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필리아를 품은 상상력

2020 ACC_R 레지던시 결과전시회 [바이오필리아, 흙 한 줌의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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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포스터

미래를 예측하기 힘든 시절이다. 현재 유행하고 있는 코로나19도 문제지만 앞으로 코로나19가 종식된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또 다른 변종 바이러스들이 창궐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뿐 아니라 인간들의 과도한 욕망이 발생시킨 기후변화와 환경오염으로 인해 언제 어디서 대규모 재해가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위기의 시대일수록 현재와 미래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과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2020 ACC_R 레지던시에서도 예술인과 연구자 들이 모여 ‘바이오필리아(Biophilia 생명사랑)'라는 주제로 현시대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었다. 현재 ACC 문화창조원 복합1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는 그 고민의 결과물이다. 지난해 11월 24일부터 올해 3월 1일까지 개최되는 [바이오필리아: 흙 한 줌의 우주]에는 레지던시에 참여한 예술가, 디자이너, 연구자 총 23명의 작업이 선보인다. 전시회는 쇼케이스(크리에이터스, 디자인 분야 작품), 아카이브(다이얼로그 분야 연구 논문, 레지던시 다큐멘터리), 레지던시 5주년 축하 특별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크리에이터스와 디자인 분야의 작품들 그리고 다이얼로그 분야의 연구 논문들을 주로 살펴보고, 특별섹션 작품 및 전시연계 프로그램인 라운드 테이블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ACC_R 크리에이터스 작품들

ACC_R 크리에이터스 분야에서는 12명의 예술가가 설치, 사운드, 미디어아트 등 다양한 형식으로 개인 또는 팀 작업의 결과물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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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영, 이지원 「어드메(2020)」 혼합재료(메탈 지오데식 돔 구조물, 20.2채널 반구형 입체음향 시스템, DNA기반 생성 음악, LED무빙조명)

전시장 입구에 가깝게 설치된 「어드메(2020)」(이다영, 이지원)는 비무장지대(DMZ)를 모방한 가상의 생태계를 소리와 빛이 있는 돔 구조물로 보여준다. 이 작업을 위해 작가들은 국립생태원의 자료를 바탕으로 비무장지대의 동식물에 대한 현황 자료를 조사하여 대표 종을 선정했다. 그리고 그 종들의 DNA 데이터를 디지털 사운드로 전환하는 작업을 하였다. 관람객들이 돔 구조물 안으로 들어가면 내부에 설치된 20개의 스피커에서 음향이 입체적으로 울려 퍼지고, 돔 구조물 위에선 조명들이 사운드에 맞춰서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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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탁, 이태용 「㈜이즈비」 아이패드, 증강현실 애플리케이션, 목재

이호탁과 이태용이 선보인 「㈜이즈비」는 컴퓨터 모니터, 태블릿 PC, 테이블 등을 이용해 1990년대 증권 거래소를 재현한다. 이 증권 거래소는 자본주의 사회인 한국에서 상품으로서 바이오필리아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시각화되는 장소이다. 이곳에서 관람객들은 모의 거래를 체험할 수 있는데, 거래를 통해 바이오필리아에 대한 관람객의 관심이 수치화되면 리포트로 작성되어 (주)이즈비 투자카페에 자료로 저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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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드정 「중력에의 의지」 PVC 천막, 전동 윈치, 플라스틱 구슬

전시장 중앙에는 닥드정이 설치한 「중력에의 의지」가 자리 잡고 있다. 10x10m 크기로 넓게 펼쳐진 천 안에는 크고 작은 금색 공들이 모여 있다. 천과 천장 사이에 연결된 여러 개의 줄들이 상하로 움직이면 천에 골짜기가 형성되면서 공들이 중력에 따라 이리저리 흘러 다니게 된다. 생명체의 움직임을 연상시키는 이런 물리적 변화를 보며 작가는 욕망을 지닌 생명이 있는 것에는 언제나 '권력에의 의지'가 있다고 주장한 니체를 떠올렸다. 그래서 작품 제목을 「중력에의 의지」라고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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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은, 이윤경 「9X9탄생보드」 혼합재료(인터랙티브 프로그래밍, 센서, 잉크, 판넬, 프로젝션 맵핑, 애플리케이션 개발)

「9X9탄생보드」(김태은, 이윤경)는 유전체 분석과 관련된 문제를 관람객들이 체험할 수 있게 만든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 작품이다. 긴 벽에는 선과 빛으로 구성된 그래픽이 있는데, 관람객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며 이 그래픽의 이곳저곳에 손을 대면 다양한 정보들이 뜨는 것을 보게 된다. 관람객은 이 과정에서 미래의 아이에 대한 여러 유전적 특징과 조합을 선택하고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생명의 탄생에 있어서 자연성과 인위적인 선택성의 차이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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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혁 「건축적 식물, 식물의 건축」 혼합재료(점토, 종이, 아크릴, 합성수지, 폴리젖산)

최진혁의 「건축적 식물, 식물의 건축」은 상상의 정원을 보여준다. 이 정원에는 식물의 형태와 건축적 개념이 결합된 조형물들이 있는데, 특히 소금 위에 나란히 세워진 원기둥들이 눈에 띈다. 각각의 원기둥은 아크릴, 점토, 합성수지, 폴리젖산 등 서로 다른 재료들이 공생하듯 이어져서 만들어진 것이다. 식물의 생성에 관한 수학적 시뮬레이션과 컴퓨터 알고리즘을 이용한 생성 디자인의 결과물인 이 조형물들을 통해 작가는 아름다운 자연과 상상하는 인간 그리고 디지털 기계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해 사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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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연, 세자르 노다, 최화준, 배정식 「색동정원과 33개의 요술봉」 인터랙티브 AR, 인터랙티브 모션 캡쳐, 인터랙티브 사운드

윤미연, 세자르 노다, 최화준, 배정식이 협업한 작품 「색동정원과 33개의 요술봉」은 관람객들이 참여할 수 있는 증강현실(AR) 게임이다. 관람객이 전시장에 설치된 태블릿 PC를 들고 애플리케이션을 열어 2개의 소망을 선택하면 그 소망들을 상징하는 자연 형태의 요술봉 2개가 나타난다. 다시 그중 하나를 선택하면 검은색 실루엣의 요술봉이 화려한 색동 요술봉으로 변하고 좋은 의미가 담긴 메시지도 나타난다. 코로나 블루의 시대에 희망을 주는 상징과 메시지를 통해 관람객들을 위로하는 작업이다.



ACC_R 디자인 작품들

ACC_R 디자인 분야에서는 5명의 디자이너가 각 부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개성이 있으면서도 상품화가 가능한 작업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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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배 「플라스티코스모스」 혼합재료(보드게임, 10개의 패널에 일러스트레이션 + 오리지널 창작 스토리 아코디언 북, 비누)

「플라스티코스모스」(김보배)는 순환하는 생태계에서 바다에 버려진 플라스틱 역시 순환하고 있음을 3개의 작업으로 일깨워준다. 첫 번째는 플라스틱 오염 및 예방 관련 문제를 틀릴수록 생물들도 멸종된다는 내용의 퀴즈 게임이다. 두 번째는 플라스틱 표면에 번식하는 해양 생물들로 인해 변해버린 해양생태계가 인간에게 유해함을 보여주는 아코디언 스토리북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플라스틱 부표 모양의 비누인데, 비누가 녹으면서 플라스틱도 사라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일상에서 청결과 안전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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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세라 「마이크로스코피(Microscopy)」 혼합재료(아크릴에 UV 프린팅, 화학 목재에 UV 프린팅, 비디오)

용세라가 선보인 「마이크로스코피(Microscopy)」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기체의 움직임을 표현한 작품이다. 벽과 바닥에는 현미경으로 바라본 세포 같은 형태들이 영상과 평면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고, 원시 생명체 모양의 시계들이 저부조로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벽감 안에는 평면 이미지에서 발전된 입체 작품들도 놓여 있다. 이렇게 평면부터 입체까지 다양한 형태와 강렬한 색채로 생명의 약동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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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고은 「식물의 몸짓」 혼합재료(패턴 재료: 지상파 레이저 스캔 자료, 상품재료: 패브릭에 UV프린팅, 철판, 비디오, 레진에 종잇조각)

식물이 부단히 움직이는 존재라는 사실에 주목한 박고은의 「식물의 몸짓」은 독특한 그래픽 패턴으로 전시 공간을 연출한다. 디자이너는 단풍나무의 움직임을 15시간 동안 기록한 데이터에서 기본적인 그래픽 패턴 이미지를 추출하였다. 그리고 그 그래픽 패턴을 반복, 확대하여 최종 패턴을 만들었다. 이렇게 식물의 움직임으로 형성된 그래픽 패턴을 이용하여 카펫, 스크린 세이버(screen saver), 북엔드(bookend), 열쇠고리 등 실용적인 상품을 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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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나영 「Godspeed You」 디지털 프린트

어두운 공간에 설치된 「Godspeed You」(정나영)는 모터로 회전하는 원형 작품들이다. 그 원형 안에는 과거에 여러 난관을 헤쳐 온 것처럼 코로나19 또한 당당히 극복한 인류의 모습이 연속적으로 패턴화되어 있다. 이런 연속적인 패턴들은 번쩍거리는 조명으로 인한 잔상 효과에 의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끊임없이 순환하는 이미지는 지구상에서 영원히 존재할 인류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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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이 「피지올로구스의 미로」 혼합재료(3개의 디지털 플레이어에 대한 디지털 데이터, 잉크, 페인트, 유리, 납, 구리, 아크릴 패널, LED, 목재 등)

최지이의 「피지올로구스의 미로」는 입체작품을 비롯해 벽화와 영상 등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목에서 '피지올로구스(Physiologus)'는 '자연연구자', '자연에 박식한 자'라는 의미로 동식물에 대한 정보와 그림을 담고 있는 중세시대 백과사전 같은 책을 의미한다. 세상을 거대한 미로로 바라보는 작가는 자신을 미로 속에 빠진 '피지올로구스'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그 상상의 미로 속에서 기묘하고 환상적인 인간과 동식물들을 탄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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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얼로그 분야 연구 논문들 전시 부스

ACC_R 다이얼로그 연구 논문들

ACC_R 다이얼로그에 참여한 연구자 5명의 연구 결과물은 한 부스에서 함께 소개되고 있다. 관람객들은 전시 벽에 설치된 작은 태블릿 PC를 통해서 각 연구자의 논문 내용을 살펴보고, 부스 중앙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연구 관련 책자들도 읽어볼 수 있다.

김소이의 「현대미술을 통해 본 몸에 대한 공포, 바이럴리티(virality), 페미니즘, 그리고 신식민주의」는 몸에 대한 공포를 재해석하는 현대미술 작품을 한데 모아서 보여준다. 그 작품들은 주로 성소수자와 유색인종 또는 비정상적인 몸을 혐오하는 문화에 주목하며, 그 혐오 문화의 뿌리인 신식민주의와 신자유주의적인 폭력의 역사를 비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에 관한 질문 방법으로서 그로테스크, 바이럴리티, 페미니즘이라는 시각의 유용성을 언급한다.

「전망과 은신처 이론을 적용한 치유적 공용공간 연구」(김순웅)는 코로나19 이후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건축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특히 밀집된 환경에서도 적절한 거리두기를 해야만 하는 도시 생활에서 전망과 은신처의 기능을 동시에 지닌 중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파리의 파사쥬와 카르티에 재단 그리고 일본의 기푸 아파트 사례 분석을 통해 현시점에서 어떻게 건축에 적용할 것인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나여랑의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필요한 예술적 방향성 제안을 위한 연구」는 1960년대부터 2020년까지 발표된 미술, 애니메이션, 영화, 연극 등 여러 예술작품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어떻게 그려졌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생태학을 비롯한 다양한 사상과 이론을 통해 그 예술작품들을 분석적으로 검토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연구자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고 한다.

이윤경의 연구 논문인 「팬데믹과 무덤 조성」은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전 지구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수많은 사망자의 처리가 커다란 사회 문제임을 인식시켜 준다. 그래서 연구자는 바이오필리아적인 시체 처리 방법과 관련된 기술 개발 및 새로운 장례 문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DNA를 함유한 유전체 보존 방법과 환경친화적인 무덤 조성을 통해 독특한 대안을 제시한다.

전재우는 「Peel Urbanism」을 통해 건물의 외벽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연구자의 주장에 따르면 건물의 외벽은 채광, 온도, 습도, 바람 등 여러 요구 사항에 의해 점점 더 두껍고 복잡해지고 있다. 연구자는 한 겹의 피부 같은 외벽이 아니라 양파 껍질(Peel)처럼 여러 겹으로 구성된 벽체를 상상한다. 이 벽체는 건물의 외부와 내부 사이에 다양한 경계 공간을 제공할 수 있는데, 이러한 새로운 구조에 대한 상상은 단일 건물에서 도시 전체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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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구엘 스바스티다(Miguel Sbastida) 「식용 지질학」 히말라야 소금

5주년 축하 특별섹션

이 밖에 ACC_R 레지던시 5주년 기념으로 특별 출연하는 외국 예술가의 작품도 전시되고 있다. 스페인 마드리드 출신의 미구엘 스바스티다(Miguel Sbastida)는 2019 ACC_R 레지던시 기간 동안 진행했던 프로젝트에서 완성한 「식용 지질학」을 선보인다. 계단식 좌대에는 다양한 형태의 히말라야 소금 덩어리들이 놓여 있다. 약 2500만 년 전에 생성된 이 암염들은 분홍빛을 띠는데, 이는 수백만 년 동안 생존하는 미생물이 합성한 붉은 색소 때문이다. 작가는 장구한 세월 속에 생성된 소금과 몸 안에 0.5kg의 소금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함께 바라보며 지구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 사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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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드 테이블

라운드 테이블

전시 외에 라운드 테이블 행사가 지난해 11월 27일 13시부터 19시까지 온·오프라인으로 동시에 진행되었다. 문화창조원 복합1관에 설치된 강당에서 열린 라운드 테이블에서는 「인류세: 인간 너머의 생존과 생성에 관하여」를 주제로 박범순 한국과학기술원 인류세 연구센터 소장이 특별 강연을 하였다. 이 강연에서 박 소장은 여러 사례를 보여주며 인류세로 규정되는 현시대의 상황을 인식하고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자연과 지속 가능한 공존을 모색해 나가자고 강조하였다. 이어서 레지던시 참여자들이 바이오필리아와 생명, 몸, 디스토피아, 팬데믹, 알고리즘을 소주제로 하여 각자의 작업과 연구 내용에 대해 자세히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ACC 유튜브 공식 채널에 접속해서 라운드 테이블을 생중계로 지켜본 시청자들은 발표한 예술인과 연구자 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라운드 테이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예술가, 디자이너, 연구자 들은 번잡한 세상사에서 조금 떨어져 고독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를 먼저 알아차리고 미래를 가늠하는 예민한 더듬이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들이 감지한 것들을 다듬어 펼쳐 놓은 2020 ACC_R 레지던시 결과전시회 [바이오필리아, 흙 한 줌의 우주]는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한 줌의 흙 속에 들어 있는 생명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코로나19로 움츠러든 이 시대를 뚫고 나갈 작은 상상력들을 선사한다.



  • 글. 백종옥 icezug@hanmail.net
    사진. 황인호 photoneverdie@naver.com
    ACC 제공

    20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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