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마주한 우리, 아시아인

전시 <아시아의 표해록>이 건네는 말들

이슈&뷰


뜻밖의 만남, 다른 문화와의 우연한 접촉은 내가 생각했던 상식이나 습성을 돌아보게 만들고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이끌거나 삶에 예기치 못한 변화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아마도 성난 바다를 표류해 풀과 나무도 다른 낯선 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웅성거리는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뭍에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낯선 두려움 속에서 이국의 말과 풍습과의 접촉은 그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요? 전시 <아시아의 표해록>은 바로 다른 문화와의 우연한 만남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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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입구


‘2019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와 연계하여 진행되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라이브러리파크 테마전 <아시아의 표해록(漂海錄): 바다 건너 만난 이웃>은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동아시아 표해록을 모아 전시하고 있습니다. 바다에서 표류해서 고향땅으로 귀국의 여정을 담은 표해록(漂海錄)은 험난한 표류의 귀환의 기록이자 낯선 땅의 풍속과 문물, 옛 문화와 전통을 담고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항해술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 급변하는 날씨로 인해 배가 표류하여 바람과 해류의 흐름에 따라 언어와 풍습이 다른 낯선 땅에 당도하는 일이 때때로 있었다고 합니다. 전시에 소개된 표해록은 국가의 공식적인 기록이 아니라 벼슬아치, 무사, 어민, 무역상, 승려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남긴 생생한 기록이기에 다른 지역의 풍습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도 친숙하게 다가옵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에서 선보인 적이 없는 자료들이 소개됩니다. 아시아문화연구소가 아시아 각지의 현지조사를 통해 발굴한 중국의 『해남잡저』, 일본의 『조선표류일기』와 <청국표류도>, 베트남의 『일본견문록』 등이 그것입니다 .

풍랑을 만나 표류하는 배를 그린 전통회화(1858년)를 사용한 영상으로 시작하는 전시는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 아시아의 표해록’은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아시아의 대표적 표해록을 소개하고 있고, ‘2부 풍랑을 헤쳐 아시아를 만나다’는 표해록을 분석하여 그 안에 담긴 아시아인의 다양한 문화 교류 양상 및 실상을 소개하고 있으며, ‘3부 콘텐츠로 만나는 표해’는 표해를 소재로 한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보여주고 직접 읽어볼 수 있는 표류 관련 문헌 자료가 비치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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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콘텐츠로 만나는 표해


1부의 전시는 15세기부터 19세기의 표해록의 연표와 함께 조선, 명과 청, 일본, 베트남의 표해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조선사람이 쓴 표해록으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마르코폴로(1254~1324)의 『동방견문록』, 일본 승려인 엔닌(圓仁: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3대 기행문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전라남도 나주 출신의 문신인 최부(1454~1504)가 쓴 『표해록』(1488년)입니다. 관련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최부의 표해록은 중국 명나라 초기의 사회상황, 정치와 군사, 경제와 문화를 비롯하여 일상의 풍습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부는 명나라를 방문했던 조선의 관료들이 볼 수 없었던 장강 대운하의 기능과 의의를 썼고 물을 긷는 중국의 수차(水車) 원리까지 상세하게 적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수차를 조선에 도입하자는 제안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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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의 최부의 표해록


최부의 『표해록』은 1769년 일본에서 번역되고, 1965년에 영어로 번역되었으며 1976년 한글로 완역되었고 중국에서는 1992년에 중국에서 번역될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전시에서는 자세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관심 있는 분은 서점에 다양한 한글 번역본이 나와 있으니 읽어보면 좋을 듯합니다. 표해록 전시를 통해 더 깊고 흥미로운 앎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관람객의 특권이 아닌가 합니다.

최부의 표해록과 더불어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조선의 홍어장수 문순득의 표류에서 귀향까지의 3년 2개월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표해시말(漂海始末)」입니다. 1801년 12월 홍어를 사러 출항했다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 남쪽 유구국(琉球国, 오키나와)을 거쳐 스페인이 식민통치를 했던 여송국(呂宋國, 필리핀)에 다시 표류 기착했다가 포르투칼의 거류지였던 마카오,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을 거쳐 귀향한 문순득의 이야기는 연구서, 동화책, 다큐멘터리, 연극으로 만들어질만큼 드라마틱합니다. 그의 이야기를 담은 「표해시말」은 유구국과 여송국의 풍습과 문물에 대한 상세하고 흥미진진한 내용을 담고 있고 여송국과 마카오에 대한 조선 최초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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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시말


문순득은 언어 습득능력이 탁월하고 지혜로워서 류구국에 도착하여 필담(筆談)과 몸짓 등으로 대화하고 여송국에서는 현지 토속어를 익혀 현지인과 소통했다고 합니다. 문순득이 귀국 후에는 9년 전 제주도에 표류해온 정체모를 표류민들의 통역을 맡아 필리핀 사람임을 밝혀내고 그들을 중국을 거쳐 본국으로 송환할 수 있었다고 하니 그는 당시 조선에서 유일한 필리핀말-조선말 통역가였습니다. 「표해시말」이 실려있는 『유암총서(柳菴叢書)』는 2005년 신안문화원에서 한글로 번역하였고 2010년에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7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표해시말」은 신안문화원 누리집의 신안향토사료집의 『유암총서』로 들어가면 한글번역본과 원문을 볼 수 있습니다. 1부 전시의 끝부분에서는 한국에서 처음 공개되는 모리야마 테이지로의 <청국표류도>(1814)가 전시되어 있으니 꼼꼼히 들여다보면 당시 청나라 사람들의 차림새와 풍습의 자세한 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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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표류인 송환 체제


해상을 통한 교류의 모습, 표류민의 증가와 이에 따른 송환 제도의 정착, 그리고 표류민이 귀향하기까지 체험하고 보았던 이국의 삶과 문화를 나누어 소개하고 있는 2부에서 눈에 띄는 것은 송환 제도입니다. 동아시아 표류인 송환 체제는 송대(宋代)부터 서서히 제도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구휼(救恤)과 무상 송환의 원칙하에 한, 중, 일 삼국의 긴밀한 공조로 이루어졌습니다. 표류민과 난민에 대한 환대는 누구나 바다에서 불가피한 상황을 겪고 낯선 땅에 도착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기에 보편적 권리가 있다는 생각, 인권의 논리가 없던 시기에도 호혜성에 입각한 무상 송환체제가 오래전부터 작동했다는 것은 새삼스럽고 놀라운 일입니다.

<아시아의 표해록> 전시에서 보고 느끼게 된 것 중 하나는 아시아 각 나라가 언어와 문화가 다를지라도 바다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바다는 사납고 위험천만한 곳이지만 어부들에게는 삶의 터전이고 새로운 물건과 낯선 풍습을 나르는 무역과 교류의 길입니다. 표해록은 사나운 바다가 이어준 우연한 만남의 기록입니다. 낯선 문화와 마주침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시대의 창조성의 원천인 문화다양성의 출발점입니다. 인류학자 끌로드 레비스트로스는 ‘다양성은 고립된 집단이 가지는 기능이기보다는 통합된 집단들이 서로에 대해 가진 기능’이라고 말합니다. 표해록이 보여주듯이 바다를 통해 이어진 우리 아시아인은 서로 다른 국적과 문화로 나뉜 고립된 집단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마주하고 접촉했을 때 창의성이 활성화될 수 있는 호혜적 집단에 속해 있습니다.


  • . 박경섭 vomulsum@hanmail.net
  • 사진. AC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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