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걸 다 하는 동네책방 ‘지음책방’

너, 나, 우리들의 케렌시아

광주초이스




투우 경기장 한편에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작은 공간이 있다고 한다. 바로 투우사와의 싸움에서 지친 소가 숨을 고르고 기력을 회복하는 장소로, 스페인어로는 케렌시아(Querencia)라고 부르는 곳이다. 우리말로 피난처, 안식처를 뜻한다. 일상에 지친 숨을 고르고 다시금 세상으로 나갈 기운을 회복하는 공간. 누구에게나 케렌시아가 필요하다. 좋아하는 카페, 우리 집 작은 소파, 자주 걷는 산책로... 내 영혼을 돌보고 치유할 수 있는 장소라면 그 어디라도 케렌시아가 될 수 있다. 나에게 쉼을 주고 힘을 주는 나만의 케렌시아는 어디일까. 무엇일까. 삶이라는 고단한 여행길에서 한번쯤 스스로에게 물어볼만한 질문일 것이다. 광주 동명동의 야트막한 언덕배기를 오르면 외관만으로는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독특한 구조의 건물이 다가온다. 필자는 이곳에서 ‘케렌시아’를 보았다. 혼자서 커피를 마시는 할머니, 카레덮밥으로 늦은 점심식사를 하는 중년 남성, 홀로 조용히 책을 읽는 손님... 혼자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고 아무런 대화가 없어도 어색하지 않는 곳. 바로 동명동의 케렌시아로 부르고 싶은 동네책방 ‘지음책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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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음책방은 손님들에게 ‘별공’(본명 이미경)과 ‘사나긴’(본명 김정국)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책방지기 부부가 2017년 7월에 문을 연 자그마한 동네책방이다. 부부가 지난 날 모아온 6000여권의 책이 책방 곳곳에 빼곡하다. 혼밥, 혼술, 혼차 그리고 혼책까지... 혼자여도 함께여도 좋은 우리 동네의 편안한 복합문화공간을 꿈꾸는 곳이다. 지음책방을 처음 방문했을 때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첫 번째는 책방의 독특한 내부 구조였다. 주택을 개조했다는데 미로처럼 연결된 숨은 공간들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느 구석에는 남편 김정국씨가 여행을 하며 모았다는 부엉이 장식품이 숨어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부인 이미경씨가 모았다는 예쁜 그릇들이 깜찍한 인사를 건네 온다. 내부 구조 못지않게 인상적이었던 점은 책방지기 부부였다. 수천 권의 책을 소장한 독서애호가들이라 조금은 고집스러운 예술가의 모습을 상상했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동네 이웃처럼 편안하고 따뜻했다. 지음책방이 연령, 성별, 직업 불문 많은 손님들로부터 사랑받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밖에도 지음책방에는 특별한 구석이 많다. 책이 아무리 많이 꽂혀있어도 살 수 있는 책은 단 한권이다. 해마다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 다달이 그 주제에 맞는 책 한권만을 판매하는 방식이다. 지난해에는 ‘페미니즘’에 대한 주제를 다뤘고 올해 주제는 ‘동물권’이라고 한다. ‘토요’와 ‘칠칠이’라는 이름의 길고양이 두 마리를 식구로 들인 뒤 개인적으로 동물복지에 관심이 많아진 이유에서다.


김정국(별칭 사나긴. 지음책방 책방지기)

“‘칠칠이’는 7월 7일에 만나서 이름이 칠칠이가 됐는데 당시 골절에 탈장까지 몸 상태가 정말 안 좋았어요. ‘토요’는 토요일에 시장에서 헤매던 녀석이 자꾸 따라와서 함께 살게 됐고요. 길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게 되면서 제 주위에 있던 동물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반려동물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죠. 일 년 단위로 직접 공부해보고 싶은 분야를 책방 주제로 정하는데 그래서 올해는 동물권에 대한 주제를 잡게 됐어요.”
(*인터뷰는 의외로 수줍음이 많은 별공님을 배려해 주로 김정국씨와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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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지음책방 책방지기 부부 이미경씨, 김정국씨



올해로 책방 문을 연지 3년 차. 평범한 공무원이었고 회사원이었던 부부는 남편 김정국씨의 건강문제로 서울 생활을 청산한 뒤, 고민 끝에 광주에서 동네책방을 열게 됐다. 평상시 책을 사랑해 수천 권 이상 모이게 된 책이 가장 큰 힘이 됐고 이미경씨의 취미였던 그릇 수집은 책방의 음식판매로 연결됐다. 처음부터 작정한 길이 아니라 삶이 자연스럽게 데려다준 길이었다. 좌충우돌 시행착오도 많았다. 책방 문을 연 첫해 가장 놀랐던 점은 책이 정말이지, 너무나도 팔리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책이 그다지 많이 팔릴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지만, 이다지 팔리지 않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김정국(지음책방 책방지기)

“책방 시작하고 깨달은 점 한 가지가 책이 정말 안 팔린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고 일단은 한 권의 책만 팔기로 결정을 했죠. 내가 소화할 수 있을 만큼만 들여와서 팔아보자, 한권에 집중하자는 생각을 했고 출판사에 현금을 주고 필요한 만큼만 들여와서 팔기 시작했어요. 손님들이 나를 믿고 책을 사줄 거라는 확신, 믿음이 있었죠.”

책방은 더 이상 책만 파는 곳이 아니다.
문화를 나누고 삶을 나누는 공간이다.




책방의 존재 자체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고 지음책방의 정체성을 다시 세우는 작업이 필요했다. 단순히 책을 사고파는 서점의 기능이 아닌 서로의 삶을 넘나드는 공간으로서의 동네 책방. 이웃과 더불어 문화를 공유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책방. 그렇게 열어놓고 생각하자 책방 안에서 못할 일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와 함께 하는 북 콘서트부터 책방에서 펼쳐지는 벼룩장터, 젠더감수성 워크샵, 크리스마스 파티까지... 길지 않은 시간동안 참 많은 일들을 벌여왔다. ‘지음’이라는 이름처럼 밥도 짓고 책도 짓고 관계도 짓고 동네책방만의 문화도 지어온 시간이었다. 특히 지난해 가을 진행했던 ACC 아시아문학레지던스 프로그램은 지금 생각해도 설렐 정도로 짜릿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심야책방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베트남 출신인 ‘바오 닌’ 작가를 초청해 작가와의 만남을 가졌다. 동네책방으로서의 정체성에 확신을 갖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김정국(지음책방 책방지기)

“베트남 작가인 ‘바오 닌’ 작가가 직접 오셔서 북 토크와 친교의 시간을 가졌는데, 사실 문화라는 게 미국 일본 유럽 위주의 문화에만 많이 노출된 편이잖아요. 그런 점에서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정말 좋았고 그때 정말 많은 분들이 참석해주셨거든요. 지음책방의 동네책방으로서 방향성,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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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 아시아문학레지던스 베트남 ‘바오 닌’ 작가 초청행사(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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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감수성 워크샵(2018.8)


우리 동네의 문화 아이콘, 동네책방
이웃과 더불어 동네로 녹아들어갈 때 존재 의미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가까이에 하나 둘 생겨나 이제는 낯설지 않은 이름이 된 동네책방 또는 독립서점. 거대자본의 시대에 동네 귀퉁이에서 수줍게 인사하는 작은 책방들은 더없이 반갑다. 대형서점과 온라인서점에 밀려 동네의 작은 서점들이 문을 닫기 시작한 수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광주의 대표서점이었던 삼복서점도 사라졌고 계림동 헌책방거리에는 불과 일곱 곳의 책방만이 문을 열고 있다. 서점과 헌책방이 사라진 그 공허한 자리에 소리 없이 들어서 사람을 모으고 새로운 문화를 일궈가는 동네책방들. 현재 광주에만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열일곱 곳의 동네책방이 영업 중이다. 그렇다고 동네책방의 현재가 녹록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책을 팔고 문화를 공유하는 공간으로서 수익을 올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새로 생기는 책방의 수만큼 경영난에 허덕이다 문을 닫는 책방들도 많다. 지난 시절 사라져간 작은 서점들이 그러했듯 지금의 동네책방들 역시 생존을 위한 치열한 전투를 이어가고 있다. 김정국씨는 그 살아남는 방법으로 동네와의 호흡을 강조한다.

김정국(지음책방 책방지기)

“단순히 책을 사고파는 장소로서 동네책방의 기능은 인터넷서점과 대형서점에게 뺏겼다고 생각해요. 요즘 생기는 동네책방은 자기만의 특별한 큐레이팅으로 승부하는 데 그것도 한계가 있죠. 동네에 녹아들어가서 동네 분들과 함께 하는 공간으로 기능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동네의 복합문화공간, 동네의 공공재로서 역할을 할 때 동네책방의 미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공간만이 지닌 특별한 감성으로 동네와 함께 호흡하는 우리 동네 책방. 동네 구석구석에 그런 책방들이 들어선다면 주변의 일상도 한층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동네의 공공재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며 이웃들과 더불어 재미난 일을 벌이는 책방, 바로 지음책방의 꿈이다. 올해 지음책방의 새로운 목표는 ‘별걸 다하는 책방’이다. 고정관념을 깨고 말 그대로 별걸 다해보고 싶다. 별걸 다하는 책방으로서 올해 첫 시도는 지신밟기였다. 책방 가까이에 있는 광주 우리문화예술원과의 공동 작업으로 정월대보름맞이 지신밟기를 진행해 책방 안에서 흥겨운 굿판을 벌였다. 전남대 학생들과 함께 하는 책배달 서비스도 준비 중이고 한권의 책을 번역해서 출판까지 하는 번역프로그램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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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대보름맞이 지신밟기 행사(2019.2)


서점 또는 책방이란, 지식과 교양이 넘나드는 ‘지성의 산실’이라고 한다. 지음책방에는 거기에 몇 가지가 더 붙는다. 서로의 삶이 넘나들고 이야기가 넘나드는 곳.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치유와 회복을 건네는 곳. 너, 나, 우리들의 카렌시아 지음책방이다.

김정국(지음책방 책방지기)

“기억에 남는 손님 중에 수능이 끝난 날 삼천포에서 무작정 찾아온 남학생이 있었어요. 그때 꽤 오랫동안 조용히 책을 읽고 갔던 게 기억이 나요. 또 한분은 육군사관학교 소위 임관식을 앞둔 분이었는데, 상무대에서 훈련받는 중에 잠깐 외출할 수 있는 두세 시간에 찾아오셔서 책을 읽고 차를 드시고 가셨어요. 그렇게 찾아오시는 분들 모두가 잠깐이라도 충만하게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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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책 지음책방
광주광역시 동구 동명로67번길 17
062-457-1208







  • . 유연희 heyjeje@naver.com
  • 사진. 황인호 photoneverdi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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