 만연한 사회에 습관처럼 패배의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자유를 향한 희망을 절대 의지로 지켜내는 여성, 난디니는 모든 이들에게 빛이며 구원의 상징 그 자체이다. 반대로 폭압과 폭력적 권력자에게는 당장 제거해야 할 존재를 뜻한다. 난디니는 가슴과 머리에 붉은 협죽도 꽃을 꽂고 다닌다. 왕과 폭력적 권력자들에게 이 붉은 꽃은 저항의 상징으로 존재한다. 평화와 자유의 상징인 론존이 곧 도래한다는 확신에 차 있는 난디니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을 버리지 말라 끊임없이 독려한다. 재미있는 것은 교수와 고고학자의 등장이다. 이 두 직업군은 회피형 인간으로 연구를 방패 삼아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모두 회피하며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여왕과 나이팅게일』(2018)은 사람이 사람의 관계와 귀를 기울여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를 은유적 화법으로 알려준다. 잿빛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듣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지식이 높은 사람도 권력자도 아니다. 소년과 배고프고 가난한 그 소년의 엄마이다. 소년과 엄마는 나이팅게일이 하는 말을 가슴으로 이해하며 여왕에게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를 알고 느끼게 무언으로 일러준다.



희곡으로 구현한 공연 세상


7권의 희곡을 읽으면서 오래전 읽었던 세익스피어의 〔햄릿〕과 아일랜드 태생의 극작가 베케트의 희곡인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던 시절을 기억해냈다. 읽기 쉽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친구와 함께, 부모와 아이들이 희곡을 읽으며 상황극을 재현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내용의 풍부함에 즐거웠다는 이야기이다. 연극의 3대 요소인 희곡이 7권의 종이책으로 출간된 것은 공연을 관람하지 못하는 독자에게 기쁜 소식이다. 더불어 희곡 읽기의 즐거움을 주며 공연 관람을 유발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7권의 종이책 희곡은 친환경 용지와 콩기름 잉크 사용 등 친환경 인쇄로 제작해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을 담았다. 국내 온·오프라인 서점과 도서관, ACC 컬처숍에서 만나볼 수 있다.

  • 글. 범현이 baram8162@nate.com
    사진. ACC 제공

    2021.10

 

공감 링크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