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빛은 사랑이어라



























Q. 선생님 그림을 보러 온 젊은 친구들이 꽤 많아요@f38

A. 새로운 걸 추구하다보니까 그런 게 아닐까.. 그런데 그게 억지로 하는 게 아니고. 또 해석의 여지가 많잖아요. 저 검정 그림도 사회생활 하다보면 용감하지 못하고 나서지 못하고 혼자만 쥐고 있는 게 곧 터지기 직전이에요. 그 감성이 사회와 연결되기도 하고요. 작품에서 그런 아우성을 읽었을 수도 있죠. 그 아우성은 현대물질 문명이자 개인의 아우성, 사회의 아우성이자 사랑의 아우성이에요.



Q. 작업하실 때 음악을 들으면서 화면에 율동감을 담기도 하신다면서요@f39

A. 어렸을 때 무슨 음악을 좋아하냐면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 드보르작의 신세계, 이런 쪽을 좋아했어요. 음악을 들으면서 상상하는 새로운 세계. 특히 굉음에 매료됐죠. 결국 이 굉음은 현대 물질 문명의 아우성이에요. 내가 담고 싶은 것. 그 대표적인 것이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그날의 함성. 빛 이죠. 또 우주선이 달나라로 갈 때 서로 의사소통을 한다면 어떤 소리가 날까@f40 그런 걸 상상을 하면서 그리는 거죠.



Q. 선생님 작품은 어두운 단색조의 배경이 점점 더 밝고 화려해지고 있잖아요. 한 시대를 넘어 오는 동안 작가의 감성이 바뀌었다고 봐도 될까요@f41

A. 그렇죠. 밝아진 거죠. 이렇게 봐도 돼요. 처음에는 단색이었는데 이제는 오방색을 쓰기도 하고요. 이게 우제길의 변화이죠. (초기 작품의) 저 어두운 배경을 뚫고 나왔던 한줄기 빛이 (이후에) 폭발한 거예요. 안에 있는 것들이 쏟아져 나온 빛의 폭발. 빛은 사랑이에요. 음.. 이번 전시에도 화분이 많이 들어왔거든요. 그런데 그 화분들을 그늘에 두면 시들어요. 태양 빛을 본 것은 지금도 푸르지, 그만큼 빛은 사랑이에요. 빛은 사랑을 주는 것, 행복이죠. 그래서 내 그림을 보면 행복할 수밖에 없죠. 왜냐면 사랑이니까.



Q. 이번 전시에는 초기 작품들도 같이 선을 보이고 있는데요. 초기 작품의 넓은 면을 붓을 안 쓰고 손으로 직접 그리셨다고요@f42

A. 왜냐면 정규 미술 수업 과정을 안 거쳤기 때문에 방법을 몰랐어요. 어떻게 좋은 걸 만들어 낼까.. 그런 생각 밖에 없었죠. 또 유화 재료가 얼마나 몸에 안 좋습니까@f43 하도 그려서 손바닥이 너무 당기고 찢어질 것 같고 그랬죠. 면이 더 넓은 것도 있었으니까 얼마나 힘들었는지.. 특히 손을 써서 흰색을 표현하는 게 참 힘들었어요.



Q. 요즘은 테이핑 작품도 꽤 하시네요@f44

A. 네. 지난 4월이죠@f45 ACC 전시에 초대를 받고 고민을 시작했죠. 어떤 것을 내놓을 것인가. 마침 그때 남북화해협력이 세계적으로 대서 특필 됐을 때에요. 남북정상회담 소식을 접하고 ‘그래 이걸 하자’ 싶었죠. 그때 색 테이프들을 붙이고 남북 화해를 담은 신문기사들을 오려서 부쳤어요. 이 작은 조각들들이 평화이고 화해이고 사랑인 거죠.



Q. 뭔지 모르지만 이번 선생님의 신작도 김환기선생님의 점들이 박히는 것처럼 테이프가 사이즈가 작아지면서 따뜻한 점 같았어요.

A. 그렇죠. 생각들이 담겨져 있죠. 평화와 안전. 비핵화를 염원하면서 기도하듯이 색 테이프를 붙였어요. 어떤 분들은 보시고 ‘자개농의 자개같네’라고 한 사람도 있었네요. 이 작품을 4개월 동안 했어요. 작품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질 못하니까요.










우제길
일본 교토 출생
광주대학교 산업디자인과 졸업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MMCA '이달의 작가전' 외 국내외 개인전 96회
한국미술대상전 특별상
제1회 광주비엔날레 최고 인기작가상 등.



Q. ACC라는 전시 장소도 선생님에게는 특별한 곳이다..라고 들었습니다@f46

A. (제가) 1954년도, 1955년도에 ACC 끝 부분에서 살았어요. 광주여고 가는 쪽, 지금의 주차장 어귀에서 살았죠. 그때부터 그림을 그렸어요. 중학교 1학년 때 거든요. 그전에도 막 그리고 싶었는데 이웃반 아이가 그림을 그렸는데 잘 그려서 부럽더라고요. 그래서 집에 와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제 그림의 출발이죠. 이 장소가 저게는 특별한 곳이에요. 그림을 시작한 곳이니까.



Q. 그러니까요. 거의 60년 만에 돌아와서 전시하신 거잖아요. 이 공간에서 전시했을 때 기분이 어떠셨을까@f47 저도 꼭 묻고 싶었어요.

A . 이루 말할 수가 없죠. 감격스럽고. 왜냐하면 이 자리가 내 그림의 시작인데 여기서 이렇게 큰 전시를 하는구나 싶기도 하고요. 참 감회가 새롭죠. 1955년에 시작한 이후로 그림을 계속 그렸어요. 1965년에 제대 2개월 남겨놓고 월남 파병 지원하고 월남에서 1년6개월 있었어요. 거기에서도 그림을 그렸어요. 살벌한 전쟁터에서.



Q. 사선에서 붓이 잡히시던가요@f48

A. 다행히 후방 통신대에서 근무를 했는데 대장을 잘 만났죠. 대장이 육사를 나왔는데 그림을 그려달라고 해서 시화전을 하게 된 거예요. 베트남 전쟁터에서. 심리전 중 하나의 방법이었나 봐요. 그렇게 와일드한, 참혹한 전쟁터에서 제 그림을 통해서 정서적인 걸 접근하게 한 거죠. 월남전 파병 장병들을 위한 문예술지원활동이라고 볼 수 있는 건데, 학교나 사원 같은 곳에서 순회전시를 했고 귀국을 해가지고 국전에도 도전했죠. 그런데 낙선을 했어요. 낙선. 그래서 그 그림을 찾으러 가질 않았어요. 그 시절에는 그림 하나를 옮기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냥 안 찾고 20년 세월이 지났죠. 그러니까 1987년쯤 됐을까… 인사동에서 화랑을 하는 후배가 그 그림을 고물상에서 주워 온 거예요. 그림이 다시 돌아온 건데. 화가를 해야겠다라는 게 저 그림에서부터 시작 된 거예요. 그래서 이번 전시가 저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거죠. 저기서부터 선이 나와요. 직선과 곡선이 살짝 나왔다가.. 저기 그림의 곡선은 베트남 파병시절에 나온 거죠. 월남에서 심리전 대민 봉사를 했는데 한국농악을 하더라고요. 베트남 마을 사람들에게 한국 병사들은 이런 걸 잘한다 보여줬는데..그게 상모 돌리기였죠.



Q . 선생님 작품이 구상이 아니잖아요. 추상인데도 금방 말씀하신대로 농악의 상모들, 우리 전통의 느낌이 있고요. 그리고 비엔날레에서도 빛 그림을 그리시면서 광주의 마음을 담았다고 하셨잖아요@f49 그 그림이 추상인데도 굉장히 사랑을 받았습니다@f50

A. 초대 비엔날레에 출품한 작품 제목이 [그날의 소리 그리고 빛]이거든요.
5・18 함성을 나타내고 설치로 해서 그 사이에서 빛이 나오고 7분 짜리 콘티를 짜서 계속 이어서 선보인 작품인데 아까 이야기대로 관람객들이 사랑을 해 준 그림이었어요.
최고 인기작가상을 받았죠. 처음 있는 이벤트였는데 그 뒤로 없어졌으니까 제가 유일 무이하게 인기 작가상을 받은 거죠.



Q. 사람들이 구상은 쉽게 접근하지만 추상은 어렵게 보잖아요. ‘좋은데 뭔지는 모르겠다’라고 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선생님의 작품은 추상인데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데요. 선생님의 추상 속에는 우리의 정서들이 녹아 있기 때문일까요@f51

A. 그렇죠. 정서가 있는 거죠. 여기서 태어나지 않고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 고향이 광양이고, 네 살 때 광주로 왔는데, 늘 나오는 이야기지만 반딧불이, 그 빛을, 사랑을 쫒아서 여기로 왔죠. 한 번은 그런 일이 있었어요. 천안에 땅을 샀어요. 고속철도 서는 곳에. 그런데 도저히 못가겠더라고. 버스 타고 오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한 번 떠나려고 했다가 다시 와 버렸어요.













Q. 선생님은 빛이라는 주제를 거의 50년, 48년 동안 하셨잖아요@f52

A. 평생 했다고 봐야죠.



Q. 선생님께서는 ‘빛의 화가’라고도 불리시는데... 하지만 광주는 빛이 너무 흔하잖아요. 빛고을 광주이기도 하고 전시회도 빛과 연관된 이름도 많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는 오랫동안 변치 않고 ‘빛’을 내내 가지고 오신 것이잖아요. 빛이 사랑이라고 하셨는데 사랑이 마지막 까지 지키기 어려운 것처럼..빛을 쭉 지킨 것도 쉽진 않았을 것 같아요@f53

A. 군대 갔다 와서 광주에 현대미술작가들이 모이는 [현대작가 에포크(Epoque)(광주 첫 추상미술단체)]라는 모임이 있었어요. 요즘으로 치면 광주비엔날레 같은 형식이었죠. 새로운 거, 실험적인 거... 1964년에 창립을 했는데 저는 월남 갔다 와서 4회 때부터 참여했어요. 그때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학장을 했던 광주사범학교 8년 선배가 ‘자네는 5년 주기로 해서 그림을 바꾼다고 생각하고 작업을 하소’ 라고 했어요. 실험적인 거를 하라는 주문이었죠. 그게 뇌리에 상당히 남아있었어요. 그런데 하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작업 방식이 바꿔져요.



Q. 빛이라는 테마는 평생 가지고 가지만, 작업 방식은 계속 바뀐 거네요@f54

A. 그래서 난 평생 한 분야만 가지고 하는 사람들을 이해 못해요. 하다보면 이렇게 바뀌고 그러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까 싶죠. 작업방식이 얼마나 많아요. 연필화, 수채화, 유화, 판화...



Q. 방식 뿐만 아니라 소재도 다양하게 쓰는데요. 이번 전시 작품 중에 한지를 이용한 작품도 있잖아요@f55

A. 제가 1990년대에 일본 화랑하고 전속을 맺고 전시를 오래 했거든요. 그때 일본 화방에 들렸더니 종이가 너무 너무 좋아요. 가져와서 봤더니 한국에서 수출한 거예요. 그때부터 한지에 관심을 가지게 됐죠. 그 이후로 색 한지에 작업을 했습니다.



Q. 선생님 작업 중에 또 다른 특이한 재료를 사용한 작품이 있을까요@f56

A. 80년대 광주가 국내에서 소외 되었을 때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대동고등학교 뒤쪽이죠. 금당산 가는 계곡에 가보니까 나무들, 판자들, 껍데기들이 쌓여 있어요. 그게 뭐냐면 외국에서 물건을 가져왔던 빈 컨테이너 박스들을 버려 놓은 거였어요. 부랑아들이 그 속에서 살기도 하고요. 그 판자들이 비 맞고 버려지고 먼지 쌓이고 험상스럽게 생겼는데 저는 ‘이거 가져다가 작업하면 되겠네.’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근데 이번 전시회에서는 빠졌네요. 제 작품의 연대기를 아는 사람들은 아쉬워 했죠.



Q. 이번이 96번째 개인전입니다. 지역 대표작가로 선정돼 이런 전시회를 하시기도 하고요. 혹시 선생님은 작가로써 꽃길만 걸으신 거 아니에요@f57

A. 전업 작가 이전에 교사를 31년 했어요. 유치원 빼고 다 가르쳤죠. 그러다 전업 작가를 했죠. 그런데 쉽지 않았어요. 고비를 많이 넘어야 했어요. 그림이 팔려야 하니까.. 어떻게 보면 전시를 많이 한 것도 작품을 팔아 보려고 열었던 측면도 있었어요. 와이프(김차순 관장)가 고생이 많았죠. 앞집에서 라면을 얻어 와서 끓어먹기도 하고 친정오빠한테 자금을 융통하기도 했으니까. 그런 고비를 넘어서 그 고통을 견디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Q. 왜 안정적인 교직을 버리고 전업 작가를 하신 거예요@f58

A. 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외국 전시를 너무 많이 했었죠. 파리에서 2번이나 하고 쾰른, 도쿄, 센다이, 후쿠오카 등에서 전시를 했죠. 그게 바로 90년대예요. 하도 외국전시를 많이 나가느라고 수업을 못하게 되니까 제자들한테 미안해서 사표를 냈죠. 연금 문제도 있고 교장 선생님이 만류하기도 했지만 ‘오늘 사표를 안 내면 안 되겠습니다.’ 하고 냈죠. 작업이 잘 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퇴직금 받아서 작품 하는데 집중 투자를 했어요. 작품에만 매진하면 더 잘 될 줄 알았죠. 그렇게 6미터 대작을 그랬는데 그때 당시 이게 ‘내 한계인가’ 싶게 다 끊겼죠. 그런데 그 작품 때문에 평론가협회가 선정한 미술인 100인에 들어갔어요. 아이러니하게.



Q. 그런 힘든 상황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요@f59

A. 2009년도에 한국미술평론가협회에서 33명의 평론가들이 한국 근현대미술의 좋은 작가들을 골라서 복수로 추천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선정된 작가가 104인. 광주 전남에 들어간 작가가 대략적으로 목포 남농 허건 선생, 진도 의재 허백련 선생, 고흥 천경자 선생, 광주 오지호·오승우 선생 그리고 우제길이 뽑혔어요. 2008년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한국 추상미술 50년 전에 들어갈 작가를 뽑았는데 거기도 들어갔죠. 그런 게 저한테 힘이 됐어요. 그렇다고 당장 그림이 잘 팔리는 게 아니지만 말이죠. 저도 유혹이 있었죠. 어떨 때는 비율을 맞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서 팔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그냥 제 길을 간 거죠.













Q. 선생님이 축복받은 작가라고 생각하는 게 「우제길 미술관」이 있잖아요. 개인적으로도 또 지역의 예술계에도 굉장히 중요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의재 미술관까지 쭉 연결되는 무등산 아트 로드의 출발점이잖아요@f60

A. 김차순 관장, 와이프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 승효상씨가 직접 와가지고 설계를 했고 창호도 이건 창호. 제대로 만들었죠. 그 안에 내 작품 뿐 만 아니라 월남 가서 받은 위문편지, 어머니 주민증, 어머니가 보내신 편지, 내 일기까지 모든 게 다 있어요. 또 우제길 미술관이 ACC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죠. 무등산 가는 길이고 양림동도 가깝고요. 과거와 현대가 공존할 수 있도록 시에서도 문화적으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싶죠.



Q. 선생님도 캔버스 앞에서 제일 행복하시죠@f61

A. 그렇죠. 그리고 이렇게 전시할 때, 사람들과 소통할 때 참 행복하고요. 제 작품들이 광주시립 미술관에 9점 있더라고요. 서울 시립미술관은 3점, 국립현대미술관은 6점, 부산시립미술관에 1점, 주로 우제길 작품은 법원에 많이 있어요. 인천지방법원도 그렇고. 대법원에 1000호짜리가 있고 헌법재판소에 200호, 특허법원에 300호, 광주지방법원에 300호, 고등검찰청에 300호, 국정원에 500호 되는 작품이 있어요. 큰 그림을 많이 했죠.



Q. 공직에 계신 분들이 선생님 작품을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f62

A. 판사들은 딱 정해졌잖아요. 그런데 제 그림도 각이 지기도 하고. 제 작품은 확실하거든요.



Q. 정확한. 그러면 조화를 이루는. 그렇기 때문에 그 분들이 더 사랑하는 그림이다@f63 그렇게 해석도 가능하겠네요@f64

A. 그렇게 봐주면 고맙죠.



Q. 요즘 미술계는 일러스트 같은 그림들이 유행인 것 같고...어떤 분들은 가볍다고도 하잖아요@f65 선생님 보시기엔 어떠세요@f66

A. 저는 괜찮다고 봐요. 왜냐면 남하고 다른 것. 자기만의 것을 어떻게 만들어 내냐. 그것이 관건이고요. 일단 열심히 하다 보면, 몸부림 속에서 작품을 하다보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요. 그것이 예술이잖아요.













 

 

 

 

공감 링크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