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아나 매스게임

남미에서 발견한 북한의 전체주의 시각문화

아시아문화연구소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전통의 단절과 제국들의 식민침탈, 독립 이후 찾아온 냉전과 분단, 그러한 과정에서 수반된 독재와 혼란 등 얼룩진 근현대사를 관통해왔다. 이러한 질곡의 역사가 가장 압축적으로 재현된 곳이 바로 한반도일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먼 곳은 어디일까?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지구의 정반대편인 남미일 것이다. 아시아에서 아득히 먼 이 남미 또한 수백 년에 걸쳐 진행된 제국들의 수탈과 탄압, 독립 이후 지속된 정치적 충돌과 피해, 그리고 오늘날 경제적 문제와 혼란으로 상징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사실 아시아에 비해 더 처절하고 잔인하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의 공통된 맥락 위에서 흥미로운 문화교류의 사례가 있다. 그 대상은 중남미 캐리비안 인근의 나라 중 하나인 가이아나(Guyana)이다. ‘물의 땅’이라는 뜻을 지닌 가이아나는 수 백 년에 걸쳐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배를 겪어오다 1966년, 친영·친미 성향의 정권으로 독립했다. 그런데 이 정권의 리더였던 포브스 버넘(Forbes Burnham)은 독립 직후 사회주의적 통치 성향을 드러내며 쿠바와 소련 및 북한과의 교류를 강화했다. 그는 식민지배와 전쟁의 폐허를 딛고 급속한 재건과 발전으로 사회주의 진영의 주목을 받고 있던 북한을 벤치마킹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그는 북한에서 시행하던 매스게임의 집단주의적 성격과 광대한 스펙터클에 주목했다. 이들은 북한 정부에 요청하여 당시 북한 최고의 매스게임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방법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자국의 풍토에 부합하는 문화적 요소들을 혼합하여 자신들만의 독특한 매스게임 문화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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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매스게임 전경. 1990년 가이아나 매스게임의 주제는 ‘무지개’(The Rainbow)였다.
그해 신문기사를 보면 10년간 해온 매스게임 중 가장 색상이 다채롭고 화려하며 아름다웠다 한다.
카드섹션 무대와 운동장 사이의 배너에는 ‘가이아나 협동공화국 20주년 기념’이라는 글귀가 길게 펼쳐져 있다.


2016년 가을, 필자가 캐나다에서 수학하고 있는 권성연 큐레이터와 함께 기획한 《군중과 개인: 가이아나 매스게임 아카이브》(아르코미술관, 2016) 전시는 가이아나에서 1980~90년대 개최되었던 매스 게임 아카이브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매스게임 아카이브는 안무도식 스케치북(Choreography Instruction book), 카드섹션 회화도안, 컬러· 흑백 기록사진, 사진앨범, 신문기사, 뉴스 영상 등 500여 점의 실물, 디지털파일, 복제본 등으로 구성되었다. 거기에는 부채춤을 응용한 새로운 군무 형태나 북한에서 온 전문가들이 가이아나 측 지도부와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 또는 가이아나인들이 만든 안무도식 스케치북 위에 한글로 적힌 메모 등, 숱한 역사적 흔적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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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매스게임 카드섹션 도안 중 〈재규어〉. 재규어는 가이아나의 대표적 야생동물로 이 도안은 1987년 매스게임의 제4장 〈우리의 야생동물〉의 카드섹션 장면을 구현하려고 만든 것이다. 자세히 보면 숫자가 적힌 모눈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매스게임 아카이브는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요소들이 많았다. 또한 시각적인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 오늘날 한국의 대중에게 흥미를 안겨주는 몇 가지 요소들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그러한 요소들 중 첫 번째는, 북한 매스게임의 시각문화적 요소들의 강력한 영향력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이아나 식으로 변형된 시각문화적 특징을 함께 보여준다는 점이다. 물론 매스게임은 다수의 전체주의적 사회에서 실행된 바 있는 북한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그러나 매스게임하면 북한을 연상시킬 만큼 북한의 매스게임 문화는 강력하다. 전 지구적으로 가장 강력한 전체주의가 작동하는 북한은 교조적인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전통을 재해석하여 문화 저변에 적용시켰다. 다분히 정치적 수요에 의해 실행된 매스게임에는 전통문화의 어색한 각색들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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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매스게임 안무도식. 무지개색 부채모양의 도구로 부채춤을 추는 어린이들의 안무도식이 그려져 있다.
부채춤은 북한무용단이 전수해준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매스게임의 정치적 유용성을 적극 수용한 가이아나에 의해 재해석되어 흥미로운 이종(異種)문화의 결과물로 탄생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아카이브에 포함된 북한의 부채춤을 응용한 군무 사진이나 북한식의 선전문구 중심의 이미지, 그리고 아마존 유역의 독특한 자연환경에서 영감을 얻은 이미지들이 혼재하는 카드섹션 등은 이질적 문화의 혼합이 창출한 독특한 양식과 기법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집단주의가 이식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아시아와 남미의 많은 지역은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한 직후 전체주의와 독재를 경험했다. 가이아나의 매스게임 아카이브는 오랜 식민지배를 겪은 신생 독립국에 집단주의가 이식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가이아나는 수백 년간의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원주민 비율이 극히 낮아지고, 주로 타의로 이주한 사람들로 재구성된 다인종 사회가 되었다. 따라서 식민지배를 받던 기간이나 구성원들의 이질적 배경 등을 고려할 때 독립 직후에 국민적 화합을 이룰 동기부여가 되어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특히 가이아나 인구 구성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아프리카계 가이아나인과 인도계 가이아나인 사이의 반감은 뿌리가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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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매스게임〈시민불복종〉(Civil Disobedience).
가이아나 매스게임은 학생과 시민들에게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교육하는 의미가 컸다. 〈시민불복종〉은 1953년 영국령 가이아나에 독립된 정부를 세우고자 체디 제이건(Cheddi Jagan)과 훗날 가이아나 협동 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포브스 버넘이 함께 주도한 시민불복종 운동을 지칭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 단위의 총체적 국민 단합은 당시 정권이 간절히 원하던 모습이었을 것이다. 인종이나 배경을 초월한 다수 의 개인들이 훈련된 군중으로서 집단예술을 구현하는 매스게임은 어쩌면 정권이 원하던 통치 형태의 상징적 이미지였을 것이다. 매스게임의 엄격한 동작이나 정밀하게 짜인 순서 등은 당시 가이아나인들에게 매우 생소한 집단주의적 공연문화를 체험하게 했을 것이다. 동시에 그 동작의 체화는 근대 국가적 훈육에 길들여지는 개인들의 신체를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개별적 특징들은 결국 체제가 작동하는 형태의 보편적 면모로 연결된다. 가이아나의 매스게임 아카이브에는 그것을 강력하게 실행시켰던 전체주의 정치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매스게임 소식을 대대적으로 다루었던 당시의 신문 자료들은 매스게임의 국가주의적 성격과 선전의 요점 등을 잘 보여준다. 당시 학생들의 대대적인 동원에 대한 반대 의견들은 매스게임의 스펙터클 위로 쏟아지는 조명 뒤에 묻혀 있고, 엇갈린 신념이나 괴리감 등 문화 저변에 공존하는 다양성은 매스게임의 당위성에 가려져 있다. 이런 상황은 식민 지배 직후, 독립과 국가형성 과정에서 전체주의를 겪어야 했던 지구상의 많은 국가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가이아나의 역사 속에 인류의 현대사적 보편성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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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게임”, 《가이아나 크로니클》(Guyana Chronicles), 1980년 2월 29일, 14~15면, 가이아나국립아카이브 소장.
사진: 헤더 리어(Heather Leier, 에디팅)


이 전시는 각각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동아시아와 중남미 간의 긴 거리와, 가장 첨예한 냉전시대로부터 신자유주의에 의한 새로 운 질서가 이념을 대체한 동시대까지의 시간을 가로지르고 있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이는 그 가정이라는 것이 다분히 당시가 아닌 현재의 시점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과거의 시각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거를 상상하는 것은 다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통찰의 시각을 제공해준다. 역사는 이렇게 동시 대성의 맥락에서 지속적인 생명을 부여받는다. 가이아나의 역사는 물리적으로나 관념적으로나 한반도와 연결되어 있음으로써 새로운 맥락으로 호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화의 교류와 착종의 과정을 지켜봄으로써 아시아라는 대상이 갖는 배타적 정체성에 대해 재고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 . 고원석 wo.koh@seoul.korea.kr
  • 사진. 권성연 (원본재촬영)

    현,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과장
    아르코미술관 큐레이터, 베이징아트미아재단 예술감독 등을 역임
    공간화랑 재개관 프로젝트, 스위스-한국 공공미 술 프로젝트 ‘Artcanal’, 신중국미술전 등을 기획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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