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치유를 위한 디자인

그래픽 디자이너 계정권

레지던스

그래픽 디자이너 계정권

계정권은 광고대행사 대홍기획과 씨모어 쿼스트(Seymour Chwast)의 뉴욕 디자인 스튜디오 푸쉬핀(pushpin)과 보젤 뉴욕(Bozell New York) 등에서 그래픽 디자이너와 아트디렉터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 ’got milk?(우유 캠페인), 보잉 항공사, 펩시, 월트디즈니 등의 광고제작에 참여하였다. ADAA(Adobe Design Achievement Award)의 파이널리스트, 온타리오 예술재단(OAC)의 창작기금 수혜, TOAF(Toronto Outdoor Art Fair)의 설립자상 등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 시카고 미술관, 슈투트가르트 디자인센터, 영은미술관, 대구예술발전소, KT&G 상상마당, 쌈지 일루팝, 광주디자인비엔날레 등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보통 '그래픽 디자이너'라면 각종 홍보물 같은 것들을 목적에 맞게 디자인해주는 사람을 떠올리기 쉽다. 즉 자기만의 작품 세계를 추구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주문하는 사람이 원하는 바를 실용적으로 해결해주는 디자이너가 연상되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모든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픽 디자이너들 중에도 순수 미술가처럼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꾸준히 시각적인 작업으로 풀어내는 이들이 있다. 그런 작업들은 순수 미술과 다른 방식으로 예술과 시각 문화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계정권도 의뢰인을 위한 디자인 업무 외에 독특한 개인 작업을 추구해 온 그래픽 디자이너다. 성장 과정과 주요 작품들을 통해 그의 디자인 세계를 살펴보자.

그래픽 디자이너 계정권의 예술적 감성은 유년기부터 형성되었다. 어린 시절 국립교향악단의 단원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감성적으로 풍부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늘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음악, 연극, 발레, 오페라 등 갖가지 공연을 관람했던 그는 공연을 보고 온 다음날이면 집의 거실벽에 온통 공연과 관련된 그림을 그리곤 했다. 너그러운 아버지는 그림으로 가득찬 벽을 흰색 페인트로 칠한 다음 아들이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런 가정환경 덕분에 그는 늘 시각적인 것에 예민했고, 특히 세련된 느낌을 주는 그래픽 작업에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대학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였고, 졸업 후엔 광고 회사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게 되었다.

이미지 설명
뉴욕타임즈의 펜스테이션 캠페인과 마이클코스 캠페인용 이미지 작업들, 디지털 프린트, 1999


한국에서 광고 회사를 다니던 그는 1997년에 커뮤니케이션 디자인(Communications Design)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 당시에는 광고 회사에서 했던 일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협의하며 일하는 과정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미국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한국에 IMF 외환위기가 닥쳤다. 극심한 환율 변동 때문에 그 역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그 시기에 미국 광고회사 '보젤 뉴욕(Bozell New York)'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를 구한다는 공고가 떴는데, 그것을 보고 지원하여 합격했다. 묘하게도 다시 광고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보젤 뉴욕에서 그는 주로 지하철, 버스정류장 등의 옥외 광고물을 제작했다. 위의 사진은 그가 보젤 뉴욕에서 했던 작업들인데 뉴욕타임즈의 펜스테이션 캠페인(Penn Station Campaign)과 당시 신인 디자이너였던 마이클 코스의 뉴욕 매장 캠페인을 위한 디자인이다. 그는 광고주들의 의뢰를 받을 경우 가능하면 자신만의 시각이나 스타일을 내세우지 않고 광고주들과 협의한 내용을 최대한 완성도 높게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작업들은 미국적인 분위기와 다르게 유럽과 동양의 감성이 풍겨서 광고주들의 호평을 받았다.

이미지 설명
<B2A_24 DOTS>(좌), 디지털 프린트, 가변크기, 2013 / <B2A_02 DOTS>(중), 디지털 프린트, 가변크기, 2013 / <B2A_60 DOTS>(우), 디지털 프린트, 가변크기, 2008
이미지 설명
<B2A_LOVE PINK>(좌), <B2A_LOVE BLUE>(우), 디지털 프린트, 가변크기, 2013


광고주들의 의뢰를 받아 수행한 작업들 외에 그는 개인 작업도 꾸준히 해 왔는데, 개인 작업에서는 자신의 체험과 기억 그리고 삶의 치유와 구원 등을 주제로 다루었다. 자신의 체험과 기억에 기반한 작업은 캐나다 체류 시기에 시작하여 현재까지도 변화를 모색 중인 <B2A_DOTS> 연작이 대표적이다. <B2A_DOTS> 연작은 우연히 발견한 오래된 캐나다 이민자 카드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민자 카드에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구멍은 이민자들의 정보를 쉽게 분류하기 위한 표식이었다. 각 이민자 카드마다 조건에 따라 다른 위치에 구멍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민자 카드의 구멍 위치가 이민자의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점에 흥미를 느꼈고, 그 구멍들이 조형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릴 적 형과 함께 찍은 사진에 구멍처럼 보이는 원들을 배치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 원들은 어린 형제의 이미지를 대부분 뒤덮고 있어서 그들이 공유하던 유년의 기억이 점점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런 형식의 첫 작업인 <B2A_60 DOTS>는 2008년 토론토 야외미술전시회(Toronto Outdoor Art Fair)에서 설립자상(Founding Chairman’s Award)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2013년도부터는 루이비통의 모노그램(monogram)을 추억의 물건 이미지로 치환하여 어릴 적 사진 속에 배치하는 <B2A_LOVE> 연작도 시작하였다. 이렇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분류하여 다양한 패턴으로 시각화한 <B2A> 연작에는 'Between Two Attitudes'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행복했던 유년기에 대한 그리움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희미해지는 기억에 대한 양면적인 관조가 깔려 있다.

이미지 설명
<PATTERN.A_4M>(좌), 혼합매체, 500x460mm, 2017 / <PATTERN.A_L6M>(중), 혼합매체, 400x900mm, 2017 / <PATTERN.A_5M>(우), 혼합매체, 600x460mm, 2017
이미지 설명
<PATTERN.A_9MBK>, 혼합매체,150mmX460mm, 2017


<B2A> 연작은 평면적인 그래픽 작업에서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는 방향으로 확장되었다. 특히 'Between Two Attitudes'의 의미와 연결되는 바느질 작업인 <PATTERN.A>는 주목할 만하다. 계정권 디자이너가 바느질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2000년대 중반 캐나다에 거주하던 그는 집주인 아주머니를 따라 동네 커뮤니티센터의 퀼트(quilt) 모임에 다녔다. 그 시기에 점점 천이라는 재료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픽 작업에 주로 사용되는 종이는 구김이나 습기에 약해서 보관과 운반하기에 불편한 점이 많았는데, 그런 문제가 없는 천은 여러모로 편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종이 대신에 무명, 광목, 비단 등 다양한 천을 이용해 아트북, 포스터, 일러스트, 실크스크린, 디지털 프린트 등을 시도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바느질로 드로잉 같은 선(line) 작업을 하거나 입체 작업도 하였다. 그런 작업의 연장선에서 <PATTERN.A> 연작도 만들어졌다. 이 작품들은 어린 아이나 여성의 이미지가 있는 면과 없는 면을 바느질로 접합하여 양면성을 강조하는 4~5개의 입체적인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그가 양면성을 강조한 데에는 여러 생각이 깔려 있다. 개인적으로 그는 바느질 작업을 하면 마음이 평온해지곤 했다. 그것은 어쩌면 어린 시절 무서운 꿈을 꾸다가 새벽에 깼을 때 머리맡에서 바느질하는 할머니를 보고 다시 편안한 마음으로 잠들었던 기억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바느질에 대한 상반된 이미지가 혼재되어 있다. 바느질은 과거뿐 아니라 현재에도 가정, 봉제 공장, 수공예 등에서 주로 여성들이 하는 노동이다. 그런데 그 바느질이 어떤 여성에겐 즐거운 예술 행위일 수 있지만, 어떤 여성에겐 고된 일감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렇게 같은 바느질이라도 당사자가 처한 상황이나 행위의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띠게 된다. 그래서 그는 양면성을 강조하는 형태로 바느질 작업을 선보였다. 그리고 바느질은 상처를 봉합하는 의술 행위도 연상시키는데, 그런 바느질은 치유와 구원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바느질이 그에게 불안감을 잠재우는 치유의 행위라는 점과 상통한다. <PATTERN.A>는 바느질이 지닌 복합적인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연작이다.

이미지 설명
<淚_1/4>, 설치 그래픽 작업, 가변크기, 2018


계정권 디자이너의 개인 작업 중에는 <B2A>와 <PATTERN.A> 외에도 <淚> 연작이 있다. 이 연작은 '淚(루)'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눈물을 흘림으로써 정화(淨化)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작업을 하게 된 계기는 미아리의 점집들과 관련된 그래픽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그는 특별히 점을 보러 오는 사람들의 행동과 태도에 주목했다. 점집에 온 사람들은 하소연하며 눈물을 보이거나 감정에 복받쳐 울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성직자 앞에서 고해하는 신자나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받는 환자들처럼 보였다. 그리고 돌아갈 때 대부분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그들의 마음이 치유되고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눈물을 소재로 구원에 대한 그래픽 작업을 하였다. 작품 <淚_1/4>의 중간에는 울면서 두 손으로 연꽃을 들고 있는 어린 시절 자신의 이미지를 배치하고 미아리 점집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색상을 화면에 사용하였다. 옵-아트(Optical Art)처럼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반복적인 선들은 착시를 불러일으켜서 평면적인 이미지가 요철이 있는 이미지로 보이도록 만들뿐만 아니라 눈물을 흘리며 정화되는 어린 자아를 더욱 부각시켜준다. 이 작품은 2018년 서울 충무로의 오재미동 갤러리와 문래동의 아츠스테이 갤러리에서 전시되었는데, 전시장 벽면 전체에 같은 이미지들이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반복해서 설치된 점이 특징이다.

이미지 설명
스카프 이미지 2종과 결과물, 디지털 프린트, 실크, 900x900mm, 2019


2019년 하반기에 계정권 디자이너는 ACC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지난해 6월 그는 ACC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의미와 계승을 주제로 한 그래픽 패턴 작업과 상품 개발에 대해 협의했다. 하지만 5.18이라는 역사적인 무게 때문인지 작업을 시작하기가 부담스럽고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는 작업 기간의 절반을 5.18에 대한 광주 시민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 할애하였다. 양림동, 조선대 주변, 양동시장 등 여러 장소에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5.18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5.18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지만, 광주를 5.18의 도시로만 생각하는 것에 거부감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고, 광주를 보다 역동적이고 미래 지향적으로 바라보려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차츰 작업 방향이 잡혔다. 5.18에 대한 광주 시민들의 강한 자부심과 현재의 광주가 품고 있는 역동적인 생명력을 표현하는 쪽으로 초점이 모아진 것이다. 그리고 5.18의 의미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닭을 선택하였다. 새벽을 알리는 닭은 전통적으로 귀신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들이는 길조로 인식되기 때문이었다. 이는 치유, 구원의 의미와 통했다. 이러한 닭의 역할에 주목하고 조선후기 민화의 닭그림과 한글의 형태적 시스템을 참고해 닭 캐릭터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21세기 광주가 품고 있는 생생한 감정과 욕망을 표현하기 위하여 광주 도심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 1780장을 촬영한 후 기나긴 작업 끝에 광주의 색 47개를 추출하였다. 이 47개의 색은 2019년 여름 광주 도심의 건물과 간판 그리고 시민들의 의상 등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 것이다. 그중 최종적으로 8개의 색을 선정하여 스카프 2종과 패브릭 포스터 5종의 그래픽 작업에 적용하였다. 실크 소재의 스카프는 아르헨티나 5월 어머니회의 흰 스카프와 우리나라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어머니들의 보라색 스카프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하였다. 그리고 패브릭 포스터는 피를 흘리는 큰 닭 이미지 1개와 문자도(文字圖) 형식의 이미지 4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이 문자도에는 '빛을 불러 어둠을 물리친다'는 의미의 검은색 한자 呼(호), 光(광), 逐(축), 暗(암)과 피를 흘리는 붉은 닭 이미지가 조합되어 있다. 이 작업의 실물 스카프와 패브릭 포스터는 지난해 가을 ACC에 전시되었고, 2020년 2월에 최종 결과물로 나왔다.

이미지 설명
패브릭 포스터: <3days & 10light>(좌), <逐>(우), 디지털 프린트, 광목, 400x600mm, 2019


계정권 디자이너는 올해 들어 햄릿을 그래픽 작업으로 풀어보려고 계획했다. 그런데 코로나 19가 유행하면서부터 작업에 손이 가질 않는다고 한다. 종잡을 수 없고 갈수록 불안, 공포, 의심을 전염시키는 햄릿의 이미지와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는 현실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작업이 잘 풀리지 않거나 창작을 위한 자극이 필요할 때면 그는 옛 골목길과 전통시장 등을 걷거나 작업실을 청소한다. 걸으면서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작업실을 정돈하다 보면 복잡한 생각들이 정리되기 때문이다. 특히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하나의 의식을 행하듯 작업실을 더욱 깨끗이 청소한다. 그는 앞으로 햄릿뿐만 아니라 '환경과 인간의 삶'에 대한 작업들도 해 보려고 한다. 이런 작업들도 걷기와 청소라는 사색과 숙성의 시간을 거치면서 진면목을 드러낼 듯하다.



  • 글. 백종옥 icezug@hanmail.net
    사진. 계정권 neoplasmo@hanmail.net.

    2020.06

 

공감 링크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