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날다, 광주에서
보이는 것 너머 더 큰 세상과 만나는 시간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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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 너머 마음이 들여다보는 것
시각예술이라 칭해지는 미술, 보는 행위가 가해짐으로써 비로소 인지되는 예술이라는 의미일까. 볼 수 없다면 우리는 미술을 느낄 수 없고, 행해볼 수 없는 것일까? 미술의 가장 근본적인 핵심 요소인 ‘시각’에 관한 편견을 송두리째 바꿔주는 전시, <코끼리 날다, 광주에서>展에는 시각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직접 코끼리를 만나고 코끼리를 오감으로 체화(體化)하며 형상화해낸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보이는 것 너머 오감으로 사물을 만난 마음이 만들어낸 미술이 무언지 보여준다.
보이지 않음으로 더 많이 볼 수 있는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볼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세상의 외형을 설명할 수 있을까. 캄캄한 밤 고요하게 모든 일상이 침잠되면 낮에는 들리지 않았던 시계바늘의 미세한 움직임 소리도, 위이잉 돌아가는 보일러 소리도, 종이의 바스락거림도 예민하게 들려온다. 또 컴컴한 어둠 사이로 미세하게 존재를 드러내는 빛은 희미하지만 분명 제 존재를 증명한다. 보이지 않음으로 온 몸의 감각이 예민해지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전시를 보며 영국 작가 존 에버릿 밀레이의 그림 <두 소녀>가 떠올랐다. 막 비가 개인 듯 무지개가 떠 있고 자매로 보이는 두 소녀가 앉아 있는 그림이다. 그 중 언니로 보이는 소녀는 앞이 보이지 않는 모양새다. 동생은 일곱 색깔 찬란한 무지개에 눈길이 홀딱 사로잡혔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언니는 온 몸의 감각으로 비가 개인 후의 영롱함을 인식한다. 물방울이 채 마르지 않은 작은 풀의 촉촉한 잎사귀를 만지는 손, 빗줄기에 사라진 먼지로 상쾌하고 맑은 공기를 들이키는 코와 피부의 작은 세포들. 무지개의 찬란한 일곱 빛깔을 넘어 자연이 주는 찰나의 선물을 만끽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소녀의 모습이 꽤나 인상적인 그림이다. 보이는 것 뒤로 우리가 인지하고 인식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 그 많은 것들을 우리는 ‘보는 행위’로 다 무심결에 삼켜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시각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만든 코끼리 조형물들을 보며 밀레이의 그림 속 두 자매의 모습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교차되었다.
아이들의 생각 안으로 들어온 코끼리
전시장을 들어서면 입구 가까이 아이들이 손수 하나하나 만든 작은 코끼리 조형물들이 놓여있다. 코끼리 모양의 다양한 형상들이지만, 제목들을 보는 순간 뭉클함이 밀려온다. <주저앉은 코끼리>, <대답하는 코끼리>, <기분 좋은 날> 등 아이들은 마음으로 만난 코끼리의 존재를 인식하고 형상화 했다. 코끼리의 주름진 울퉁불퉁한 피부, 먹이를 주고 가까이에서 만져보며 맡은 체취와 여운은 생명을 가진 한 존재로서 살아가는 코끼리를 생각하며 만들게 했다.
코끼리를 그린 그림도 마찬가지, <세월의 흔적을 담은 코끼리 발바닥>, <아기 코끼리를 바라보는 유모 코끼리>,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코끼리> 등 아이들의 상상 속 코끼리는 오감과 만나고 형상화되면서 다시 코끼리를,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한다.
세상을 보는 편견을 무너뜨리다
시각장애 어린이들과 아티스트가 만나 만들어낸 이 프로젝트는 ‘본다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미술은 더 많은 것들을 보게 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아이들이 직접 태국으로 날아가 지상에서 제일 큰 동물인 코끼리들을 만났다. 인간에 의해 사용되고 상처 입은 코끼리들을 치료하고 보호하는 곳이다. 전시장 안쪽에는 프로그램의 영상(EBS 학교의 고백 8부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이 상영된다. 시각장애 아이들이 코끼리를 만나고 작품을 창작해가는 과정들을 볼 수 있다. 아이들은 코끼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감으로 ‘만나고’ 있다. 보이지 않기에 가늠할 수 없는 두려움이 존재하지만 아이들이 가진 ‘용기’는 코끼리를 만지고 느끼며 지상에서 가장 큰 동물과 자연스레 부대낄 수 있게 한다. 보이지 않음을 넘어 존재의 본질에 다가가며 표현해가는 코끼리. 아이들이 표현한 코끼리가 더 특별함을 장착한 것은, 볼 수 있는 우리들에게는 볼 수 없는(느낄 수 없는) 무수한 새로운 발견이 존재함 덕분이 아닐까. 외형을 넘어 대상의 본질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현대미술과 자연스레 연결이 된다. 우리는 볼 수 있기에 잘 볼 수 없는 것들을, 그들은 ‘볼 수 없기에’ 더 깊고 가까이 다가간다. 아이들의 순수한 창의력과 상상력은 더없이 무한하고, 당연시 존재했던 편견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아이들의 개별 작품들과 아티스트와 협업하여 만든 대형 조형물들은 거대한 코끼리만큼이나 거대하게 마음을 움직인다.
편견을 버리고 새롭게 세상과 만나는 눈
전시장 한쪽 코끼리를 그려볼 수 있는 체험공간이 있다. 우리는 과연 ‘새롭게 바라본 코끼리’, 나만의 코끼리‘를 그려볼 수 있을까. 볼 수 없기에, 정의되어 있지 않았기에 시각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더 큰 상상력으로 형상화된 코끼리들. 그저 지상에서 가장 거대한 동물 코끼리가 아닌 또 다른 생명체로 삶의 시간들을 안고 가는 한 존재인 코끼리를 만나고 그려가는 것이 우리에게도 가능할까. 묘하게도 상상력의 상(像)은 인간과 코끼리가 조합된 문자이다. 인간의 크기를 훌쩍 뛰어넘어 보지 않고서는 가늠하기 어려운 코끼리이기에 상상이란 의미를 품고 있는 건 아닐까. 상상은 새로운 코끼리를 끝없이 만나게 한다. 편견을 버리고 새롭게 세상과 만나는 눈, ‘새롭게 본 코끼리’와 ‘나만의 코끼리’는 그 시작이 될 것이다.
- 글. 문희영 moonhy19@naver.com
- 사진. 황인호 photoneverdi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