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C레지던시' 참여작가













(사진1) 박세연_Untitled 1, AS EVER series, 91cm x 60cm, Pigment print, 2013



박세연 작가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2016년부터 베를린, 서울 등에서 자신이 평상시에 이용하는 여러 지하철역을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다. 신체적 행로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심리적 위치를 기록하는 작업이지만 본격적인 작품 사진들이라기보다는 자료의 축적에 목적이 있다. 이렇게 축적된 자료들은 앞으로 어떤 형태로 작업화될지 미지수다. 박세연 작가는 작업의 결과와 과정을 미리 설계하고 계획에 따라 작업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는 우선 자신의 일상에 주목한다. 특히 일상의 한 부분을 매우 오래 그리고 세밀하게 관찰한다. 그것은 숙성의 시간을 거치면서 점점 예술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즉 무언가 축적되면 적합한 표현의 방식을 찾는다는 말이다.




(사진2) 박세연_Untitled 14, AS EVER series, 91cm x 60cm, Pigment print, 2012



박세연 작가는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하면서 한편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사진이라는 매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한 후 지금까지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대학원을 졸업하던 2013년경부터 자신의 일상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여기엔 여러 고민들이 깔려 있었다. 당시 주변에서는 주로 대형 사진작품들을 전시하거나, 무언가 그럴듯한 주제가 표현되어야만 인정받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박세연 작가는 남들이 별로 눈여겨보지 않는 사소한 것들에 관심이 갔다. 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을 관찰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단순히 집안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장시간 집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평소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던 집의 모습들이 있었다. 그는 그 모습들을 사진으로 담아냈다.


15년 넘게 살아온 집을 관찰하면서 박세연 작가는 집이 여러 기억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기억은 세월이 흐르면서 집안 곳곳에 남겨진 흔적들로 드러나고 있었다. 흐릿한 빛이 머무는 둥근 식탁 위엔 작은 화병이 놓여 있었는데, 그 화병 뒤의 벽엔 마치 누군가 연필로 시커멓게 선을 그어 놓은 듯한 자국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지난날 쓰다 버린 식탁이 벽에 남긴 흔적이었다. 높이가 조금 낮은 식탁을 새로 사용하면서 과거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던 것이다(사진1). 다른 방에선 피아노가 무슨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피아노가 놓인 방구석의 그늘 속에 피아노의 자취가 기록되어 있었다. 오래전 피아노는 벽에 더 가깝게 붙어 있었는데, 언젠가 10센티미터 정도 옮겨졌던 것이다. 그 내력이 마치 사각형 도장의 형적처럼 장판 위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사진2). 또 다른 방에선 장판 색깔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부분은 누런색이 여전하고 어떤 부분은 퇴색해서 흐렸다. 누런색이 여전한 곳엔 작은 장이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자리에 장이 오래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장판 색깔과 경계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사진3).




(사진3) 박세연_Untitled 18, AS EVER series, 91cm x 60cm, Pigment print, 2013



이렇게 사물들은 조용하고 느리게 자신들의 흔적을 공간에 남기고 있었다. 박세연 작가는 기억을 자극하는 일상의 미시적인 풍경을 계속 탐구했다. 그는 지난날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 진행 중인 사물의 변화를 관찰했다. 그래서 벽에 걸려 있던 액자를 치우고 액자가 흔적을 만들어가고 있는 상태를 촬영하거나(사진4), 유리창을 통해 방바닥이나 천장에 머무르면서 사물의 변화에 간섭하고 있는 햇빛을 추적하기도 했다. 또한 집안과 밖을 연결해주는 유리창이 시시각각 새로운 풍경을 만드는 것도 발견하게 되었다. 햇빛이 드나들던 유리창은 어두운 밤이 되자 습기를 머금은 채 건너편 아파트의 불빛을 추상적인 이미지로 바꾸어 놓고 있었다(사진5). 흥미로운 점은 박세연 작가가 이렇게 평범한 집안의 풍경을 찍어놓았을 때 가장 큰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다름 아닌 가족이었다는 것이다. 한 집에 같이 사는 식구들조차도 박세연 작가가 촬영한 집안의 모습들을 상당히 낯설게 느꼈다는 말이다. 사진이라는 틀은 아무리 흔한 일상의 모습이라도 다시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일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곧이어 ‘지루한, 반복되는’이라는 수식어들과 ‘권태, 공허, 무기력, 무의미’ 같은 답답한 느낌의 단어들이 연상된다. 하지만 ‘일상’은 ‘평온한, 안정된, 소박한’처럼 긍정적인 느낌의 형용사들도 연상시킨다. 그래서 일상을 탈출하여 특별한 경험을 하고픈 마음과 익숙한 일상의 평온함을 맛보려는 마음은 날마다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다닌다.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때때로 흥겨운 축제에 취하거나 고통스러운 사건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일상은 특별한 사건을 거부하며 본연의 힘을 드러낸다. 그렇게 사람들은 삶의 배경처럼 자리 잡고 있는 밋밋한 일상이라는 풍경으로 다시 끌려오기 마련이다.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도도한 일상의 흐름이다. 그 일상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일찍이 수많은 예술가들이 일상을 주제로 다양한 표현을 해왔다. 박세연 작가도 삶의 고갱이라 할 수 있는 일상을 자신만의 섬세한 감성으로 바라보면서 예술의 언어로 변화시키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사진4) 박세연_Untitled 6, AS EVER series, 75cm x 60cm, Pigment print, 2011



박세연 작가는 요즘 영수증을 모으고 있다고 한다. 영수증 모으기는 그의 오랜 습관인데, 영수증을 자신의 일상이 기록된 자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는 영수증들을 날짜와 시간에 따라 사용한 순서대로 모으면서 그 속에 많은 숫자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그 숫자들이 자신의 일상을 추상적이면서 패턴화된 형태로 바라보게 만든다는 점에 주목했다. 숫자들을 추상적인 패턴으로 변환하면 흡사 디지털 기호처럼 배열된다. 이 영수증 속의 숫자들이 장기간에 걸쳐 쌓이면서 그의 상상력도 점점 다양하게 자라나고 있다. 그는 이 경험을 어떻게 시각화, 청각화할 것인지 여러 방면으로 고민 중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해왔던 사진 작업에서 벗어난 실험적인 작업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박세연 작가가 ACC에 머무는 동안 새롭게 표현할 일상의 풍경은 어떠할지 기대된다.




(사진5) 박세연_Untitled 19, AS EVER series, 60cm x 60cm, Pigment print, 2012




ACC에서는 국내•외의 많은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레지던스 프로그램들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레지던시' 섹션에서는 매월 참여예술가 1명(팀)을 집중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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