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사회를 이야기하는 디자인

그래픽 디자이너 홍주희

레지던스

홍주희 작가

서울여자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영국 왕립예술학교(RCA) 비주얼 커뮤니케이션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서울, 베를린, 런던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런던과 베이징의 대학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강의했다. 얼마 전 한국에 돌아와 어반 리서치 베이스의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Point of Interest를 준비 중이다. 그래픽 디자이너와 연구자로서 재미있게 사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2019년 ACC레지던스 프로그램에는 문화상품, 미디에이터, 크리에이터, 펠로우 등 여러 장르의 예술인과 연구자들이 참여했다. 그중 문화상품 분야에 참여하는 홍주희 디자이너를 6월호 레지던스 아티스트로 소개한다. 디자이너로서 그가 해온 활동이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디자이너보다 폭넓은 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홍주희 디자이너는 이미 유년시절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을 만들 정도로 미술에 소질을 보였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미술을 전공한 부모님의 영향도 컸다. 그리고 재능을 살려 자연스럽게 미술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특히 자신의 적성에 맞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하였다.




이미지 설명
이미지 설명
이미지 설명
이미지 설명
(사진1) <롯데타워 에비뉴엘> 아이덴티티 디자인, 서울, 2014년 9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 주우식 / VM 디렉터 : Douglas Little / 그래픽 디자인 : 홍주희, 이지혜, Mogoloon


대학을 졸업한 그는 프리랜서로 그래픽 디자인 일을 하다가 2012년 롯데쇼핑에 입사했다. 롯데 백화점 디자인실 신규 프로젝트팀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 참여했던 대표적인 프로젝트로는 <롯데타워 에비뉴엘>이 있다(사진1).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롯데타워를 비롯해 국내에 새로 오픈한 아울렛 및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해외 백화점의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디자인에서 아이덴티티를 정립한다는 의미는 디자인된 이미지를 보고 해당 사업체의 정체성이 떠오르도록 유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역마다 고유의 문화적 특성을 살려주거나 주 고객층의 성향에 따라 디자인의 변화를 주면서도 하나의 브랜드로서 통일성을 유지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아이덴티티 디자인 과정에서는 지자체 담당자뿐 아니라 관련전문가들과 협업을 해나가는 것도 필요하다. 꿈을 주제로 삼은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통해 제작된 이미지들은 백화점 내 상점과 공용공간, 상품, 포장지, 쇼핑백, 종이컵 등에 두루 사용되었다.

이미지 설명
(사진2) <롯데 아울렛> 캐릭터 + 아이덴티티 디자인 통합화, 서울, 2014년 11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 주우식 / 그래픽 디자인 : 홍주희, 이지혜


이어 2014년 11월 진행된 <롯데 아울렛> 프로젝트에서도 홍주희 디자이너는 비슷한 작업을 진행하였다(사진2). 매장과 연결된 공공장소에 가족 단위의 방문객을 위해 만든 캐릭터들을 설치하여 아울렛의 아이덴티티를 살리는 작업이었다. 홍주희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카멜레온과 앵무새 등의 캐릭터들은 입체로 제작되어 현장에 설치되었는데, 지역 문화에 맞게 색조나 분위기를 바꾸었다. 환경에 따라 색이 변하는 카멜레온과 다채로운 색상의 앵무새 같은 동물들이 이런 방식에 알맞은 캐릭터였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이미지 설명
이미지 설명
이미지 설명
이미지 설명
이미지 설명
(사진3) <ULU (Ultimate Universality)> : 디자인 리서치 + 편집 디자인. 런던, 2016년 4월,
전시: Research, Design, Publish Symposium(London, RCA Darwin Building, 2016), EduZgraf (Zagreb, Lauba, 2017)


2015년 홍주희 디자이너는 유학을 결심하고 런던으로 떠났다. 외국의 디자인 환경이 궁금하기도 했고 자신만의 철학이 있는 디자인을 구축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런던에서는 왕립예술학교 비주얼 커뮤니케이션과(Visual Communication, Royal College of Art)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이 학과는 다양한 매체를 자유롭게 이용하여 학생들이 스스로 원하는 작업을 깊이 있게 찾아가도록 장려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학생들이 디자인을 상업적인 도구로 한정해서 보지 않고 다각도의 토론과 발상을 통해 실험적인 의사소통의 도구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홍주희 디자이너도 석사과정에서 자신만의 도구가 무엇인지 고민하였다. 그렇게 고민하는 과정에서 ‘이미지 내러티브(image narrative)’라는 개념을 중심에 두게 되었다. 이미지 내러티브는 개별적인 이미지들이 연결성을 지니면서 이야기처럼 맥락이 형성되는 방식을 의미한다. 그는 이러한 이미지 내러티브에 유머와 풍자적 요소를 가미하여 사람들에게 디자인을 각인시키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예를 들면 <ULU (Ultimate Universality)> 프로젝트가 그것이다(사진3). 이 프로젝트는 ‘주거문화를 어떻게 평준화시킬 것인가?’를 주제로 삼고 있다. 제목처럼 ‘궁극적인 보편성’을 지닌 주거문화는 어떤 것인지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스웨덴의 가구회사인 이케아(IKEA)의 제품들이 유럽적인 감성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런던에서는 일본의 회사 무지(MUJI, 무인양품)가 생산한 아시아 감성의 가구와 생활용품이 유행한다. 유럽과 아시아는 서로 이국의 주거문화를 동경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이케아나 무지는 전략적으로 각 나라마다 현지 사정에 맞게 조금씩 다르게 마케팅을 한다. 하지만 그 맥락은 비슷하다. 한마디로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보여주는 풍경은 거의 비슷하다. 홍주희 디자이너는 이케아와 무지의 전세계 상품카탈로그를 수집하여 이런 내용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그 가구들의 공통점을 추출하여 누구나 제작 가능한 기본 모듈 ULU로 만들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모둘화한 가구가 서양에서는 의자로, 동양에서는 소반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나아가 이 ULU모듈을 합쳐 점점 크게 만들면 주거 문화를 평준화시키는 유토피안 시티가 조성된다고 상상한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잡지 Issue 1, Issue2 형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런던과 자그레브에서 전시회와 심포지엄을 통해 발표되었다.



이미지 설명
이미지 설명
이미지 설명
이미지 설명
(사진4) <Truly British Table Tennis Table> 디자인 리서치, 런던, 2017년 1월,
전시: Work in Progress Show 2017


앞에 소개한 ULU처럼 디자인은 디자인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국제적인 소통과 사회 문제와도 연결된다. 홍주희 디자이너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더욱 발전시켜 <Truly British Table Tennis Table>을 선보였다(사진4). 이 작품은 2012년 영국의 카메룬 총리와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만나면서 빚어진 해프닝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카메룬 총리는 친선의 의미로 오바마 대통령에게 영국제 탁구대를 선물했다. 영국 국기 유니언 잭(Union Jack)이 새겨진 그 탁구대는 영국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탁구대가 ‘메이드 인 차이나’였다. 이 작은 사건은 영국의 제조업 감소에 대한 우려를 환기시키면서 세간의 논란을 일으켰다. 도대체 영국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홍주희 디자이너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상상력으로 풀어냈다. 그것은 영국에서만 생산 가능한 재료들로 다시 탁구대를 제작한다는 상상이었다. 그렇게 상상하다보니 영국에서 자란 참나무와 영국에서 재활용된 플라스틱을 사용하여 탁구대의 판을 만들고, 영국의 신문지를 종이죽으로 만든 후 굳혀서 탁구대의 다리를 제작하는 식으로 결과물이 나왔다. 스스로 지탱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탁구대였다. 그리고 이렇게 상상으로 제작된 ‘진짜 영국제 탁구대’를 영국의 테레사 메이 총리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선물한다는 이야기로 발전한다. 이 탁구대는 디자인, 제작, 상표가 모두 ‘브렉시트 이후 영국(Post Brexit Britain)의 것’이라고 홍주희 디자이너는 표현한다. 서사성과 풍자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이 작품은 현대사회에서 상품과 국가간의 관계, 상품과 문화의 허상 등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이미지 설명
이미지 설명
(사진5) <Diplomatic Gifts Given by World Leaders> 북 디자인 + 인스톨레이션, 런던, 2018년 6월
전시: Show RCA 2017


<Diplomatic Gifts Given by World Leaders>는 석사과정 졸업전시 작품이다(사진5). 앞에서 다룬 영국제 탁구대처럼 정상들 사이에 주고받는 외교 선물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한 작품이다. 외교 선물은 한 나라의 특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선물을 주고받는 국가 간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암시하기도 한다. 즉 외교 선물은 일종의 상징적인 오브제인 셈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외교 선물의 숨은 의미들을 분석하고, 선물을 교환하는 나라들의 관계를 풍자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이 작품의 목적이었다. 특히 한국, 일본, 영국, 미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는데,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선물에 관한 이야기들이 있다. 영국 테레사 메이 총리가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손잡이가 두 개 달린 위스키용 컵을 선물했다. 이 컵은 원래 스코틀랜드에서 부족 간의 화합을 의미하기 때문에 호의가 담긴 선물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약간 불쾌한 선물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트럼프 대통령의 동생은 알콜 중독으로 사망했고, 그 때문에 트럼프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외교선물이 호의와 함께 상대방의 상처도 건드리는 중첩된 의미를 띨 수 있음을 보여준다.

홍주희 디자이너는 이런 사례들을 모아 외교문서처럼 보이는 커다란 책으로 만들었다. 방문객들은 그 책 앞에서 각 나라의 국기가 그려진 꼬깔모자와 헤드폰을 쓰고 노래를 들으며, 동시에 앞에 설치된 모니터의 영상도 볼 수 있다. 유럽에서 꼬깔모자란 말 안듣는 유치원 아이들에게 씌우는 것이라고 한다. 이 꼬깔모자는 일반적으로 정상들이 함께 사진촬영을 할 때 배경에 설치되기 마련인 국기들이 마치 정상들의 꼬깔모자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착안했다. 상당히 풍자적인 의미가 깔려 있다. 헤드폰에서 나오는 노래는 ‘선물을 받았는데 어이없다’는 내용으로 각국의 언어로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영상에서는 기존의 정상들이 실제로 만나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주로 어색한 순간만을 모아 놓은 것이다. 이 작품은 외교회의 형식으로 전시물이 설치되었다는 점과 코미디쇼 같은 우스꽝스러운 분위기가 특징인데, 실용적인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좁은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하고 관객과 소통을 시도하는 동시대미술이라고 할 만하다. 디자인이 상업적인 도구 이전에 우리 삶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표현하는 도구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미지 설명
이미지 설명
이미지 설명
이미지 설명
(사진6) <책 속의 유럽 아트북 페어> 글, 이미지, 서울, 2018년 5월
출판사: 여름의숲


2017년 6월 홍주희 디자이너는 왕립예술학교 비주얼 커뮤니케이션과를 졸업한 후 킹스턴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런던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2017년 한 해 동안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유럽 주요도시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아트북 페어를 찾아다녔다. 이때 아트북 페어를 단지 구경만 하지 않고 아트북 페어의 주최자, 프로그램 디렉터, 참가자, 방문자 등 40명을 인터뷰하며 취재했다. 그는 디지털 시대에도 책을 만들고, 사고 팔고, 책을 매개로 교류의 장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 2018년 5월 한국에서 <책 속의 유럽 아트북 페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사진6). 한국에서 출간한 책이지만 홍주희 디자이너가 한국어와 영어로 글을 썼기 때문에 한국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의 서점에도 배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트북 페어에 참여하여 자신의 책을 홍보하고 판매하기도 하였다. 이런 적극적인 활동 덕분에 서울, 런던, 베를린, 노르웨이, 벨기에 등 가는 곳마다 많은 독자와 소통하는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이미지 설명
이미지 설명
(사진7) <Toronto Bike Share> Wayfinding + Map Design, 토론토, 2018년 12월
Cartography : Clare Seldon


홍주희 디자이너는 2018년에 런던의 도시 디자인 회사에서 일했다. 이 시기에 도시의 디자인 매체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디자인 의뢰는 단지 영국 내에서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각지로부터 들어왔다. 그중 캐나다 토론토시가 필요로 하는 디자인을 맡게 되었다. 토론토시에는 곳곳에 공원이 있는데, 이렇게 많은 공원들을 연결하는 안내판, 지도, 자전거 설치대 등을 환경에 맞게 시각디자인으로 풀어내는 작업이 과제였다. 이런 디자인 프로젝트는 도시 전체를 포괄하는 유기체적인 작업이기 때문에 지자체는 물론 도시디자이너, 교통설계자, 도시계획자, 지도제작자 등과 협업하는 것이 필수다. 그리고 도보환경, 녹색지대, 대중교통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하면서 하나의 시각환경을 만들어가야 한다. 이 프로젝트에서도 홍주희 디자이너는 통합된 시각을 가지면서 동시에 이미지 내러티브가 있는 디자인을 추구하였다.(사진7)

얼마 전 홍주희 디자이너는 유럽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한국에서 자신만의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축적한 경험을 살려 서울에서 도시연구에 기반한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할 계획이다. 그리고 ACC레지던스 기간 동안에는 아시아의 전통적인 이미지를 발전시켜 디자인 제품도 제작할 예정이다. 홍주희 디자이너는 자신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 관점에 걸맞는 새로운 디자인을 창조하려고 한다. 그가 디자인한 이미지엔 인간 사회의 풍경과 삶이 녹아 있다. 흥미로운 이야기처럼 풀어내는 그의 디자인이 우리의 도시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상상해본다.




  • . 백종옥 icezug@hanmail.net
  • 사진. 홍주희 hellojuheehong@gmail.com

 

 

 

공감 링크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