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건축적인 공간 속의 사색

ACC 전시 작가 정정주

아티스트

정정주 작가

정정주 작가는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95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한 후 2002년 독일 쿤스트아카데미 뒤셀도르프를 졸업했으며 2015년 국민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학 박사를 취득했다. 2002년부터 서울, 일본, 중국, 벨기에 등에서 15회의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미래는 지금이다」(국립현대미술관, 과천), 「Thermocline of Art」(ZKM, 독일) 외 다수의 국내외 단체전에 참여했다. 기본적인 건축적 조건들을 정교하게 배치하여 각 공간의 독특한 분위기를 3차원의 건축 구조 속에 담아내고, 그 구조 안에 개입된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서 '각 공간의 고유한 아우라가 어떤 시각적 조건에 의해 경험되는가'라는 문제를 탐색하고 있다. 2010년 김종영 미술상, 2003년 광주 신세계미술상을 수상하였고, 2009년 금천예술공장, 2006년 국립 고양창작스튜디오, 2003년 쌈지스페이스 레지던시에 참여하였다. 현재 성신여자대학교 미술대학에 재직 중이다.




기숙사에서 혼자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강하고 따뜻한 빛이 들어왔다. 이질감이 느껴지는 이방인 같은 그 빛은 작은 방을 쓰다듬듯 천천히 움직이더니 어느덧 사라졌다. 묘하게도 고립감과 공포감이 함께 밀려왔다. 독일 유학 초기에 정정주 작가가 겪었던 일이다. 그런데 그때 느낀 여러 감정들이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이에 대해 늘 생각하던 그에게 어느 날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지던 시기였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그는 집에서 솜이불 안에 숨어 있었다. 밖에서는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많이 두려웠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몹시 궁금했다. 며칠간 소강상태가 이어졌을 때, 그는 누나, 동생과 함께 조심스럽게 시내로 나가 보았다. 거리엔 불에 탄 차량들과 깨진 유리 조각들이 가득 널려 있었고 군중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낯선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그는 공포감과 호기심 등이 뒤섞인 기묘한 심리상태를 경험했다. 이처럼 독일의 기숙사 창문으로 들어온 빛과 유년시절 광주의 풍경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마치 풀어야 할 화두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기숙사」 나무로 만들어진 기숙사 모형, 감시카메라 5개, 모니터 5대, 모터, 80×200×80cm, 2000
「기숙사」 나무로 만들어진 기숙사 모형, 감시카메라 5개, 모니터 5대, 모터, 80×200×80cm, 2000


2000년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 교내미전

정정주 작가는 먼저 자신의 내면 같은 방에 침투해 들어온 낯선 빛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지 고민했다. 그래서 실내로 들어오는 빛의 형태대로 입체적인 모형을 만들어 그 모형 내부에 빛을 채우기도 했다. 그러다가 모형 내부로 스며드는 빛의 모습을 관찰하기 위해 안쪽에 소형 비디오카메라를 설치하고, 모니터를 연결해 외부에서 영상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식의 실험이 이어지면서 점점 빛이 들어오는 건축공간을 표현하는 쪽으로 확장되었다. 그의 초기 작업 중 대표작인 「기숙사」는 친한 선배가 생활하던 학생 기숙사의 한 층을 모형으로 만든 것이다. 이 기숙사 모형엔 5개의 방이 이어져 있는데, 방마다 앞쪽에 창이 나 있고 각 방 안에는 감시카메라가 1대씩 설치되어 있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감시카메라들은 빛이 들어오는 창밖의 모습을 응시하며 창문을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멀어지는 운동을 반복한다. 관객들은 기숙사 모형 아래 놓인 모니터 5대를 통해 각 감시카메라가 촬영한 영상을 실시간으로 보게 된다. 만약 관객이 가까이 다가가 기숙사 창문 안을 살피면 모니터엔 관객의 모습이 커다랗게 보인다. 무언가를 관찰하려고 다가가지만 결국 관객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셈이다. 감시카메라가 보여주는 것은 관객의 시선이기도 하지만 방 안에서 호기심과 공포감으로 조심스럽게 외부의 타인을 살펴보는 작가의 심리적인 시선이기도 하다.



「응시의 도시」 나무, 아크릴, 스테인리스, 소형 비디오카메라 8개, 모터, 비디오프로젝터, 2010
「응시의 도시」 나무, 아크릴, 스테인리스, 소형 비디오카메라 8개, 모터, 비디오프로젝터, 2010


2010년 김종영미술관 전시

자신의 거실, 선배의 기숙사, 체육관 등 주변 건물들을 소재로 모형 작업을 하던 정정주 작가는 2002년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부터 한동안 어떤 작업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런저런 시도를 하는 과정에서 전시장이나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건물을 모형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7년 일본 나고야의 '플러스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을 계기로 이미 사라졌거나 앞으로 사라질 건물과 도시 등을 다룬 「응시의 도시」 시리즈를 시작하였다. 개인전이 열린 전시장과 주변 건물들이 도로 확장공사로 철거될 예정이란 말을 듣고 그 건물들을 모형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건물 모형 내외부에 소형 비디오카메라들을 설치해 1~3개의 영상으로 보여주는 작업 방식을 택했다. 이 시리즈는 2008년 중국 상하이의 '뱅거드 갤러리', 2010년 서울의 '갤러리 조선'과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들을 거치며 나고야, 상하이, 서울, 일산 등의 여러 건물들이 더해지면서 점차 작은 도시처럼 자라났다. 독일 유학시절에 제작된 「기숙사」가 건물 모형, 내부 감시카메라, 모니터, 관객을 단선적인 방식으로 연결하면서 작품과 관객의 관계에 집중했다면, 「응시의 도시」 시리즈에서는 다양한 건물 모형들과 건물 내외부에 설치된 여러 대의 소형 비디오카메라들이 복합적인 시선을 만들어내며, 작가의 기억과 감정,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넌지시 암시한다. 특히 「응시의 도시」 시리즈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그는 점점 초등학생 시절에 겪은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억과 연결되었는데, 당시 기능이 마비된 도시 안에서 느꼈던 비현실감, 공포감, 호기심 같은 감정들이 텅 빈 건물 모형 내외부에 설치된 소형 비디오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환영 같은 느낌, 공허감, 불안감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소쇄원」 청자 기법의 도자로 제작된 소쇄원 모형, 소형 비디오카메라 8대, 프로젝터 2대 360x240x140cm, 2018
「소쇄원」 청자 기법의 도자로 제작된 소쇄원 모형, 소형 비디오카메라 8대, 프로젝터 2대 360x240x140cm, 2018


2018년 광주시립미술관 전시

항상 건축공간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해 온 정정주 작가는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과 정원을 작품에서 다룰 기회를 갖게 되었다. 2018년 광주시립미술관은 전라도 정도 1000년과 12회 광주비엔날레를 함께 기념하기 위해 〔천년의 하늘, 천년의 땅〕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현대미술을 통해 호남의 역사와 문화 등을 재해석한 이 전시회에는 작가 13명이 초청되었는데, 4개 부문으로 이루어진 전시 중 풍류와 누정 문화를 다룬 '인문의 땅' 부문에 그는 「소쇄원」을 출품하였다. 「소쇄원」은 건물 모형과 소형 비디오카메라를 이용한 「응시의 도시」 시리즈와 비슷한 작업 방식을 취하면서도 정자와 정원이 있는 소쇄원을 새롭게 해석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작품이다. 그는 조합토를 이용해 청자제작 기법으로 약 40x50cm 넓이의 도자판들을 만들고 깨진 유물을 짜맞추듯 연결해 소쇄원의 공간을 재현한 다음 그 위에 2개의 정자 모형을 배치했다. 그리고 소형 비디오카메라들을 여기저기 설치하여 소쇄원을 바라보도록 하였다. 소쇄원 모형 뒤로는 비디오카메라들의 시선이 흑백 영상으로 펼쳐지는데, 전통 동양화에서 다뤄진 것처럼 아름답고 이상적인 풍경과는 다르게 거칠고 오래된 유물을 탐색하는 듯한 기묘한 분위기가 흐른다. 대중에게 고정된 이미지로 다가오기 마련인 소쇄원을 매우 낯선 대상으로 바라보게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2019년 런던 한국문화원에서 개최된 전시회 〔Circulation〕에도 출품되었다.



「응시의 도시-광주, (구)국군광주병원」 폼보드 건축모형, 비디오카메라, 비디오프로젝터, 모터 가변 설치, 2019
「응시의 도시-광주, (구)국군광주병원」 폼보드 건축모형, 비디오카메라, 비디오프로젝터, 모터 가변 설치, 2019


2019년 ACC 전시

정정주 작가는 「응시의 도시」 시리즈를 하면서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기억을 보다 선명하게 풀어내려고 노력했다. 「응시의 도시-광주」 시리즈가 그것인데, 그는 2017년부터 전일빌딩, (구)전남도청, (구)국군광주병원, 상무관을 작품 소재로 다루었다. 그중 2019년작 「(구)국군광주병원」은 눈여겨볼 만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ACC가 기획한 〔2019 지역-아시아 작가 매칭전〕에 출품되었다. 동일한 주제 하에 전라도 지역 작가와 아시아 작가를 동시에 선정하여 서로 다른 작업을 선보이는 이 기획전은 2019년엔 '라이트 온 더 무브(LIGHT ON THE MOVE)'라는 제목으로 '빛, 역사, 공간'을 다루는 작가들을 초대하였다. 광주 출신의 정정주와 인도네시아 출신의 랑가 뿌르바야(Rangga Purbaya)가 그들이었다. 두 작가는 전시회에서 각자의 관점으로 역사의 아픔을 드러냈다. 정정주 작가가 선보인 「(구)국군광주병원」은 5・18광주민주화운동 사적 23호로 지정된 건물을 소재로 삼은 것이다. 이곳은 5・18 당시 계엄사령부에서 고문과 폭행을 당한 시민들이 감시하에 치료를 받았던 병원인데, 국군병원이 함평으로 이전된 2007년 이후 병원 건물은 방치된 채 비어 있는 상태이다. 옛 병원 건물을 그대로 본뜬 모형 안에는 누군가 있는 것처럼 빛이 새어 나온다. 병원 건물 내외부엔 비디오카메라 7대가 설치되어 있고, 이 비디오카메라들이 포착한 영상들은 프로젝터 7대로 송출되어 전시장 벽면 곳곳에 둥그스름한 형태로 나타난다. 가장자리가 흐릿한 그 영상들은 마치 병원 건물이 자신의 노쇠한 육체에 새겨진 지난날의 아픈 기억을 어렵사리 떠올리는 것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영상 속 빈 건물 이미지들이 공허한 느낌을 주면서도 이곳에서 생겨난 역사의 상처를 더 강렬하게 환기시키는 작용을 한다. 이 작품은 광주비엔날레의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프로젝트인 〔메이투데이〕의 일환으로 기획된 전시회 〔볼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 사이〕에도 출품되었다. 그런데 전시 장소가 바로 (구)국군광주병원이었다. 역사의 현장에 그 현장을 다룬 작품이 설치되면서 전시회를 더욱 의미 있게 만들었다.



「Façade 2021-1」 스테인리스, 거울, LED전등, 240x500x20cm, 2021
「Façade 2021-1」 스테인리스, 거울, LED전등, 240x500x20cm, 2021


2021년 아트스페이스3 개인전

이제까지 소개한 「응시의 도시」 시리즈 외에 정정주 작가는 2017년부터 새로운 작업을 시도했다. 구체적인 건물 모형과 비디오카메라로 빛과 공간의 변화를 포착하는 작업 방식에서 벗어나 빛과 공간을 보다 추상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일명 '「파사드(Façade)」 시리즈'라고 불리는데, 벽에 부조의 형태로 설치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물론 「파사드」 시리즈가 갑자기 나오게 된 것은 아니다. 오래전부터 그는 설치작업을 위해 3D프로그램으로 도면 작업을 했는데, 이 3D도면에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빛의 변화를 넣어 보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2010년부터 빛의 변화를 담은 회화적인 영상작업을 다양하게 실험하였다. 이 시기에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회화나 중세 종교화의 공간 등을 연구하며 빛이 공간에서 만들어내는 형태와 색채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평면적인 영상 이미지를 약 15cm 깊이의 사각박스형 부조로 변환하였다. 이 사각박스들 안에는 저마다 3개 정도의 층이 있어서 모양과 각도를 달리하고, 색색의 LED전등들도 내부 구조 안에 설치된다. 작업 초기에 그는 이런 사각박스들을 벽면에 수평으로 설치했으나 「Façade 2021-1」에서는 사각박스 160개를 세로로 높이 쌓아 올려서 특별한 구조물을 선보였다. 다채로운 빛을 발산하는 이 구조물은 마치 중세시대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연상시킨다. 빛과 건축적인 공간을 이용한 추상적인 조형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제 50대 초반인 정정주 작가는 자신의 역량을 더 키우기 위해 많은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는 빛과 건축적인 공간을 중심으로 한 추상적인 조각에 대해 깊이 연구 중이다. 특히 벽면에 세우는 부조 작업에 이어 입체 작업도 시도해 볼 계획이다. 작가로서 그는 이런 새로운 실험 과정들이 언제나 버겁고 힘들지만 작은 성과를 얻으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즐거움과 성취감을 느낀다고 한다. 이는 오랜 시간 이어진 빛과 공간에 대한 그의 사색이 시기마다 의미 있는 작품으로 구체화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요즘 그는 늦가을에 개최될 여러 전시회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의 작업실에서 또 다시 새로운 작품들이 태어나는 중이다.




  • 글. 백종옥 icezug@hanmail.net
    사진. 정정주 ju36@naver.com

    20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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