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시간을 칠하는 사람>

재현될 수 없는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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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상연될 수 없습니다. 시간은 현실입니다.
현실인 시간은 연기될 수 없습니다.”
(<관객모독>, 페터 한트케, 민음사, 2012, p. 51)



여기서 ‘시간(현실)’은 객석과 분리된 무대 위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아우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간을 칠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시간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다만 돌이키려는 시도, 지금 이 순간을 붙잡으려는 노력, 과거를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채색하기 위한 우리의 행동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연극 「시간을 칠하는 사람」은 시간에 대한 예술의 불가능한 응시입니다. “과거를 실제로 보는 것처럼 재현하지 말 것.”(「연출의 변」) 따라서 이 연극은, 5.18 당시의 전남도청의 상황을 재현하기보다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극장1’이라는 거대한 공간 안에서 관객이 그것을 경험하게 합니다. 관객은 역사적 사실로서의 5.18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인간에 해당하는 칠장이 김영식의 기억 속을 배회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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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은 총 네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영식의 기억의 조각들을 따라갑니다. 그것은 순차적으로 정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관객은 영식에게 벌어진 사건의 앞뒤를 배열하는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관객은 더 이상 수동적인 관람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참여자가 됩니다. 관객은 아들의 죽음 앞에서 오열하는 영식을 멀리서 ‘보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며, 회전하는 객석을 멈추려는 배우의 개입을 통해 그러한 시선마저도 저지당할 수 있는 자신의 불완전한 위치를 확인합니다. “텅 빈 복도. 어두운 복도. 무거운 회색 복도. 시멘트 건물, 벗겨진 페인트 그 둘의 냄새. 이 회색복도에서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정말로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들은 다른 이야기를 해줄지도 모른다. 이제까지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를 말이다. 밖을 보았다. 비가 다시 올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다가 도청을 나왔다.”(「 그럼 무얼 부르지」, 박솔뫼, 자음과모음, 2014, p.15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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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불완전성이야말로 관객이 배우의 육체적 현존을 경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극중에서 아들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억압하기 위해 영식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오로지 객석의 이동경로를 방해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때 객석을 멈추려는 영식의 의지는 배우의 연기가 아닌 그의 몸을 통해서 관객에게 전달됩니다. 물론, 관객은 배우가 자신의 시야를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이를 통해 암시되는 비극적인 결말은, 그들로 하여금 ‘관객’이라는 역할마저도 잊은 채, 지금 눈앞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배우에게 동화되게 합니다. 즉, 연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관객은 (극중 김영식의 역할을 맡은)배우 유동현의 육체와 연결되어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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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는 조용했고 큰 소리로 무언가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다만 내 앞으로는 몇 개의 장막이 쳐져 있고 나는 그 앞으로 직선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 그것만은 확실하다는 이야기다. 나는 3년 정도의 시간은 하나로 볼 수 있으며 3년 전은 3년 후의 시선으로 볼 수 있으며 그러므로 나는 모든 시제를 지울 수 있으며 그렇게 볼 수 있는 시간들은 점점 늘어나지만 나의 시선은 김남주가 이야기한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에는 가닿지 않는다는 말인데 이건 좀 신기할 수도 있지만 실은 당연한 이야기다. 확실한 이야기이다. 어떤 같은 밤들이 자꾸만 포개지는 나의 시간 속에서도 말이다. 몇 번의 5월의 밤이 포개지는 나의 시간 속에서도 말이다.” (같은 책, p.167)

후반부에는 거대한 주름처럼 흘러내리는 장막 위에 영식의 아들이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칠장이인 아버지와는 달리 그래피티* 아티스트입니다. 하지만 그의 스프레이통은 페인트가 없이 텅 비어 있으며, 따라서 관객은 영식의 아들이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장막에 그려진 그림을 보지 못하는 관객은 또한, 보이지 않는 장막 너머를 단지 상상할 수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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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제가 본 연극 「시간을 칠하는 사람」은 5.18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재현의 측면에서만 다루고 있지 않았습니다. 무대와 객석은 분명 구분되지만, 이동식 객석과 배우의 개입은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완고한 경계면에 종종 구멍을 냅니다. 이 빈 공간을 통해서 저는 배우의 육체적 현존을 경험했으며, 지금 제 눈앞에 보이지 않는 그림이 실은 시간이라는 것을, 과거-현재-미래로 분할할 수 없는 단일한 표면, 하지만 분명 어떤 깊이를 간직한 일종의 주름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니,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칠해질 수 없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무늬였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길거리 여기저기 벽면에 낙서처럼 그리거나 페인트를 분무기로 내뿜어서 그리는 그림



  • . 황충일 enamoramient@naver.com
  • 사진. AC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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