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C레지던시' 참여작가













사진1) 임린 <조선시대 앵삼>, (사)한국의상협회 공모전 수상작 1998



티브이 사극을 보면 화려한 의복과 장식을 갖춘 궁중 여인들이 암투를 벌이고, 갑옷과 철릭을 입은 무관들이 전투를 지휘한다. 또 왁자한 저잣거리엔 소박한 옷을 걸친 남녀노소 사이로 곱게 차려 입은 기녀들이 나들이를 하기도 한다. 예전엔 시청자들이 이런 사극을 보다가 ‘옥에 티’를 찾곤 했다. 엑스트라로 나온 포졸이 ‘나이X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갈수록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옥에 티들은 찾아내기가 어렵다. 그만큼 제작자들이 고증에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증은 드라마 제작자들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복식, 건축, 역사 등 관련 전문가들의 도움이 있어야만 특정 시대의 삶을 실감나게 재현할 수 있다.




(사진2) 임린 <경주 이씨 명주솜저고리>, 광주전남지역 출토복식 고증전, 전남대학교 박물관 2006



20년 가까이 복식사를 연구하고 있는 임린 박사는 대학시절에 의류학과를 다녔다. 당시 의류학과를 졸업한 젊은이들이 주로 패션 디자인, 패션 마케팅, 섬유공예 쪽으로 진로를 정하던 분위기와 달리 그는 대학원에서 복식사를 공부했다. 인문학 중에서도 특히 역사 공부를 좋아했고 한편으로 한복을 만드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이런 소박한 마음에서 시작한 한국전통복식사 공부는 생각보다 단순치 않았다. 복식문화의 연구 대상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간이 몸에 걸치고 장식하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각종 의류, 모자, 허리띠, 가짜 머리, 장신구 등이 그런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이해하고 연구하려면 한문과 역사 외에도 고미술, 민속학, 인류학, 심리학, 건축학 등을 두루 섭렵해야 한다. 그야말로 인문학과 예술 전반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뿐만 아니다. 유물 발굴 작업에도 참여해야 하고, 자신이 고증한 옛 유물들을 실물로 재현할 수 있는 제작 능력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임린 박사는 대학원을 다닐 무렵인 1998년에 조선시대 유생들이 과거급제를 했을 때 착용하던 ‘앵삼’을 만들어 공모전에서 입상하였다(사진1). 또한 2000년에는 조선시대 의병장 고경명의 조부인 ‘고운’의 묘지 발굴에 참여했는데, 그때 출토된 16세기 미이라의 복식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2006년 ‘광주전남지역 출토복식 고증전’에는 영암에서 출토된 경주 이씨의 명주솜저고리를 재현하여 전시하였다(사진2). 임린 박사의 말에 따르면, 이렇게 직접 바느질을 하며 옷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전통복식을 더 정확히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연구도 더욱 정교해진다고 한다.




(사진3) 임린 <한국 여인의 전통 머리모양>, 민속원 2009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임린 박사는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연구 주제를 찾아나갔다. 한국연구재단의 후원으로 2007년부터 2008 년까지 명지대에서 박사 후 과정을 밟으며 고구려 고분벽화를 연구하였는데 특히 고분벽화에 나타난 연희복식을 연구하였다. 지도교수가 미술사 전공자였기 때문에 이 시기에 고미술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중국으로 건너갔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북경의 청화대를 다니면서 고분벽화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이때 쓴 연구논문이 <한국과 중국 고분벽화에 나타난 고대 가계의 비교 연구> 였다. 복식문화의 하나인 가계(加髻)는 가짜 머리 모양 장식을 의미하는데, 이를 통해 당시 남성 관리들의 모자처럼 여성들이 신분과 상황에 따라 어떤 머리 장식을 했는지 연구했다.

국내외에서 수행한 연구의 성과들이 축적되자 임린 박사는 2009년에 <한국 여인의 전통 머리모양>이라는 저서를 출간했다(사진3). 이 책에서 그는 한국 여인의 전통 머리모양 중에서 가계의 역사를 조명하였다. 가계가 시대별로 어떤 특성을 가지고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소개하고 그 의미와 가치를 밝혔다. 무엇보다도 그는 중국 문화의 영향권 내에 있으면서도 나름대로 형성된 한국 전통 머리모양의 독자성에 주목했다. 그것은 한국 복식의 원류를 중국에서 찾았던 복식사학계의 주류 연구방식과는 다른 접근이었다. 임린 박사는 고구려 고분벽화 중 안악 3호분의 여주인공의 머리에서 독자적인 한국 전통 머리모양의 단초를 발견했다. 그것은 둥근 띠를 두른 머리모양인데 고려 불화 속에 등장하는 왕비의 머리모양과 조선시대 왕실의 큰머리, 일명 거두미(巨頭味) 머리까지도 유사성이 이어진다고 보았다.




(사진4) 혜원 신윤복 <미인도>, 18세기 말~19세기 초



임린 박사의 관심은 단지 머리모양의 양식적 변화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는 여성들의 머리모양을 한 사회의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로 본다. 예를 들어 여성들의 머리모양이 크고 화려해지면 개인적으로는 부의 상징으로 볼 수 있지만, 사회 전체로 보면 풍속이 문란해진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일종의 가발인 가체(加髢)가 너무 화려해지자 영조, 정조시대에 이르러 몇 차례 가체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잘 알려진 신윤복의 미인도에서 그 시대(18세기 말~19세기 초)의 가체 양식을 엿볼 수 있다(사진4). 탐스러운 얹은머리와 꽉 조인 저고리 그리고 풍성한 치마로 이루어진 미인도에서 에로티시즘과 함께 한 사회의 말기적 징후도 느껴진다. 흥미로운 것은 비슷한 시기의 유럽에서도 가체가 발달하였다는 점인데, 주로 상류층 여성들의 신분 과시를 위해 사용되었던 장식적이고 사치스러운 가발이 그것이다. 그러한 가발의 유행은 결국 프랑스 대혁명의 전조 증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역사를 보면 과거의 생활 양태를 연구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삶을 더 정확히 이해하는 길임을 알 수 있다




좌- (사진5) 임린 <조선후기 배자>, 국제의상전, 고베 패션박물관, 일본2018
우- (사진6) 임린 <조선후기 나주목사 철릭>, 전남영산강축제, 나주목사 부임행렬행차 2007



고분벽화에서 시작된 임린 박사의 복식사 연구는 조선시대 후기에서 끝난다(사진5, 6).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복식사에서도 일제 강점기는 전통이 단절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자생적 또는 자발적으로 현대화되지 못한 우리 전통복식문화에 대해 그도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임린 박사는 고전 연구를 근본이자 바탕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의 관심이 반드시 과거에만 머물러 있진 않다. 요즘 젊은이들이 한복을 빌려 입고 고궁 나들이를 하며 셀카를 찍는 모습에서도 전통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읽어낸다. 어떤 식으로든 복식문화도 과거의 것과 현대의 것이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전통 복식의 재현 외에 전통적인 재료와 아름다움을 살린 현대적인 의상 제작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사진7).




(사진7) 임린 <동쪽The East>, 국제의상전, 이탈리아 밀라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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