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휴공간에서 피어나는 공공예술

독립기획자 이경미

레지던스

이경미 독립기획자

약 9년간 서울 소재의 사립미술관에서 동시대 시각예술과 디자인, 건축 관련 전시를 기획 및 진행한 후, 2016년 독립기획자로 전향하여 도시적 삶 안에서 장소와 개인에 대한 사유를 기반으로 한 프로젝트를 예술가들과 기획•협업하고 있다. 2017년 공공예술 프로젝트 <만아츠 만액츠 10000 ARTS 10000 ACTS>를 결성하여 도시의 유휴공간을 무대로 예술의 사회적 참여와 역할을 고민하는 한편, 2019년 성남 원도심과 장안평을 오가며 1970년 전후 기획된 도시 안의 장소들에 담긴 개인들의 삶을 리서치하고 장소 특정적인 예술프로젝트로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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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러한 현실을 특정한 개념의 언어로 규정하는 순간에도 현실은 계속 변해간다. 그래서 언어는 변화하는 현실을 오롯이 담아내는 데 한계가 있다. 이것은 ‘미술’이라는 현실에도 해당된다. 20세기에 들어서 예술가들은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미술에 대한 고정 관념을 무너뜨리고 예술에 대한 인식과 상상의 지평을 넓혀 왔다. 그중에서도 공공미술은 미술의 감상 영역을 미술관에서 공공 장소로 확장시키는 역할을 했다. 기념비, 벽화, 조각상 같은 것들이 공공 장소를 장식하는 문화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현대적인 의미의 공공미술 개념과 제도적 틀은 196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생겨났다. 그 후 서구에서는 단순히 공공 장소에 설치되던 미술작품들 외에 장소의 의미와 맥락 그리고 주변 환경을 고려한 다양한 미술작품들이 늘어났다. 나아가 1990년대부터 공공미술은 지역사회의 문제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새로운 공공미술을 시도한 예술가들은 영구적인 작품을 설치하기보다 지역 주민들을 만나면서 소통하는 ‘과정’을 중시했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 중반부터 이러한 새로운 공공미술에 관심을 가진 일군의 예술가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제도적 한계 속에서도 공공미술에 대한 다양한 담론을 생산했다. 지금도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공공미술은 여러 형태로 진화 중인데, 그러한 현상은 ‘커뮤니티 아트’, ‘공동체 예술’, ‘뉴장르 퍼블릭아트’, ‘공공예술’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명칭의 다양성처럼 이제 새로운 공공미술의 현장에서는 단순히 미술뿐만 아니라 여러 장르의 예술이 결합되면서, 기존의 개념으로 분류할 수 없는 예술 행위들이 펼쳐지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이 글에서 새로운 공공미술을 편의상 ‘공공예술’로 통칭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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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1) 만아츠 만액츠-서울숲길 프로젝트 - 젤리장 <내가 발견하는 성수> 워크숍 (2회) 2017.09.1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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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2) 만아츠 만액츠-서울숲길 프로젝트 - 젤리장<we need="" to="" talk="" about="" here=""> 2017, 카드보드, 스티커 등, 너비 80cm 높이 100cm</we>

ACC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이경미는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독립기획자다. 그는 미술대학에서 예술학을 전공한 후 서울에 있는 사립미술관에서 9년 동안 큐레이터로 일했다. 그 시기에 많은 전시회를 꾸리면서 탄탄한 기획력을 길렀다.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2016년부터 그는 독립기획자로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주를 이루는 백색의 미술관을 벗어나자 훨씬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예술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공공예술의 현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공공예술 프로젝트에 매력을 느낀 독립기획자 이경미는 동료 큐레이터 2명(신윤선, 원영주)과 함께 ‘만아츠 만액츠(10000 ARTS 10000 ACTS)’라는 기획팀을 결성하였다. 만 개의 예술과 만 개의 행동을 뜻하는 팀명은 다양한 공공예술을 통해 사회적으로 수많은 긍정적인 행동이 유발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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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3) 만아츠 만액츠-서울숲길 프로젝트 - 노순천 <두 얼굴> 2017, 철, 알루미늄, 각 170x10x190cm

만아츠 만액츠의 초기 활동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공공예술 프로젝트는 <서울숲길>이다. (주)유쾌한이 주최하고 만아츠 만액츠가 기획하고 주관한 이 프로젝트는 2017년 9월부터 2018년 10월까지 성수동의 서울숲길에서 진행되었다. 서울숲길은 한강변에 넓게 자리잡은 서울숲 주변의 도로와 골목길들을 가리키는데, 서울숲길 지역은 오래된 주택이나 공장 그리고 최근에 생긴 문화공간, 카페, 작업실, 벤처기업 등이 공존하는 곳이다. 만아츠 만액츠는 이 지역에서 5명의 작가들(김윤덕, 노순천, 정크하우스, 엄아롱, 젤리장)과 함께 다양한 공공예술을 시도했다. 그들은 서울숲길 지역에서 서울시민과 성수동 주민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사회적 문제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주민들과 소통하고 그러한 문제들을 예술로 공론화하였다. 예를 들어 도시디자인 관점을 중요시하는 젤리장 작가는 두 차례의 워크숍을 통해 서울숲길 일대의 골목을 주민들과 함께 탐방하며 주민들이 스스로 지역의 긍정적, 부정적 요소들을 발견하고 여러 제안을 하도록 유도했다. 그런 다음 다양한 주민들의 시각을 공유하는 캠페인성 지시판을 제작하여 거리 곳곳에 설치하였다(사진1-1, 1-2). 또 노순천 작가는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노인정 건물 위에 가느다란 철사로 제작한 <두 얼굴>이라는 작품을 설치하였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는 형태는 주민과 예술가뿐만이 아니라 서로 낯선 타인들이 함께 대화하며 공존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사진1-3). 이경미 기획자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 주민들과 소통하며 지역의 문제를 발굴할 것인지, 또 예술가들이 그 속에서 어떻게 매개자 역할을 해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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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1) 옥수역 고가 아래 공공예술 PLAYFUL - 정크하우스 <fun ground=""> 2018, PVC 공, 와이어, 혼합가변설치</f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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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2) 옥수역 고가 아래 공공예술 PLAYFUL - 엄아롱 <움직이는 고가> 2018, 철파이프 외 구조물 3점 설치

<서울숲길> 프로젝트에 이어 만아츠 만액츠는 도시의 유휴공간을 활용한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다. 2018년 10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된 <옥수역 고가 아래 PLAYFUL>이 그것이다. 고가도로 아래 공터는 용도가 불분명한 대표적인 유휴공간인데, 만아츠 만액츠의 자료에 따르면 서울시에는 여의도 면적의 50%에 해당하는 180여곳이 있고, 그중 약 10%만 주차장이나 창고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고가도로 아래 공간들은 소음이 많고 어두워서 대체로 좋은 이미지를 주지 못한다. 지하철이 지나가는 옥수역 고가도로 아래에 있는 텅 빈 광장도 소음 때문에 편안한 곳은 아니었지만 평소에 인근 주택가의 주민들이 휴식을 취하며 큰 소리로 대화를 하거나 운동을 하는 장소였다. 그래서 만아츠 만액츠는 고가도로 아래 광장을 ‘플레이플(PLAYFUL)’의 의미처럼 휴식과 치유 그리고 즐거운 놀이의 공간으로 만들자고 생각하였다. 이경미는 이 프로젝트에서 공동 큐레이터를 맡아 정크하우스, 엄아롱 등을 참여 예술가로 초청했다. 예술가들은 회색 콘크리트로 덮인 썰렁한 광장을 유쾌한 예술활동을 통해 새롭게 변모시켰다. 정크하우스는 고가도로 밑면에 커다란 물방울 같은 푸른 공들을 매달아 건조한 공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사진2-1). 엄아롱 작가는 파이프로 제작한 벤치를 설치하여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놀도록 유도했다. 이 벤치는 한쪽에서 말하면 다른 쪽에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어서 이곳이 소음이 아닌 소통의 장소라는 것을 넌지시 알려주었다(사진2-2). 그밖에도 여러 차례의 주민간담회, 포럼 등을 개최하여 주민, 전문가, 예술가들이 서로 소통하는 자리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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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1> 옥수역 고가 아래 공공예술 PLAYFUL <해방된 놀이> - 산업예비군(김현준) <고가 밑 놀이터-경사의 경사로>, 2019, 산업자재, 6.94x1.5m
<사진3-2> 옥수역 고가 아래 공공예술 PLAYFUL <해방된 놀이> - 산업예비군(김현준) <고가 밑 놀이터-그물망 쉼터2>, 2019, 산업자재, 약 4.83x0.8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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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3> 옥수역 고가 아래 공공예술 PLAYFUL <해방된 놀이> - 조재영 <blooming roads="">, 2019, 메탈, 분체도장, 지름 약 3.8x0.8m (사이니지 약 1m)</blooming>

만아츠 만액츠의 <옥수역 고가 아래 PLAYFUL> 프로젝트는 2019년에도 이어지고 있다. 올해 프로젝트는 <해방된 놀이>라는 이름으로 9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되는데, 이경미는 큐레이터로 계속 참여하고 있다. 프로젝트 <해방된 놀이>는 한국사회 어느 곳에서나 흔히 발견되는 놀이터에 대한 반성적 성찰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에서 놀이터란 너무 정형화된 형태로 안전성만을 추구해서 어린이들의 흥미를 유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정형화된 놀이터 풍경은 한국사회에 만연한 형식화된 삶의 방식과도 닮았다. 형식화된 삶 속에서 아이들은 체험프로그램 같은 놀이 상품을 소비하며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자유로운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놀이와 놀이공간은 한국사회가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산업예비군(김현준)과 조재영 작가는 옥수역 고가도로 아래 공간을 새로운 놀이의 관점으로 접근했다. 산업예비군은 건설현장에서 사용되는 매우 ‘안전’한 자재를 이용하여 시각적으로 약간 ‘위험’해 보이는 구조물 작품 <고가 밑 놀이터> 4점을 제작했다. 그물망 쉼터나 계단이 있는 경사로 같은 것들이다. 이 프로젝트 과정에서 주민들은 그물망 작품에 대해 위험해 보인다는 의견을 제시하였고, 기획팀은 이러한 의견을 받아들여 그물망을 보완하기도 하였다. 산업예비군의 작품은 ‘안전성’과 ‘위험성’이라는 놀이터에 대한 고정 관념화한 기준을 되돌아보게 했다(사진3-1. 3-2). 조재영의 <blooming roads="">는 광장에 미로 형태의 울타리 3점을 설치하여 보행자들의 동선에 개입하였다. 울타리에는 기하학적인 모양의 지시판들이 함께 설치되었는데, 인근 주민들이 그 지시판들을 보고 자발적으로 자유로운 놀이를 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장치였다(사진3-3).</bloo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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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1) 태평빈집프로젝트 – 사라지지 않는 1 - 이창훈 <무의미의 의미> 2019, 도배지, 장판, 가변설치 (사진 : 이현석)

지금까지 소개한 만아츠 만액츠의 공공예술 프로젝트 외에도 이경미는 성남시에서 독자적으로 <태평빈집프로젝트 – 사라지지 않는 1>을 추진하였다. 성남문화재단이 주최한 이 프로젝트는 태평동의 쇠락한 주택가에서 2019년 6월 14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되었는데, 총기획을 맡은 이경미는 총 12팀의 예술가들을 초청하여 다양한 사회참여적 공공예술을 실험하였다. 성남시의 원도심 태평동은 1960년대 후반, 정부가 도시 재개발을 위해 서울의 판자촌 빈민들을 강제 이주시키면서 형성된 곳(당시 경기도 광주군)이다. 1971년엔 강제 이주에 항거하는 ‘광주 대단지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었다. 태평동 일대에는 강제 이주 시기에 지어진 약 20평 크기의 낡은 주택들이 즐비한데, 도시재생지원센터가 태평빈집프로젝트를 위해 철거 예정인 빈 집들을 제공하였다. 빈 집 안에는 떠나버린 사람들이 남겨 놓은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 흔적들은 기획자와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여섯 채의 빈 집과 성남공공예술창작소 두 곳에서 예술가들은 태평동에서 살았거나 살아가고 있는 개인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어 장소특정적인 설치작업, 영상, 사운드, 아카이브, 퍼포먼스, 커뮤니티 기반의 프로젝트 등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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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2) 태평빈집프로젝트 – 사라지지 않는 1 - 이원호X가천프로젝트팀 <태평프로젝트-태평화원> 2019, 물물교환 및 공간설치, 태평4동 1546번지 외부 모습 (사진 : 이현석)

그중 이창훈 작가의 <무의미의 의미>는 주목할 만하다. 그는 빈 집에 남아 있는 곰인형 같은 소소한 물건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그 주변의 장판과 벽지만 새로 교체하는 작업을 보여주었다. 마치 헐리기 직전의 집에서 마지막 제의와도 같은 정화 행위를 함으로써 지난날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떠올리게 하였다(사진4-1). 그리고 이원호x가천프로젝트팀도 <태평프로젝트-태평화원>이라는 상당히 의미 있는 작업을 보여주었다. 이 프로젝트팀은 골목마다 있는 주차금지용 물품들을 수집하면서 대신 의자로 교환해주었다. 그 덕분에 주차금지 구역은 의자에 앉아 대화가 이루어지는 공유의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이어 수집한 주차금지용 오브제들을 화분으로 만든 다음, 빈 집 하나를 실내화원으로 꾸몄다. 마지막으로 전시가 끝난 다음엔 그 화분들을 다시 주민들에게 선물하였다(사진4-2). 태평빈집프로젝트에서 살펴볼 또 하나의 작품은 영상 및 사운드 설치작업 <나는 사자다>이다. 일일댄스프로젝트의 안무가 겸 감독인 송주원과 이경미가 협력 기획한 이 작품은 태평동에서 살았던 3대의 이야기를 몸짓으로 표현하였다. 태평동 일대 빈 집들의 옥상 3곳과 골목 등에서 촬영된 이 영상은 국가의 폭력과 삶의 한계 내에서도 생활을 꾸려나가는 개인의 모습을 담아냈다(사진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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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3) 태평빈집프로젝트 – 사라지지 않는 1 - 송주원(일일댄스프로젝트) <나는 사자다> 2019, 영상 및 사운드, 00:09:45 (이경미 협력기획) (사진 : 이현석)

현재 이경미는 일일댄스프로젝트 송주원과 함께 장안평 지역을 주제로 또 다른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댄스필름, 설치미술, 영상, 퍼포먼스 공연 등으로 구성된 장안평 프로젝트는 올해 하반기에 공개될 예정이다. 그리고 그는 ACC에 머무는 동안 광주광역시에서 진행할 만한 프로젝트도 연구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내의 고가도로 아래 유휴공간을 조사하고 열린 공간에서 선보일 음향, 빛, 이미지를 이용한 작업을 구상 중이다. 독립기획자 이경미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유휴공간 같은 도시의 틈새를 연구하고 발굴할 생각이다. 그곳에서 주민들과 삶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다양한 예술가들과 함께 더욱 참신한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펼치려고 한다. 이경미처럼 에너지 넘치는 독립기획자들 덕분에 공공예술은 우리 삶의 한가운데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다.



  • . 백종옥 icezug@hanmail.net
  • 사진. 이경미 mia.oneredba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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