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에 새기다








남산은 돌로 만든 불국토이다. 1,300여 년의 세월 동안, 돌부처는 그렇게 그 자리에서 세파에 지친 우리들을 만나오고 있었다.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의 롱먼(龍門)석굴. 1km에 이르는 롱먼산이 마치 벌집 뚫린 거 마냥 온통 구멍투성이다. 2천 개가 넘는 동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천여 년이 넘는 세월을 견디고 10여만 점의 돌부처들이 살아남았다.


중국 롱먼석굴 전경. 1km에 이르는 롱먼산에 2천 개가 넘는 동굴을 파서 돌부처를 모셨다.



구태여 돌이 아니더라도 금이나 동으로, 아니면 만들기가 용이한 흙으로도 만들 수 있으련만. 옛 사람들은 왜 그리도 힘들게 많은 돌부처들을 만든 걸까. 사실 그들은 돌부처 말고도 금이나 흙으로 많은 부처를 만들었다. 다만 금전적 가치 때문에 녹여져 동전이나 무기로 재탄생되었거나, 아니면 부서져서 일찌감치 사라졌을 뿐이다. 돌부처는 단단한 돌로 만들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돌로 만들어 살아남은 게 또 있다. 백제 무령왕릉의 지석(誌石). 무덤의 입구에 놓였던 그 사각형 돌판 덕분에 우리는 무덤의 주인공이 백제의 무령왕과 그 부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그 지석이 없었다면 주변의 다른 무덤처럼 ‘송산리 ◯호분’정도로 불렸을 것이다.




무령왕릉 지석. 이 각석이 없었다면 이 무덤은 무령왕릉이 아니라 ‘송산리 ◯호분’으로 불렸을 것이다.
돌에 새긴 문자만이 남아 무덤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었다.



무덤의 정체성을 결정한 것은 무덤 속 값나가는 왕관도, 그리고 권력을 상징한다는 청동거울이나 검(劍)도 아니었다. 대략 가로 세로 40cm 정도의 조그만 석판이었다. 롱먼석굴도 마찬가지다. 그 많은 굴과 부처를 왜, 그리고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있다. 영원히 기념하기 위한 2,800여 개의 제기(題記)가 돌에 깊이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머나먼 이역에는 신라인이 만든 석굴도 있었다. 많은 것들은 사라졌지만, 롱먼산의 암벽에 새겨진 ‘신라상감(新羅像龕)’이란 글자는 천여 년의 세월에도 풍화되지 않고 단단히 살아남았다. 나무는 썩었고, 금속은 부식했지만, 돌과 돌에 새긴 글씨만은 영원히 남았다. 그래서 돌은 ‘영원을 기념하는’ 물질이 되었다. 천년만년 사라지지 말라고, 그리고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돌에 새겼다. 그들의 바람대로 돌에 새긴 것들은 천여 년 동안의 땅 속의 습기도, 지상의 비바람도 굳건히 버티어냈다.

‘석각문화(石刻文化)’의 탄생. 고대 동아시아인들은 돌에 영원을 기록했다. 부처만 만든 것도 아니고 글만 새긴 것도 아니다. 거기에 아름다운 화상(畵像)을 조각하기도 했다. 게다가 죽어서도 영원히 살기 위해 무덤을 아예 단단한 돌로 만들었다. 그러나 고대 동아시아인들이 처음부터 돌의 물질성에 주목한 것은 아니다. 글은 비단이나 나무 위에도 썼다. 그리고 오래오래 기념하기 위해서 거북이 등껍질이나 소뼈, 그리고 청동기 위에도 썼다. 소위 갑골문(甲骨文)이나 금문(金文)이란 것이다. 돌에 문자를 새기고 기록하는 전통은 진시황(秦始皇)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이를 기념해 산둥성(山東省)의 타이산(泰山)일대를 순행한 후, 천하 통일의 공업을 기리고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돌에 글을 새긴 것이 시초다. 그러나 시초는 시초일 뿐, 진시황 이후 석각문화가 바로 붐을 이룬 것은 아니다. 후한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국가의 조치 뿐 아니라, 개인의 업적을 기록하여 영원토록 전하기 위한 석비(石碑)문화가 본격적으로 만개하기 시작했다.




타이산의 각석. 산 정상의 너른 바위 면에 글을 새겨 영원히 기념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마애각석은 우리 산천에도 상당히 많다.



기원 1세기 중국의 후한시대, 동서 교통로의 개척과 그로 인한 동서문화의 교류가 커다란 문화적 전환을 가져왔다. 고대 동아시아 공통의 문화권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불교가 이 시기에 중국에 전래되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문화에서 돌이라는 매체가 새롭게 ‘발견’되었다.
고대 중국인들에게 죽음은 ‘마침’이 아니었다, 죽어서도 무덤 속에서 영원히 산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죽은 자 섬기기를 산 자 섬기듯(事死如生)’ 해야 했다. 황천에도 현실과 똑 같은, 아니 그들이 살고 싶은 ‘이상의 집’을 짓고자 했던 그들에게 견고한 돌은 그런 꿈을 실현해 줄 적절한 수단이었다.
애초 동아시인들은 돌집을 짓지 않았다. 모두 나무와 흙으로 집을 지었다. 그래서 진시황이 지었다는 화려한 아방궁도, 세계도시 장안성(長安城)의 웅위한 누각들도 모두 세월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터만 남았다. 1세기 동서 교통이 활발해지면서 돌집을 짓는 이역의 문화가 알려지자, 중국인들은 이것을 ‘죽어서도 살 영원한 집’에 적용하였다. 처음에는 나무를 대신해 돌로 관(棺)을 만들다가 아예 무덤까지 돌로 쌓기 시작했다. 돌방무덤[石室墓]의 출현이다. 그 돌에 삶의 영광과 즐거움, 그리고 죽어서 가고자 했던 이상세계 등을 새기거나 그려 넣어 무덤을 화려하게 치장하였다.




서쪽에서 돌집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자 중국인들은 땅 속의 영원한 집을 돌로 만들기 시작했다.
석실묘의 탄생은 죽어서도 영원히 살고 싶어 했던 인간의 열망이 만들어낸 이상 공간이었다.
사진은 산동성 이난시(沂南市) 베이차이(北寨)의 후한대 석실고분. 돌로 현실의 집을 모방해 지은 다음
돌 위에 삶의 영광과 즐거움, 그리고 죽어서 가고자 했던 이상세계 등을 새겼다.



벽화고분의 등장은 이와 같은 돌무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한편, 무덤 밖에는 돌로 비석을 세워 죽은 자를 기리고, 돌로 동물을 만들어 무덤을 지키도록 했다. 심지어 제사를 위한 사당까지 돌로 만들어 무덤 앞에 세웠다. 삶의 세계와는 다른 쪽에, 돌로 만든 영원한 세계를 창조해냈다. 불교가 들어오자 인도에서처럼 암벽을 파서 부처를 모셨다. 그러나 처음에 만들어진 석굴은 대부분 승려들의 수행 선정(禪定)을 위한 굴이었다. 그런데 황제권력이 불교를 탄압해 불상을 파괴하고 경전을 훼손하자 영원히 파괴되지 않을 신상(神像)과 경전에 대한 열망이 더욱 커져갔다. 5세기 후반부터 석굴을 크게 파고, 아름다운 돌을 골라 돌부처를 만드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갔다. 6세기에는 석가모니의 말씀, 즉 경전을 굴속이나 산 위의 넓적한 바위 면에 새기더니, 아예 목판을 대신해 석판의 대장경(大藏經)을 만드는 대역사가 진행되었다. 수나라 초에 시작해 명대(明代)까지 단속적으로 만들어진, 베이징(北京) 근교 팡산(房山)의 14만 개의 돌 경판이 그것이다.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불교 경전을 돌에 새기기도 했다. 베이징 근교 팡산에 있는 레이인동(雷音洞)의 석경(石經).
석굴 안 벽면의 돌은 모두 경전을 새긴 석판이다.



석각문화는 우리네 땅에도 들어왔다. 광개토왕비처럼 거대한 돌을 골라 공적을 새기고, 황천에는 무수한 돌집을 짓고 화려한 벽화를 그려 영원한 삶을 표상했다. 그리고 산에는 돌부처를 새기고, 들에는 돌탑을 만들었다. 심지어 돌을 나무 자르듯 잘라 집을 짓고 돌부처를 봉안하기도 했으니, 경주 석굴암은 영원에 대한 열망이 낳은 위대한 건축물이었다. 공적을 기록한 석비는 무덤에도, 또 삶의 터전인 마을 곳곳에도 세워졌다. 돌은 산 자의 공간에서도, 죽은 자의 공간에서도 이제 필수불가결한 문화가 된 것이다.




인간의 ‘영원’에 대한 열망이 만들어낸, 돌로 창조한 불국정토 석굴암.
사진은 석굴암 조성에 사용되었던 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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