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합리적인 인간을 닮은 로봇
미디어아티스트 박 얼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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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아티스트 박 얼
박 얼은 홍익대학교에서 디지털미디어디자인을 전공하고 인터랙션디자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디어아티스트그룹: 전파상’의 멤버로 여수엑스포 현대관 메인전시, 강남역 공공설치, 신세계백화점 본점 미디어파사드 등의 미디어아트 설치작업과 영종도 파라다이스 시티 등의 기획에 참여했다. 인천아트플랫폼, 금천예술공장, ACC의 입주작가로 활동했으며 다빈치 크리에이티브, 크리에이터스 프로젝트: 서울, ACC 개관전 등의 전시에 참여했다. 인간과 기계 간의 다양한 관계를 탐구하고 있으며, ‘기계적’ 그리고 ‘인간적’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관습적 한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경계를 확장하며 이율배반적으로 보이는 개념들과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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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닥 콩닥 콩닥 콩닥 콩닥 ……, 심장소리가 들린다. 작고 귀여운 녀석이다.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단추구멍 같은 두 눈으로 앞을 쳐다보고 있다. 녀석의 머리는 반구형이고 몸통은 직육면체이다. 그 몸통 아래로는 짧은 다리 4개가 앙증맞게 버티고 있다. 두 팔은 가늘고 길다. 왼팔로는 바닥을 짚은 채 오른팔을 뻗어 올리고 있다. 청진기처럼 생긴 오른팔은 바로 앞에 서 있는 관객의 가슴에 닿아 있다. 관객은 녀석의 오른팔을 잡고 콩닥거리는 심장소리에 귀 기울인다. 콩닥 콩닥 콩닥 콩닥……. 이 작고 귀여운 녀석은 <콩닥군 Mr. Kongdak>이다. 심장이 뛰는 로봇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관객의 심장소리를 들려주는 로봇이다. 접촉식 마이크가 붙어 있는 콩닥군의 손이 관객의 심장 부근에서 미세한 진동을 잡아내어 소리로 받아들인다. 이 작은 소리가 콩닥군의 몸통 안에 있는 전자장치를 통해 증폭되어 관객의 심장소리를 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콩닥군은 흔히 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소중한 생명의 상징인 심장소리를 들려주기 때문에 전시장에서 사람과 사람을 보다 친밀하게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이렇게 친근하고 따스한 느낌의 로봇을 만든 이는 미디어아티스트 박 얼이다. 그가 이런 작업을 하게 된 것은 전공과 관련이 깊다. 그는 대학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다양한 매체와 컴퓨터 프로그램들을 경험했다. 특히 인간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피지컬 컴퓨팅에 큰 매력을 느꼈다. 그리고 주로 움직임이 있는 작업(kinetic art)을 하면서 전자회로, 기계 설계, 프로그래밍 등의 기술을 익숙하게 다루게 되었다. 움직임이 있는 작업을 통해 그가 만들어내는 것들은 한마디로 '기계'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기계'란 '로봇을 포함해 움직이는 장치와 기술들'을 의미한다. 그는 기계들이 인간의 감각기관이나 신체의 기능을 확장하여 세상을 보다 새롭게 바라보도록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이 <미디어의 이해>에서 표방한 사상과 연관성이 있다. 마셜 매클루언은 인간이 만든 도구나 기술을 모두 매체(Medium)로 보고 그 매체들이 인간의 감각을 확장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다리의 확장, 문자는 눈의 확장, 옷은 피부의 확장 등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미디어아티스트 박 얼에게 기계는 가장 중요한 매체인 셈인데, 그가 자신만의 기계를 탐구하고 만들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기계와 인간의 융합과 공생이 시도되고 있는 이른바 '포스트 휴먼(post-human) 시대'에는 무엇보다도 기계가 인간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인간을 기계와 비교하면서 가장 큰 차이점으로 꼽은 것은 인간의 비합리성이다. 그런데 그가 만들어내는 기계인 로봇들은 다분히 '인간적'이다. 로봇의 행동이 지성이나 합리성보다도 감성과 비합리성이 강한 인간의 모습을 닮았다는 말이다. 앞에 소개한 심장소리를 들려주는 로봇 <콩닥군>도 이러한 고민 속에서 2011년에 제작된 것이다.
감성적인 인간을 닮은 로봇은 2016년작 <The Walking Man>에서 노동과 놀이를 하는 모습으로도 만들어졌다. 이 작품은 젠틀몬스터라는 기업의 의뢰로 제작되었다. 홍대 근처에 자리한 젠틀몬스터의 쇼룸에는 TV, 석고상, 서랍장 등의 여러 물건들이 쌓인 커다란 리어카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리어카의 손잡이 쪽에 알맞은 작품이 필요했던 것이다. 리어카는 인간이 물건을 운반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레이기 때문에 그 손잡이 쪽에 인간을 닮은 로봇을 설치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특히 리어카의 바퀴는 인간의 다리 같은 역할을 하니까 걷는 동작이 돋보이는 형상이 어울린다고 보았다. 그리고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인상을 주면서도 쇼룸의 성격에 맞게 경쾌한 느낌을 주고자 했다. 그래서 로봇이 반복적으로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종소리가 나면서 풍선이 상하로 오르내리며 흔들리도록 설계하였다. 크랭크(Crank)와 링크 메커니즘(Link Mechanism) 구조 그리고 모터로 이루어진 단순한 기계장치인 <The Walking Man>은 힘겨운 노동을 하면서 즐거운 놀이도 함께 추구하는 인간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젠틀몬스터의 쇼룸에서 선보인 후 아트다(Artda) 회사 광고를 촬영했던 카페와 ACC에서도 전시되었다.
미디어아티스트 박 얼이 추구하는 감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인간을 닮은 로봇은 2017년에 들어 더욱 독특한 형태로 진화했다. 일명 <신경쇠약 직전의 기계들> 시리즈가 그것이다. 인간도 아닌 기계가 신경쇠약에 걸리기 직전이라면 도대체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일까?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인 <자유로부터의 도피 Escape from Freedom>는 원형의 테이블과 작은 로봇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형의 테이블 중앙에는 원이 그려져 있는데, 그 가운데 투명한 반구형 몸체에 바퀴가 달린 로봇이 놓여 있다. 관람객이 테이블 가장자리를 누르면 기울어진 바닥면을 따라 로봇이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묘하게도 로봇은 원 밖으로 나오다가 멈칫거리며 뒤로 물러선다. 관람객이 테이블을 기울여 로봇을 원밖으로 나오도록 유도하지만 로봇은 작은 원 안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행동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 편안하게 느끼는 영역 밖으로 나가면 불안을 느끼고 움츠러드는 모습이나 전등을 껐는지 강박적으로 반복해서 확인하는 것처럼 '자동적인 부정적 사고'에 갇혀서 행동하는 모습과 닮았다. 이런 신경증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조금씩 지니고 있는 비합리적인 면이다. 그래서 작가는 로봇이 신경증에 걸리면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상상하였고 자연스럽게 알고리듬의 덫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로봇을 떠올렸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로봇이 원 밖으로 나가려다 신경증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다시 원 안으로 되돌아오도록 프로그래밍 하였다. 그리고 로봇의 불안한 심리를 보여주고자 작은 움직임에도 쉽게 흔들리는 구슬들을 센서 제작에 활용하였다. <신경쇠약 직전의 기계들: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단순한 논리회로에 따라 움직이며 경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로봇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인간의 비합리적 모습을 비유한다.
<신경쇠약 직전의 기계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은 <각인 Imprinting>(2017)이다. 이 작품은 둥근 형태의 울타리 안에서 로봇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중 카메라가 장착된 로봇이 특정한 로봇만 계속 따라다닌다는 점이 특징이다. 카메라를 가진 로봇을 적외선만 감지하도록 조작해서 하나의 로봇밖에 보이지 않도록 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로봇의 행동은 새끼 오리들이 집주인이나 다른 가축을 어미 오리로 착각하고 무작정 따라다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오스트리아의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는 갓 태어난 조류가 처음으로 본 움직이는 물체를 어미로 생각하고 뒤따르는 현상을 '각인'이라고 불렀다. 이는 인간이 어떤 대상에 강한 애착이나 집착을 갖게 되면 그 대상밖에 보지 못하거나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는 기계들이 알고리즘에 따라 행동하는 현상과도 비슷하다. <신경쇠약 직전의 기계들: 각인>은 강박적인 행동을 보이는 로봇의 움직임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면서 인간과 기계의 유사성과 차이점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로봇들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나무 울타리는 둥그스름하게 제작되었는데, 앞에서 설명한 작품 제목 <각인>과 관련이 있는 조류의 둥지 형태에서 착안한 것이다.
2018년 미디어아티스트 박 얼은 ACC 레지던스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레지던스 기간에 발전시킨 작업은 <The Walking Man>(2016)을 이은 <The Walking Man II>(2018)이다. 감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인간에게 외형적으로 다른 생물들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직립 보행을 한다는 점이다. 오랜 진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을 인간의 직립 보행, 즉 인간이 한 발을 내딛으면서 다른 한 발로 균형을 잡으며 안정적으로 걸어가는 행위는 단순해 보이지만 상당히 복잡한 메커니즘이 깔려 있다. 그는 <The Walking Man> 시리즈에서 단순한 원리로 움직이는 기계를 통해 인간의 동작 메커니즘을 실험하고자 했다. 그래서 다리의 움직임을 강조한 작품이 <The Walking Man>이었다면, 상체의 움직임까지 확대하여 제작한 작품이 <The Walking Man II>이다. 이 작품은 좌측 워킹맨과 우측 워킹맨으로 이루어져 있다. 흥미로운 점은 두 워킹맨이 각자 두 다리를 가지고 있지만 가운데 팔만은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워킹맨의 팔다리 움직임은 비슷한 리듬을 보여준다. 하지만 조금씩 다른 각도로 조립된 팔다리 때문에 두 워킹맨의 움직임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차이를 보인다. 이렇게 따로 또 같이 움직이는 두 워킹맨은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의존적인 '사람과 사람 사이', 문자 그대로 '인간(人間)'의 존재 방식을 되새겨보게 한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두 워킹맨의 가슴에 수직 방향으로 회전하는 띠가 좌측에 2개, 우측엔 1개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두 워킹맨을 로봇의 원형으로서 아담과 이브로 바라보게 만든다. 물론 작가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도록 작품의 의미를 열어 놓았기 때문에 보는 이에 따라 다른 이미지들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특징인 직립 보행을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구현한 <The Walking Man II>는 '인간다움'에 대한 인식의 경계를 사유하는 작품이다.
바야흐로 과학 기술의 발달로 로봇이 우리의 일상에 가까워지고 있다. 최근에 선보인 아시모(Asimo)나 아틀라스(Atlas) 같은 휴머노이드 로봇의 동작과 성능을 보면 머지않아 인간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대화하는 로봇이 등장할 것으로 예측된다. 한편으론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진 로봇들이 인간을 지배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든다. 하지만 위험성이 있더라도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로봇을 창조하려는 인간들의 욕망은 사그라들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시대일수록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야말로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본다. 미디어아티스트 박 얼은 자신만의 로봇 작업을 통해 그러한 질문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뇌과학, 신경과학, 인지심리학 등 인간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첨단 학문과 더불어 새로운 기술과 재료에 대한 관심은 그의 작업을 뒷받침해주는 것들이다. 현재 인천아트플랫폼 입주작가인 그는 기계와 유희에 관한 작업을 하고 있으며, 인공지능을 활용한 작업도 구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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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백종옥 icezug@hanmail.net
사진. 박 얼 ppiddulwanie@gmail.com
20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