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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대한 제언

레지던스




2000년대 초만해도 우리나라에서 국공립이든 사립이든 아트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손에 꼽을 정도로 소수였다. 그때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몇몇 창작스튜디오들을 통해 작품을 선보인 작가들이 꽤 주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은 전국에 크고 작은 레지던스 프로그램들이 상당히 많다. 「창작스튜디오 현황조사 및 지원방안 연구」(한국문화관광연구원. 2013)에 따르면 2013년 현재 국내에서 운영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120개 이상이며, 그중 약 3분의 1은 국공립기관에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약 6년 전의 자료이므로 그 사이의 증감을 감안하더라도 국내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적어도 100개 이상이라는 말이다. 이 100개 이상의 레지던스 프로그램들은 각자 조금씩 다른 지원 조건을 가지고 있다. 작업실과 숙소뿐만 아니라 창작지원금과 체재비 등 여러 면에서 지원 조건이 상당히 좋은 곳이 있는가 하면, 숙소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작업실만으로 운영되는 곳도 많다. 그리고 해당 지역 예술인들만 입주시켜 운영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예술가들을 선발하거나 교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도 있다. 또한 3개월, 6개월, 1년, 2년까지 예술가들의 입주기간도 각 레지던스 프로그램의 사정에 따라 다르게 운영된다. 그렇지만 이렇게 다수의 국내 아트 레지던스 프로그램들 중에서 뚜렷한 개성과 특색을 보여주는 곳은 많지 않다. 상당수가 유사하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ACC 레지던스 프로그램(정식 사업 명칭이 아니라 편의상 보편적인 명칭으로 사용함)의 지원조건이나 운영 수준에 대해서 문화예술인들은 어떤 평가를 내릴까?

이 글의 목적은 국내 레지던스 프로그램의 현황 파악이나 분석도 아니고, ACC레지던스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도 아니다. 다만 ACC레지던스 프로그램에 대해서 필자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몇 가지 생각들을 전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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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레지던스 프로그램에는 국내외 여러 분야의 예술가와 연구자 들이 모여든다. ACC는 시각예술, 뉴미디어, 사운드, 디자인, 공예, 건축, 공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작업하는 예술가들을 선발하고, 이들이 협업을 통해 입주 기간의 마지막에 융복합적 결과물을 선보일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운영 방향은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작년의 경우 레지던스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ACC에 머무르는 기간이 상반기 4개월 또는 하반기 4개월이었다. 이 조건을 보면서 ‘과연 4개월 동안 실제로 융복합적인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프로그램 참가자들 대부분이 광주가 아닌 타 지역이나 해외에서 오는데, 초기에 적응하고 마지막에 마무리하는 기간을 제외하면 그들이 실제로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4개월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개인작업만 진행하기에도 짧은 기간이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다양한 성향의 예술가들이 서로 깊이 대화하고 협업하며 충분히 화학작용을 일으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는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기존의 자기 작품과 유사하거나 단시일내 끝낼 수 있는 규모의 작품만 결과물로 보여주기 쉽다. 심한 경우엔 작품의 완성도가 많이 떨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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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들이 제대로 융복합적인 협업을 하면서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려면 최소한1~2년 정도의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아트 프로젝트의 규모나 실현 과정에 따라 더 오랜 시간이 주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ACC는 참가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건을 요구해야 한다. ‘ACC에서 계획하고, 연구하고, 작업하고, 완성시킨 작품, 즉 ACC에서만 만날 수 있는 수준 높은 작품을 창조하라’는 것이다. 그러려면 참가자들이 ACC에 머무르는 기간 동안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도록 창작지원금과 생활비 등을 파격적으로 풍족하게 지급해야 한다. 이런 지원 조건은 국내의 다른 레지던스 프로그램과 확실히 차별화하는 게 좋다. 그래야만 국내외에서 뛰어난 예술가들이 ACC로 몰려올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장기적인 아트 프로젝트를 위해 필요하다면 공학자, 인문학자, 과학자 등 외부의 다양한 전문가들이 수시로 참여하여 레지던스 참가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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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ACC라면 이 정도의 수준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1~2년 동안 연구하고 작업해서 완성한 그 작품들이 소박한 쇼케이스 정도로 보여지고 끝나버리면 별로 의미가 없다. 2년에 한 번 정도 본격적인 대형 전시회로 꾸며져서 국내외에 홍보되어야 한다. 광주비엔날레와 같은 기간에 전시회가 개최되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전시회 개최 후 공들여 만든 작품들이 허망하게 폐기되는 것도 막아야 한다. 모든 작품들을 무조건 보존하자는 말이 아니다. 해마다 뛰어난 작품들만 선정하여 ACC에서 매입하면 된다. 당연히 우수작품 선정과 매입에는 엄격하고 객관적인 심사가 필요하다. 심사에는 여러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작품의 내구성, 미학적 가치, 미술사적 의미, 작품 관리 방식 등을 세밀히 체크하고 작품가격을 평가해야 한다. 작품 가격 산정시에는 ACC가 지원했던 작품 제작비 부분을 제외하고 작품의 가치에 해당하는 부분만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또한 작품 매입에 따라 ACC는 작품들을 보관하는 전용 공간과 전문 인력을 운영해야 한다.

만약 ACC가 이렇게 장기간의 프로젝트를 통해 만들어진 우수작품들을 10~20년 이상 계속 수집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른바 ‘ACC 컬렉션’으로서 세계적으로 커다란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다. 그리고 ACC컬렉션으로 상설전시와 자체 기획전도 가능해진다. 이처럼 ‘레지던스 프로그램과 컬렉션을 연결시키는 방식’은 그야말로 ACC만의 독특한 콘텐츠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사람들은 ACC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작품들을 보기 위해 멀리서도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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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창의적인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곳이 바로 예술의 중심지가 되고 문화가 발전하기 마련이다. 세계 곳곳의 문화도시들엔 아트 레지던스 프로그램들이 운영되고 있고, 그로 인해 더욱 개방적인 문화와 풍부한 예술컨텐츠를 축적해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ACC 레지던스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수준 높은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활성화될수록 ACC는 물론 광주광역시도 활기를 띨 것이다. ACC가 명실상부한 아시아 문화예술인들의 허브 역할을 하려면 수많은 국내 레지던스 프로그램들과는 차원이 다른 ACC만의 운영 방식과 장기적인 비전이 필요하지 않을까? 오스트리아 린츠의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센터(Ars Electronica Center)나 독일 칼스루에의 ZKM(예술과 미디어 센터)처럼 ACC도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예술가들과 관련 전문가들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미래지향적인 아트플랫폼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 . 백종옥 icezu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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