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인 : 현대조각과 공예 사이

호모 파베르, 현대미술을 창조하다

이슈&뷰

오늘날 ‘현대미술’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릴까? 좀 썰렁해보이는 아카이브와 영상을 적당히 버무린 개념적인 작품이나 첨단 기기를 활용해 화려한 시각 효과를 내세우는 미디어아트를 떠올리지 않을까?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첨단 기기를 이용하는 예술가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고, 인공지능(AI) 기술의 출현으로 예술의 미래에 대해 예측하는 말들이 많은 요즘이다. 정말 인간 대신 로봇이나 컴퓨터가 예술을 하는 세상이 올까? 과학기술의 발달은 분명히 미술의 양태를 바꾸고 있다. 하지만 선사시대에 간단한 도구를 이용하여 동굴 벽화를 그리거나 조각상을 만들던 인류는 디지털기기를 사용하는 현대에도 여전히 손을 움직여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고 있다. 아무리 편리한 기계들이 많아진다고 해도 작은 연장을 손에 쥐고 직접 무언가를 만들고 표현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다. 인류가 손으로 이용할 만한 도구를 만들기 시작한 시기는 수백만 년 전인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게 보면 ‘인간의 특성은 도구를 제작하고 사용하는 데에 있다’고 정의할 만하다. 이런 관점이 바로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이 말한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의 인간)’, 즉 ‘공작인(工作人)’이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생각하는 인간)’와는 대조적인 인간관인 셈이다.

ACC에서 전시 중인 <공작인 : 현대조각과 공예 사이>는 현대미술에서 호모 파베르의 흐름을 부각시킨다. 온갖 첨단 기기의 사용이 일상화된 현실에도 불구하고 장인적인 수작업을 앞세우는 현대미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라틴어 호모 파베르(Homo faber)에서 유래한 ‘공작인(Man the maker)’은 주로 공예나 디자인 분야에서 사용된 단어였는데, 그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공예품이 장인들의 집약적인 노동을 바탕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20세기에 들어서 회화와 조각을 비롯한 현대미술은 ‘육체노동’보다 ‘사상과 개념’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반상업적 미술운동인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와 1970~80년대 페미니즘 미술 그리고 다양한 동시대미술에서 새로운 재료의 탐구와 공예적 요소들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런 맥락을 바탕으로 <공작인 : 현대조각과 공예 사이>에서는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전개된 현대조각의 흐름 가운데 공예적 재료와 기법을 이용하는 작품들을 초청하여 그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7개국 작가 14명이 참여한 이 전시회에서 관객들은 조각과 공예 그리고 설치미술의 특성이 섞이면서 빚어진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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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서도호 <서울 집/ 서울 집/ 가나자와 집/ 베이징 집> 2012, 실크, 스테인레스강 관, 1460.5x723.9x397.5cm

우선 첫 번째 전시장에 들어서면 공중에 설치된 구조물이 보인다. 은은하게 빛이 투과되면서 하늘거리는 천으로 만들어진 집들이다. 이는 서도호 작가가 거주했던 집들인데 3D 모델링, 매핑 기술, 한국의 전통 바느질 기법 등을 이용해 복원한 것이다. 그 집들은 작가의 정신적 에너지가 담겨 있는 곳이고, 개인적인 기억과 정서가 녹아 있는 공간이다. 집은 보통 딱딱한 재료로 만들어지지만 서도호가 복원해 놓은 집은 얇고 가벼운 천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어디든 쉽게 가져가서 설치할 수가 있다. 한마디로 ‘이동 가능한 집’이다. 이렇게 천으로 만든 건축 조각 작품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서도호 작가는 인간과 거주공간이 형성하는 관계와 상호작용에 관심이 많고, 이미 세계화된 현대사회에서 집과 정체성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리고 사람들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문화, 전통, 이주 등의 문제가 어떻게 얽히는지 고민한다.(사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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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솝힙 피치, <고난> 2018, 대나무, 목재, 금속, 유성 물감, 먹물, 전체 크기 241 x 447 x 518 cm, 유선형 부분 폭 258.5cm

서도호 작가의 공중 설치작품을 지나가면 캄보디아 출신의 솝힙 피치(Sopheap PICH)가 제작한 독특한 형태의 작품 <고난>이 바닥에 놓여 있다. 작품을 보는 순간 넓은 이파리와 나뭇가지 또는 가오리 같은 해양 생물이 연상된다. 이런 형태는 작가의 관심사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주로 신체기관이나 식물의 형태에서 영감을 받아 이를 추상적인 조각으로 제작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수많은 대나무들로 엮여 있는데, 잘 엮인 대나무들이 만들어내는 곡선들은 작품에 생명력을 넘치게 한다. 그가 애용하는 재료는 대나무, 라탄, 삼베, 밀랍, 흙안료 같은 자연적인 것들로 모두 캄보디아에서 구한 재료라고 한다. 솝힙 피치가 다루는 캄보디아의 재료뿐만 아니라 식물, 신체기관에서 비롯된 형태들은 작가의 유년시절의 경험과 연관성이 있다. 1970년대 후반 캄보디아에서 발생한 집단학살 사건을 겪은 작가는 시간, 몸, 기억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작품 제목 <고난>은 그런 배경을 암시하는 듯하다. (사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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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류웨이 <커다란 개> 2010 -2017, 소가죽, 나무, 강철, 가변크기

첫 번째 전시장에서 눈길을 끄는 또 하나의 작품은 류웨이(LIU Wei)의 <커다란 개>다. 첨탑처럼 높이 솟은 건물 아래로 기울어진 도시의 일부가 펼쳐져 있다. 강력한 파괴가 일어난 뒤에 정적이 흐르는 분위기이다. 어쩌면 지진으로 폐허가 된 도시의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폐허처럼 너덜거리는 느낌은 소가죽이라는 독특한 재료 때문에 형성되는 듯하다. 빳빳하게 굳은 소가죽은 작은 조각들로 이어져 있는데, 전체적으로 불규칙한 표면과 형태의 윤곽을 만들어내면서 불안한 이미지를 증폭시킨다. 그리고 내부가 텅 빈 소가죽 조형물은 공사현장에서 쓰이는 철 구조물과 나무막대기들에 의지해 세워져 있어서 더욱 불안해 보인다. 베이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류웨이는 이런 디스토피아(dystopia)적 풍경으로 21세기 중국사회가 지닌 불안정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은유한다.(사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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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인슈전 <무기>, 2003-2007, 헌옷, 칼, 일상용품, 가변 크기

류웨이 작품 옆으로 공중에 설치된 인슈전(YIN Xiuzhen)의 작품 역시 매우 특별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하늘을 날으는 로켓탄 같기도 하고, 앞쪽에 날카로운 칼이 붙어 있어서 날으는 창 같기도 하다. <무기>라는 제목은 이러한 추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이렇게 위협적인 무기들의 몸체를 살펴보면 딱딱한 재료가 아니라 따뜻한 질감의 헌옷으로 덮여 있다. <무기>라는 제목과 헌옷이라는 재료의 이질적인 조합은 관객에게 감각적인 혼란을 던져준다. 무기들은 서로 경쟁을 하듯 앞으로 날아가는 모양새다. 일상적 소재인 헌옷을 입고 날카로운 칼을 장착한 무기들은 생존하기 위해 앞다투어 뛰어가는 개인들을 암시하는 듯하다. 중국 작가 인슈전은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발견되는 불안감과 위험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사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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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클라우디아 비서, 무제, 2017, MDF 판에 구리, 도자기, 스테인리스강, 96.8cm x 248.4 x 140 cm

두 번째 전시장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독일 작가 클라우디아 비서(Claudia WIESER)의 작품이다. 벽을 꽉 채운 벽지를 배경으로 중앙에 주방용품 같은 테이블이 놓여 있는데, 테이블 측면은 채색된 타일로 장식되어 있고 윗면은 스테인레스로 덮여 있다. 그리고 그 테이블 위에 길쭉한 화병 형태의 목재 조각상 8개가 간격을 두고 세워져 있다. 흑백 이미지가 많은 배경의 색조는 단조로운 편이지만, 중앙의 테이블과 그 위의 나무조각상들은 보다 다양한 색채로 되어 있어서 대조를 이룬다. 이런 분위기는 무대세트의 형식과 유사하다. 그의 작품을 전체적으로 지배하는 특징은 기하학적인 추상성이다. 이는 칸딘스키와 파을 클레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고, 한편으로 바우하우스의 실내 디자인과도 연관성이 있다.(사진5)

이밖에도 전통적인 공예품 속에 베트남 공산주의 문제를 은근히 드러내는 부이콩칸(BÙI Công Khánh), 정원의 요정들을 추상적인 조각으로 보여주는 토마스 슈테(Thomas SCHÜTTE), 바구니 공예용 재료로 여인상을 제작한 팔로마 파르가 바이스(Paloma VARGA WEISZ), 다채로운 이미지가 가득한 벽지와 기묘하게 의인화된 조각들을 함께 배치한 양혜규의 공간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렇게 다양한 작품들을 보고 나서 떠오른 것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단어였다. 각 작가는 일견 진부하게 보일 수도 있는 전통적인 공예 기법을 작품에 이용하였지만, 공예와 조각의 형식적인 조합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지역과 세계화 그리고 정치사회적 문제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예술의 언어로 해석함으로써, 그들의 작품을 새로운 통찰이 번득이는 현대미술로 승화시켰다. 이 전시회는 관람객들에게 공예와 조각의 지평을 확장시켜주면서 동시에 현대미술에서 전통적인 장르나 매체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환기시켜 준다. 그리고 호모 파베르가 펼치는 예술 행위가 미래에도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는 예감을 선사한다.

  • . 백종옥 icezug@hanmail.net
  • 사진. AC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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