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슬픔과 씨앗

ACC 국제 공동 창제작 시범공연 영상 상영회 [전쟁의 슬픔] & [슬픔과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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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슬픔] & [슬픔과 씨앗] 포스터

전쟁이란 역사책에 나오고 영화의 배경에서나 쓰이는 빛바랜 단어처럼 생각하고 살았다. 베트남 전쟁의 참혹함과 종전 후 남은 자들의 상처를 이야기하는 ‘바오 닌’의 「전쟁의 슬픔」을 원작으로 한국 극단 민들레와 덴마크 NTL(북유럽연극연구소)은 서로 다른 시각과 연극 언어로 두 개의 공연을 만들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관계자와 기자단 등을 관객으로 10월 30일과 10월 31일, 두 차례에 걸쳐 ACC 예술극장에서는 그 시범 공연 영상 상영회가 있었다. 보고 온 후 잔상처럼 남은 장면과 대사들 때문에 오래된 사진으로 기억하는 6·25전쟁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다시 떠올려 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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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극장 로비

소설 「전쟁의 슬픔」이 두 편의 국제 공동 창제작 공연으로 만들어지게 된 배경과 오디션, 연습 등의 제작과정은 앞서 ACC 웹진 10월호에서 소개한 바가 있다.



그래서 이번 호는 두 공연 영상을 보고 난 후 며칠이 지나도 쉽게 잊히지 않는 것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영상 상영 전에는 극단 민들레의 연출을 맡은 송인현과 NTL의 공동 연출을 맡은 이동일이 인사 및 공연 소개를 했고 덴마크와 화상 연결로 [슬픔과 씨앗]을 공동 연출한 카이 브레드홀트의 인사와 참여 배우들 소개가 있었다. 같은 원작을 각색해 만들었기에 연달아 보면 비슷한 점이 많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영상을 보고 나서 싹 잊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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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 화면 (좌)‘드라마 트루기’역 써스 방크 (우) 카이 브레드홀트 / 단상 (좌) 송인현, (우) 이동일

하나의 소설을 각색하여 만들어진 공연인 만큼 [전쟁의 슬픔]과 [슬픔과 씨앗]은 소설의 내용대로 종전 후 밀림에서 유해발굴을 하며 환영과 악몽에 시달리는 끼엔, 집착적으로 글을 쓰는 끼엔의 모습과 첫사랑 프엉의 끔찍한 사고로 인한 이별과 재회, 죽은 전우들과 남은 가족들의 슬픔, 살아남은 군인들이 겪는 아픔 등을 극에 담았다. 하지만 두 공연은 너무 다른 장면과 표현 방식을 보여준다. 동시대성과 아시아성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는 두 개의 공연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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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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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씨앗]

‘넌 너의 길을 가. 난 나의 길을 갈 테니까…….’



[전쟁의 슬픔] 공연 중 여러 번 들을 수 있는 프엉의 대사다. 프엉이 끼엔을 떠날 때 남긴 말이지만 여러 번 듣고 계속 떠올라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 부상병의 최후 등 남은 사람들의 상처가 끼엔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전쟁 후 남은 건 없어. 환영만 남았을 뿐이지’, ‘날마다 비가 와!’, ‘죽지 않았어!’ 병사들의 대사가 귓가를 맴돈다. 전쟁에서 승리를 안고 살아남아도 끼엔은 평안을 얻지 못했다. 글을 쓰면서 기억과 뒤섞인 환영들에 시달리는 끼엔. 기억을 모두 뽑아내 버리고 자유를 얻으려는 듯 집착적으로 글을 쓰는 배우의 행동이 처절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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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슬픔]에 담긴 5·18 정신은 무엇이고 치유되지 못한 영혼들을 어떻게 달래줄 것인가? 하는 물음에 극은 한국 전통의 굿을 이용하고 있다. 내가 살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죽여야 했던 전쟁 속, 끼엔은 수많은 영혼의 업을 둘러업듯 하얀 고를 모두 몸에 둘러매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으로 영상은 끝났다. 굿의 구조는 청신을 시작으로 영혼과 놀고 영혼을 달래 위로하고 치유해서 잘 보내는 해원으로 끝난다. 하지만 끼엔은 짊어진 고를 풀어 해원을 이루지 못한다. 영상이 끝나고 질의응답에서 5·18의 진상규명이 우리의 과제로 남았기에 고를 짊어진 끼엔과 동일시하여 현재를 투영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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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너의 길을 가. 나는 나의 길을 갈 테니까…….’라는 말은 자신의 짐까지 지우지 않으려는 프엉의 사랑일까, 두 번이나 그녀를 놓치고 마는 끼엔에 대한 원망일까. 어느 순간 ‘다 잊고 네 삶을 살라’는 충고를 가장한 위로처럼도 들렸다. 전쟁의 승자는 살아남은 사람이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모든 이들의 고를 무겁게 짊어지고 고통스럽게 글을 쓰는 끼엔은 승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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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주는 평화 그리고 희망을 담은 씨앗…….


NTL의 공연 [슬픔과 씨앗]은 작은 마을 광장의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된다.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사람들, 청소하는 이웃들, 짧은 그 장면이 극이 끝날 때까지 잔상처럼 남았다. 아마 ‘집에 가고 싶어’라는 외침이 귀에 남기 때문인 것 같다. 배우는 자신들의 무대가 전쟁과 항쟁이 일어나는 세상 어디라도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곧 무대는 새소리가 가득한 밀림으로 변하면서 바닥에는 엄청난 양의 해바라기 씨앗들이 뿌려진다. [슬픔과 씨앗]에서 가장 중요한 오브제는 씨앗이다. 씨앗은 극 중에서 다양한 것들을 대신한다. 소리를 만들어내고 정글의 진흙이 되었다가 기관총의 총알을 대신하고 몸을 씻는 물이 되기도 한다. 씨앗은 생명의 원천이자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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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화면 속에 씨앗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주는 묘한 긴장감, 흐느끼는 듯한 바이올린 선율, 집에 가고 싶다는 배우의 외침. 마치 망자와 산 자들이 동시에 절규하는 것만 같았다. 유린당하는 소녀는 ‘아무것도 내 세상을 바꿀 순 없어’라며 전쟁의 참혹함을 말한다.
극에는 데드 바디(Dead Body)를 연기하는 배우도 등장하고 서커스 그네를 타기도 하며 줄에 매달려 연기하는 다양한 움직임들을 보여준다. 바닥에 씨앗으로 그려진 태극기, 아리랑을 연주하고 애국가를 읊으며 5.18 관계자들의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슬픔과 씨앗]은 참여한 배우 모두가 작품을 분석한 후 의견을 나누었고, 무대에서 사용한 의상, 소리, 음악, 악기 등 모두 배우들이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지역공동체 초등학생들의 참여로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공연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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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엉이 당한 수치는 개인의 수치이자 국가의 수치로도 해석된다. 죽음과 수치에 저항하는 무기는 우리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뿐이므로 애국가가 등장했고 감옥에 갇혀서도 마지막까지 별을 생각하며 죽어간 윤동주의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고 한글로 쓴 글을 하늘로 띄워 올리는 퍼포먼스가 영상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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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씨앗]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담겨있어 어렵기도 했지만, 한국적인 것을 이해하고 사용하려 했던 배우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우리와는 다른 감성과 문화를 가진 그들이 깊은 성찰을 거쳐 사용한 것이라고 해도 태극기와 애국가를 사용한 장면에서는 한국인으로서 불편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요소들도 있었다. 공동 연출을 맡은 이동일은 그것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라고 말했고 질의응답을 통해 그들이 우리의 것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들의 시각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고 5·18 관계자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들의 정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시도라고 말했다. 전쟁의 폭력 속에서 발견한 희망을 씨앗이라고 생각했고 미래의 희망은 바로 초등학생들이므로 그들이 함께 참여한 무대를 꾸몄다는 설명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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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지속된 코로나19 상황과 사회적 거리두기 등 여러 이유로 두 개의 시범 공연은 무대가 아닌 영상으로 만들어져 상영되었다. 필름에 담긴 영상이라 무대 전체를 보고 싶을 때도 화면이 보여주는 대로만 봐야 하는 아쉬움은 다시 있을 본공연을 기약하게 한다. 상영이 끝나고 진행된 질의응답 시간은 두 극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유용한 시간이었다. 나와 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이 또 있었고 그 사람이 던진 질문의 답을 들어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전쟁에 승자는 없고 남은 것은 슬픔뿐이라는 소설, 그리고 만들어진 두 편의 연극. 두 개의 극은 공통적으로 치유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전쟁의 슬픔]은 아직 해결하지 못한 5.18이란 과제를 해결해야 치유가 될 것이라 말하고 [슬픔과 씨앗]은 씨앗을 빌려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극복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피지컬 스코어를 통해 표현된 극은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여운이 오래 남았다. 전쟁이 남긴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극복하고 치유해 나가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지만 완벽한 답을 주지는 않는다. 아마 관객 스스로 답을 찾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 글. 김옥수 mono755@daum.net
    사진. 극단민들레, NTL 제공

    20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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