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Lagu~ Lagu <아시아의 소리와 음악>












인도네시아 대중음악은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집권층이나 민중의 요구에 따라 시대별로 유행하는 음악이 달라졌다. 1945년 독립 이후 인도네시아 첫 정권인 수카르노 구체제는 반서구 정책을 펴며 서양음악은 퇴폐적이고 현실 도피적이라 말한다. 락앤롤 방송을 금지하고 엘비스 프레슬리 음반을 압수, 비틀즈 스타일의 음악, 머리 모양을 하는 젊은이들을 단속하며 인기 있던 ‘코에스 플러스(Koes Plus)’밴드를 감금하기에 이른다. 이에 릴리스 수리야니(Lilis Surjani)는 정치에 협조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렌조(lenso-몰루카 섬의 무용을 위한 곡조로 손수건을 들고 춤을 추자는 미디엄 템포 음악)풍의 ‘활발하게(Bersua Rai)’라는 토속적 리듬의 노래를 불러 대중화에 기여한다. 티티엑 푸스파(Titiek Puspa)는 ‘엄마의 기도(Doa Ibu)’를 통해 어머니들이 얼마나 자식들이 나라에 봉사하는 것을 보고 싶은지 노래해 민족주의적인 메시지를 전달했고 이후 대표적인 대중가수로 오늘날까지 인기를 얻고 있다. 1960년대 관련 자료로 활발하게, 엄마의 기도 등 노래 자료와 잡지에 실린 ‘코에스 플러스’ 기사(구속과 관련 없음) 등이 전시되어 있다.





① (Varia 21 April. 1971 내지, 코에스플러스 기사) ② (Gaja Irama No 23 내지, 엄마의 기도(Doa Ibu)
③ (Gaja Irama No 18 내지, 활발하게(Bersua Rai)



이런 문화적 탄압은 1965년경 쿠데타로 수하르토의 신질서(New order)가 들어서면서 경제발전과 함께 히피족이 등장하고 음악, 영화 등 서양문화가 빠르게 번진다. 이때의 군부 독재정치는 친 서양, 반공산주의, 경제 성장형 정부로 특별한 제재가 없어 티티엑 푸스파나 수리야니 등이 음악의 주류를 차지하고 코에스 플러스가 복귀하여 부흥기를 맞는다.
1970년대 서양 대중음악인 락 음악이 특권층에서부터 풀려서 도시의 중산층 젊은이들 사이로 퍼져 나간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정치적 견해와 비판을 락 음악에 녹여내지만 국민의 복종을 끌어내려는 정부의 양분화 정책으로 도시(gedongan)와 마을(하위계층, kampungan)의 경제적 격차가 커지면서 음악 역시 락(전통락)과 당둣(혼종 음악)으로 나뉘어 나타난다. 1970년대 중반 가난한 하층민들 사이로 인기를 누린 당둣(dangdut)은 락 음악과 말레이 음악이 혼합되어 만들어지는데 팝 말레유(Pop Melayu)로도 불린다. 가수 로마 이라마(Rhoma Irama)가 당둣의 대가로 밤을 지새며(Begadang), 호기심(Penasaran), 젊은 피(Darah Muda) 등 노래를 히트시켰다. 전시장에서 코에스 플러스 와 다른 가수들의 노래를 들어볼 수 있다.






OM 소네타와 로마 이라마의 대표 앨범 모음집




1980년대 대중음악은 음악 페스티벌, 엘리트적인 크레아티프(kreatif) 팝, 달콤한 로맨스를 노래하는 쳉엥(cengeng) 팝, 사회 저층민의 목소리를 대변한 이완 팔스(Iwan Fals)로 설명된다. 음악 페스티벌로 <인도네시아 락페스티벌>이 1984년 만들어지고 야마하가 후원하는 <라이트뮤직 페스티벌> 등이 열려 재즈, 락, 퓨전 음악을 하는 밴드들의 수호자 역할을 했다. 크레아티프(kreatif) 팝은 ‘폭풍은 반드시 지나간다 (Badai Pasti Beriau)’라는 영화에 수록되어 큰 성공을 거두며 크리시에(Chrisye)를 성공한 가수로 만든다. 민속과 서구 장르의 융합을 한 새로운 세대의 음악가라 평가받는 파리즈(Fariz RM)는 크리시에와 크레아티프 팝의 두 거장이라 할 수 있다.
쳉엥(cengeng) 팝은 외모가 아름답거나 이미 드라마나 영화로 데뷔한 여자 가수들이 노래하고 멜로 드라마틱한 뮤직비디오가 같이 나오는 발라드 음악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다. 이완 팔스(Iwan Fals)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정치적 싸움에 동참한 대중음악계 록스타로 인도네시아의 ‘밥 딜런’으로도 불리며 소외된 빈민층의 대변인 역할을 했다. 평생 헌신하지만 생계가 힘든 늙은 교사 오마르 바크리 선생님 (Oemar Bakrie) 노래는 1980년대 궁핍한 현실을 노래하고 있다. 권위주의적이고 부패한 신질서(New order) 정부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노래로 녹여낸 이완 팔스의 노래들도 전시장의 헤드폰을 끼고 화면 터치로 골라 들을 수 있다.






· 폭풍은 반드시 지나간다_ 크리시에 · 이완 팔스 앨범 자켓 사진 · 파리즈_사쿠라




전시장 왼쪽 면은 시대를 담은 잡지들의 표지가 전시되어 있다. 잡지는 음악적 지식을 발전시키고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청년층 잡지 하이 Hai (hey ,hello 라는 감탄사)다.
미디 Midi는 하이 Hai 매거진의 초기 이름으로 초판이 1973년 발행된다. 초기부터 음악, 예술, 문학을 관심 있게 다루고 중·고등학생이 주된 독자층이었다. 1980년대 작은 마을에 사는 중산층 청소년들이 접할 수 있는 해외음악에 대한 정보는 하이 Hai 매거진이 유일했다. 하이 Hai는 음악 소식을 전하는데 그치지 않고 하이클럽(Hai club)을 만들어 학생들을 초대해 교내활동 리포트를 쓰고 본사 견학 체험 등 청소년을 위한 대안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후 1990년대 청년 남성시장을 위한 매거진으로 전환되었다. 청년층 잡지 하이 Hai 와 경쟁 관계에 있었던 1970년대 소녀들을 위한 잡지 가디스 Gadis와 청소년 잡지 가완쿠 Kawanku, 오락물에 초점을 둔 바리아 Varia 표지들도 전시되어 있다.






④ 전시장 잡지표지 ⑤ 하이클럽 첫미팅. Hai No 15. 17 April 1979 내지
⑥ Hai No 30, 26 July-1 Aug 1988 (2) 이완 팔스가 표지 모델로 나온 표지>



우리 역시 한때 금지곡이기도 했던 <아침이슬>을 1980년대 대학가 시위 학생들이, 2016년 촛불 집회에 모인 시민들이 한목소리로 외쳐 노래했다. 음악과 정치는 뗄 수 없는 관계로 이 전시는 인도네시아 대중음악이 항상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있음을 보여준다.
세 번의 격변기를 거친 인도네시아 대중음악은 냉전과 서구화, 민주화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해왔다. 우리와 비슷한 정치적인 상황을 거친 그들의 음악은 정치적 싸움의 장이 되기도 하고 억압받은 시기, 부흥하는 시기를 거쳐 민중들의 자유의사를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대중음악이란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 외치는 목소리가 아닐까. 추워진 날씨에 야외보다는 ACC 라이브러리 파크로 산책을 나가보자. 전시를 둘러보고 헤드폰을 끼면 인도네시아 파란만장한 역사를 살아낸 사람들의 감미롭거나 혹은 열정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열정과 저항이 담긴 민중의 노래 속에 녹아있는 그들의 삶의 열기를 느껴보자.





<본문 자료 출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라이브러리파크 아시아의 소리와 음악 주제전문관 인도네시아 대중음악 컬렉션 기획전 <lagu>~lagu 1960s-1970s="">
-인도네시아 대중음악 전문자원 조사수집 사업 최종결과보고서(2016, 아시아문화원) </lagu~lag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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