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은 쉽게 눈은 편하게

ACC 라이브러리파크 재개관에 부쳐

이슈&뷰

라키비움을 아시나요

라키비움(Larchiveum)은 도서관(Library), 기록관(Archive), 박물관(Museum)이 하나로 합쳐진 용어로, 2008년 미국 텍사스 대학의 메건 윈젯 교수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제안한 융복합적 수집기관의 한 모델이다.₁

이후 라키비움은 주로 국내 기록관리전문가들 사이에서 논의되면서 하나의 담론으로 형성되었고, 아시아문화정보원, 국립예술자료원, 국립국악원 등의 대규모 아카이브 사업에 주요 정책적 방향으로 수용되었다. 이제 우리는 ‘라키비움’의 이름을 내건 별도의 공간을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사실 기록·보존 기관들이 이렇게 전시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2008년을 훨씬 앞선다. 1977년 파리의 퐁피두센터가 개관한 이후, 유럽의 공공도서관들은 앞다투어 복합문화시설로 변신하기 시작했고 90년대 이후로는 몽펠리에 도서관처럼 비블리오테크(Bibliothèque)가 아닌 ‘미디어테크(Médiathèque)’를 자처하는 공간들이 등장했다. 2000년 이후로는 램(LAM; Library, Achive, Museum)이라는 용어가 확산했고 여기에 갤러리(Gallery) 기능까지 덧붙어 글램(GLAM)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도서관 이용 패턴의 변화

라키비움은 ‘대규모 복합문화공간 조성’이라는 세계적 흐름이 한국적 맥락으로 수용되면서 급부상한 하나의 문화 현상이다. 라키비움이라는 말을 모르더라도 요사이 공공도서관을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서관의 업무가 더는 도서 관리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도서관은 한편에서는 지역 주민의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아가고, 다른 한편에서는 창작자 및 전문가 집단이 디지털 기반의 광범한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자신의 역량을 강화하는 재창작 공간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렇게 도서관이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상황은 거꾸로 이용자들의 이용 패턴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숙한 분위기에서 독서에 몰입하기를 강요하는 기존의 도서관보다는 도서를 비롯한 각종 매체를 ‘느슨하게’ 즐기는 북라운지가 각광을 받는 시대적 흐름에 한국의 도서관 정책이 부응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라키비움 조성은 이용자의 편의를 위해 공간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 기술적 변화와 연동하는 사회적 변화를 얼마나 창의적으로 운영 시스템에 반영할 수 있는지에 그 성패가 달려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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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권의 장서를 보유한 도서관 서가

라키비움으로서 ACC 라이브러리파크

ACC 라이브러리파크는 애초에 라키비움을 염두에 두고 아시아문화정보원 지하 3, 4층에 걸쳐 조성한 1만4천 평방미터 규모의 대중친화적 공간이다. 2015년 11월 정식 개관 이후 5년간 평균 이용자 수 40만 명을 유지하면서 운영되어 왔으나, 이용자의 수를 더 늘리고 재방문 비율을 더 높이기 위해 2020년 재설계 및 시공에 들어갔다. 전체 재개관은 올해 11월 25일로 예정되어 있으나 도서 및 로비 공간은 지난 5월 11일에 먼저 재개관했다.

이전의 구조를 상기해보자면, 가장 바깥쪽에는 유리창을 따라 서가가 길게 늘어서 있었고, 그 안쪽에는 13개 주제의 아시아 문화 관련 전시가 서가를 따라 나란히 배치되었다. 이런 구조에서는 독서 공간과 전시 공간이 혼선을 일으키고 열람 공간과 휴게 공간이 분리되기 때문에 정작 라키비움을 구상할 때 중요하게 여겨지는 ‘느슨한’ 향유가 어려워진다.

이는 라키비움이 추구하는 세 가지 기능이 공간상 통합되었다는 점에서 보자면 성공적이지만, 이용자의 편의라는 점에서 보자면 미진한 점이 없지 않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이번 재설계의 목표는 서가, 열람, 휴게, 전시 공간이 뚜렷하게 구분되면서도 이용자의 동선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유도함으로써 하나의 통합적인 공간을 연출하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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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또 같이: 로비―도서―전시 영역

재개관 후 다시 방문한 라이브러리파크는 우선 로비 영역이 크게 넓어져서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원한 느낌을 받는다. 입구를 지나 안내 데스크를 통과하면 카페(오픈 예정)와 통합된 휴게 공간으로 이어지는데, 이곳에 배치된 널찍한 소파베드들은 창밖의 대나무 정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별일 없이도 와서 한동안 머물고 싶은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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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 내에 있는 휠체어 사용자 전용 전동책상

로비 영역을 중심으로 왼쪽은 도서 영역이고 오른쪽은 전시 영역이다. 도서 영역에는 아시아 문화 관련 서가(장서 약 3만 권)가 이전에 길게 늘어서 있던 것과는 달리 한곳에 모여있고, 서가 내부에는 휠체어 사용자 전용 전동책상이 놓여있다. ‘배리어프리 존(barrier-free zone)’을 구현하려는 설계자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외에도 다양한 크기와 디자인의 책걸상들이 놓여있는데 이 가운데에는 디지털 열람실과 개인 노트북을 거치할 수 있는 1인용 소파들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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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정원과 소파가 있는 휴게 공간

책을 골라서 좀 느슨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로비 영역의 소파베드로 발길이 간다. 조금 더 가다 보면 일간지를 종류별로 거치해놓은 테이블을 만나게 되고 계속 오른쪽으로 걷다 보면 전시 공간이 이어진다. 아직 공사 중인 전시 공간에는 재개관 특별전과 함께 아카이브 전시 및 기술기반 전시가 관객을 기다리고 있으며 곳곳에 미디어월이 설치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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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푹공간(sunken space)으로 조성된 대형 계단 열람석

재개관 후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지하 3층에서 지하 4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부분이다. 낮은 높이와 널찍한 폭으로 디자인된 계단 열람석은 마치 이곳이 도서 영역이라고 선언이라도 하듯 규모를 자랑한다. 완만한 기울기에 목재의 따뜻한 느낌까지 갖추었으니 이 움푹공간(sunken space)은 조만간 라이브러리파크의 명소로 자리 잡을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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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열람실과 정기간행물 코너

발은 쉽게 눈은 편하게 귀는 익숙하게

한번 둘러보고 나면 어디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쉽게 알 수 있고, 다음에 올 때 다시 갈 곳을 체크해놓을 수 있는 명료한 구조. 전체적으로 조도를 낮춘 대신 개인 조명기구를 설치하고 가구와 바닥 등에 패브릭 소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빛의 난반사를 최소화한 배려. 정숙을 강요하기보다는 귀에 익숙한 정도의 낮은 소음이 있어 오히려 마음이 느슨해지는 공간. 발은 쉽고 눈은 편하고 귀는 익숙하니, 새로 단장한 ACC 라이브러리파크는 한마디로 잘 조성된 북라운지이다. 전시 공간을 포함한 전체 재개관이 각별히 기대되는 까닭이다.

ACC 홈페이지 내 ‘아시아문화 아카이브’에 접속하면 도서 목록과 수집품 목록을 미리 검색해 볼 수 있다.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DA-Arts)라고 하는 국내 최대의 문화예술 디지털 아카이브와도 연동된다고 하니, 자료를 찾을 수 없어 뭘 못하겠다는 핑계를 대는 시대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ACC 라이브러리파크는 관람객을 다시-볼(re-spect) 준비가 되었다. 재-방문(re-visit)은 이제 독자 제현의 몫이다.


1) “LJ Talks to Megan Winget, Who Studies Preservation of Online Games” Library Journal, 2008. 7. 30.


  • 글. 양진호 zino.yang@gmail.com
    사진. 황인호 photoneverdie@naver.com

    20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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