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 더, 모든 것이 멈추기 전에
[이퀼리브리엄: 인간과 환경의 경계에서] 전시 리뷰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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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id-19 팬데믹이 우리의 일상을 심각하게 제한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과 상관관계를 가진 (어쩌면 인과관계일지도 모를) 주제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ACC에서 기획한 [이퀼리브리엄: 인간과 환경의 경계에서]라는 전시로 그 제목부터 시의적절하다. 힘의 균형을 의미하는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은 생태계에서 종의 종류와 수량이 항상 균형을 이루는 상태를 뜻한다고 한다. 현생 인류를 생태계의 균형을 파괴하는 ‘연쇄살인마’에 비유한 유발 하라리의 말이 아니더라도 코로나바이러스를 생태계의 질서를 교란시키면서 비정상적으로 증식하는 인간 개체 수를 줄이기 위한 지구의 자정작용이라고 보는 가이아 이론(주1)이 다시 주목받고 있는 것은 그만큼 환경문제가 심각하다는 방증이라 하겠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11개국 작가들이 참여하는 이번 전시회는 환경문제를 바라보는 아시아 청년 작가들의 시선을 네 개의 주제로 나누어 보여주고 있다. 개인이 만나는 일상적인 삶의 풍경에서 시작해서 사회와 역사, 정치와 경제에 연관된 환경문제의 실태를 보여주는 작품을 거쳐 새로운 비전과 아름다움을 통한 치유의 장으로 관객을 인도하는 서사적 구조를 따라가는 형식으로 작품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러한 전시구성은 관람자들에게 환경과 생태 시스템에 관한 관심을 촉구하고 지속 가능한 상호관계를 위한 인식과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효과적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이미지와 소리를 사용한 작품들을 만난다. 외부세계를 인식하는 가장 기본적인 감각인 시각과 청각을 이용해서 라일라 친후이판은 같은 장소의 현재와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비교하고 김준은 오늘의 풍경을 수집한다. 라일라 친후이판의 「위엔산 근경: 지룽강 옆 침묵과 소란」(사진 1)과 허백련 & 무등산 사운드스케이프의 「일출이작」(사진 2)는 옛 화가가 그림으로 남길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를 비교하는 작업인데, 재미있는 것은 옛 그림 속 풍경에서 들릴 법한 자연의 소리를 가상의 사운드로 만들어 들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허백련의 1954년작 「일출이작」과 나란히 걸려 있는 모니터에서는 예전에 저수지였던 광주의 경양방죽에서 무등산 아래 춘설헌까지 가는 길을 소리와 함께 보여주고 있어서 우리가 어떻게 자연환경을 변화(또는 훼손)시켰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란히 걸려 있는 그림과 영상은 단순히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물려받은 것과 우리가 물려줄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 다음 세대들은 저 벽에 어떤 풍경을 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돌아서면 김준이 서랍 속에 담아 보관하고 있는 풍경을 만난다.
김준의 「가공된 정원」(사진 3)에서 보여주는 풍경 사진은 우리나라와 영국, 독일, 뉴질랜드 등 작가가 개인적으로 방문한 장소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풍경들이다. 특정 장소를 사진으로 찍고 그곳의 소리를 녹음하고 또 그곳의 식물들을 채집하는 일종의 현장 보고서 같은 작업에서는 내용보다 작가가 선택한 서랍이라는 형식에 더 주목해야 한다. 서랍은 보관과 진열의 장소이다. 박물관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에 왜 이런 평범한 걸 소중하게 모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범한 일상이 소중한 잃어버린 과거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현재/현실의 역설적 은유는 베트남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이동 수단인 오토바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배기가스를 여러 관점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응우엔 우담 트랑의 작품 「뱀의 꼬리」 시리즈에서도 읽을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왈츠곡을 배경으로 오토바이를 탄 젊은이들이 군무를 벌이는 「뱀의 꼬리-기계 마상대의 왈츠」와 「뱀의 꼬리 아침(삼면화) 소녀-커플-소년」(사진 4)이 보여주는 역동적이고 발랄해 보이는 모습 위로 배기가스로 가득 찬 비닐 풍선이 드리우는 위태로운 상황을 쓰러진 코끼리에 은유하고 있다.
현대미술 중에서 다큐멘터리와 사진을 이용한 아카이브 작업이 사회문제를 고발하고 공감을 통해 실천적 대안을 찾는데 적합한 매체라는 것을 유지수와 케친위안의 작품은 잘 보여주고 있다. 유지수는 「온산: 오래된 미래」(사진 5)에서 온산공단의 현 상황을 인터뷰를 포함한 영상기록물과 사진들로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거기에는 온산공단의 환경문제뿐 아니라 고향에서 쫓겨난 지역주민들의 이야기와 이주노동자들의 사회적 문제까지 복합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대만 작가 케친위안은 자신의 고향인 장화의 아름다운 갯벌이 새로 들어선 화학공장으로 인해 어떻게 오염되어서 어떤 방식으로 환경운동을 전개해 나갔는지를 영상기록물 「전진」(사진 6)을 통해 기록하고 기억하고 있다.
현실과 현장에 기반을 둔 작품들 사이에서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들도 눈에 띈다. 폐허가 된 고향집 벽에 피어난 곰팡이와 벌레를 회화적 상상력으로 승화시킨 김설아의 「사자의 은유」(사진 7)를 비롯한 여러 그림은 환경에 대한 독특한 시각과 시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서도 끈질기게 삶을 이어가는 곰팡이와 벌레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바라보는 작가의 낙천적 시각이 조금 불편했는데 그 이유를 대만 작가 첸첸유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었다. 「감각이 없는 사물과의 감각적 앗상블라주」(사진 8)는 첫눈에는 네온이 화려하게 빛나고 플라스틱과 관상식물들의 조합이 만들어 내는 조형물은 아름답다고 느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작품에 다가가서 찬찬히 살펴보면 일그러진 플라스틱 사이에 끼여서 빛 공해를 받으며 자라나고 있는 식물들의 모습은 미세 플라스틱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 보여서 불편함을 넘어서 섬뜩한 느낌까지 든다.
불편한 이미지와 섬뜩한 조형물 사이에 맑은 물이 담긴 투명한 유리 용기들이 쇠붉은큰박쥐나 주머니개미핥기 같은 분류표를 달고 진열대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놓여있다. 백정기의 작품 「자연사 박물관: 태반류」(사진 9)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기본적으로 같은 물을 공유하는 존재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세포의 재생산 주기에 따라 현재의 모든 생물, 혹은 멸종되어 없어진 개체라 하더라도, 그것을 구성했던 물은 서로 돌고 돌아 ‘지금’ 우리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생명체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물야나의 작품 「오션 원더랜드」(사진 10)는 화사한 색과 아름다운 형태로 우리의 눈길과 발길을 끈다. 따뜻한 느낌을 주는 털실로 짜서 만든 바닷속 풍경은 작품 제목 그대로 신비스럽고 형형색색의 해양식물들이 만들어 내는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작가는 고국인 인도네시아의 바닷속을 재현해 놓은 풍경 속으로 관람객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점점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현실에 경고를 보내고 있다. 몰야나는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현실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만들고 있다.
현대미술과 환경문제 사이로 난 길을 걷다 보면 거대한 저유시설을 닮은 원형 장막에 다다른다. 장막의 표면에는 오래된 도시의 집들이 투사되어 보이는데 누구나 유년 시절을 보냈을 만한 낯익은 동네 풍경이다. 장전프로젝트의 「회귀된 시간」(사진 11)은 높은 담장 안에 기억과 과거의 풍경을 재구축하는 방법으로 담장 밖에 서 있는 관람객들에게 과거로부터 유배당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한다. 과거가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급속한 성장으로 서둘러 버리고 떠나온 혹은 떠날 수밖에 없었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현재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게 만든다. 회귀적이고 정적으로 보이는 원형 장막 안에서는 정해진 시간이 되면 많은 수의 드론들이 자유비행을 시작하는데 좁은 공간에서 많은 수의 드론들이 무질서하게 날아다니는 아슬아슬한 상황을 거쳐 차츰 균형과 질서를 찾아가는 모습에서 미래에 대한 낙관적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퀼리브리엄: 인간과 환경의 경계에서]는 아시아 지역의 로컬 환경 이슈들을 다루면서 대중과 현대미술과의 거리 좁히기와 함께 대중과 환경문제와의 거리 역시 좁히려고 노력하고 있다. 팬데믹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필요하지만 환경문제에서는 오히려 다가서야 한다. "참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면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라고 장 로스탕이 말했듯이 가까이 다가가서 장막을 걷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기꺼이 죽음의 악취를 맡아야 한다. 모든 것이 멈추어도 결코 멈출 수 없는 것이 예술이다. 그것은 예술 즉 창의성이 문제해결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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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노순석 noriso@naver.com
사진. 황인호 photoneverdie@naver.com
202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