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C레지던시' 참여작가













ACC 미디어월-휴먼 플라이트-김제민 2017



예술가들의 욕망에는 두가지 방향성이 있다. 하나는 어떤 특정한 주제나 양식에 대해 깊이 천착하려는 특성이고, 다른 하나는 기성의 예술 영역을 넘어 새로운 영역을 탐사하고 표현을 확장하면서 동시에 영역간의 경계를 해체하려는 특성이다. 전자의 특성은 시대를 불문하고 예술가들의 보편적인 성향으로 볼 수 있지만, 후자의 특성은 시대에 따라 상이한 양상을 띠기 마련이다. 즉 각 시대마다 문화적, 기술적 환경들이 다르기 때문에 예술가들의 활동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활동 분야를 넘어 타 분야를 만나는 방식에도 크게 두가지 양상이 있다. 첫째로 서로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이 어울려 협업하는 방식이 있다. 하나의 작품을 위해 음악, 미술, 무용, 문학, 영화, 연극 등과 관련된 예술가들이 공동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종합적인 예술을 지향하려는 욕망은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19세기 바그너의 총체예술과 20세기의 해프닝, 플럭서스 같은 현대예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이런 공동작업에 과학기술과 첨단매체를 다루는 과학자, 기술자, 프로그래머, 연구자 등도 가세하는 형국이다. 둘째로 한 예술가가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방식이 있다. 재기발랄한 예술가들은 대체로 글, 그림, 연기, 사진, 영상, 노래, 춤, 퍼포먼스 등 다채로운 표현의 언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구사한다. 그들은 자신의 상상력을 하나의 방식만으로 표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자유분방한 창작활동 속에서 그들은 전통적인 장르의 경계를 가뿐히 무너뜨린다. 서로 이질적인 것들을 비비고 섞고 흔들어서 해체해버리고 다시 혼합한다. 해체와 융합이 창작의 밑바탕인 것이다. 그들에겐 다다이스트와 다빈치의 피가 함께 흐른다. 이제 그들의 모습은 동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의 전형이 되어가고 있다.




ACC 미디어월-타블로 비방-김제민 2017



ACC에서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예술가들이 함께 작업하는데, 그들은 특히 첨단 기술에 기반한 매체들을 활용하여 융복합적인 실험들을 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김제민 작가는 그의 복합적인 감성을 잘 보여주었다. 그는 대형 파사드에 두 개의 스크린이 있는 미디어 월의 구조를 적절히 활용하여 <타블로 비방(Tableau Vivant)>과 <휴먼 플라이트(Human Flight)>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살아 움직이는 그림’을 뜻하는 <타블로 비방>은 사진과 영상을 이용한 미디어아트 작품이다. 정지된 풍경 위로 기다리고 걷고 앉고 생각하는 인간 실루엣의 움직임이 시간성을 생성하며 중첩된다. 이를 통해 정지된 풍경은 새로운 생명력을 얻으면서 사유의 풍경으로 변한다(사진2,3). <휴먼 플라이트>에서는 인간과 기계적 대상의 관계를 상생적 공진화(coevolution)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가상현실의 공간인 세컨드 라이프, 피그말리온의 조각에서 아내로 변한 갈라테이아, 기하학적 비례를 보여주는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등을 보여주면서 기계, 기술과 융합된 신인류, 즉 포스트휴먼(posthuman)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작품에는 시인 함성호, 안무가 신창호, 사운드 아티스트 윤제호 등이 참여하였다(사진1). 김제민 작가의 작품들은 미디어 월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쇼케이스에서 관객들의 반응도 좋았다. 그밖에도 그는 레지던스 기간 동안 <타블로 비방>과 가상현실(virtual reality)과의 접목을 시도했는데, 이를 위해ACC의 창제작 기술팀과 함께 협업했다. 이런 체험을 통해 그는 다시 한번 표현의 가능성을 확장시켰다.




ACC 미디어월-타블로 비방-김제민 2017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것에 대한 김제민 작가의 관심은 대학시절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연극영화학과에서 연극연출을 전공했는데, 대학 3학년 수업에서 단편영화를 찍으면서 영상매체의 매력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그는 연극과 영화가 결합된 새로운 예술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미 영화와 연극이 결합된 키노드라마가 있었지만, 그는 이런 사실을 모른 채 필름(Film)과 연극(Theatre)을 합친 ‘필터(Filtre)’라는 합성어를 만들어 자신이 창조한 낯선 예술을 명명해보기도 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장르들을 융화시키는 작업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면서 대학원에서는 퍼포먼스에 기반한 미디어아트를 공부했고 아트 앤 테크놀로지의 연구원으로도 4년간 일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발표한 첫 작품은 <고도를 찾아가는 영극>이었다. ‘영극(映劇)’이라는 흥미로운 명칭을 붙인 것은 ‘영화와 연극이라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하나의 생명체 같은 작품’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2006년에 서울에서는 공연 형태로, 뉴욕에서는 싱글채널비디오 전시회 형태로 선보였다. 그가 대학시절부터 가져온 관심이 장르를 구분하지 않는 작업 방식으로 드러난 셈이다. 김제민 작가는 초기에 주로 개인적인 기억에서 비롯된 삶과 죽음 같은 관념적인 주제를 다루거나 허무주의적인 시각으로 세상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해방공간, 국가보안법, 해고노동자 등 역사, 정치, 사회문제 전반에 대해서 발언하는 작품들도 시도했다.


여러 방식으로 융합을 실험하던 그는 음악극 <노베첸토>(2012)에서도 연극과 음악을 결합시켰다.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에서 초연된 이 작품의 원작은 이탈리아 작가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희곡 <노베첸토 모놀로그>다. 1900년대 초 미국으로 가는 여객선 버지니아 호에서 태어나 평생 배 위에서만 연주를 한 천재적인 피아니스트 노베첸토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노베첸토는 바다 한가운데서 낡은 버지니아 호가 폭파되는 순간까지도 자신만의 음악을 연주하며 최후를 맞는다. 예술의 세계를 은유하는 듯한 배라는 공간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한 예술가의 진지한 태도가 매우 상징적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연출가 김제민은 모노드라마와 재즈, 클래식 피아노 연주가 함께 하는 방식으로 노베첸토의 이야기를 새롭게 풀어냈다(사진4). 초기에 주로 전통적인 극장에서 작품을 발표하던 그는 극장 외에도 대안이 될 만한 공간을 찾아서 실험성 짙은 작업을 이어갔다. 구 서울역 역사, 정다방, 폐수처리장, 클럽, 광장, 술집 등이 그런 곳이었다. 구 서울역 역사에서는 전시와 퍼포먼스가 혼합된 <헤테로토피아>(2014)를 발표했고(사진5), 클럽에서는 전시와 퍼포먼스가 융합된 <유포리아>(2015) 등을 선보였다.




노베첸토-김제민 2012



아티스트 김제민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그런 호기심이 상이한 분야를 뒤섞고, 첨단 매체들을 수용하고, 타 장르의 예술가들과 지속적으로 협업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그에게 융복합적인 작업이란 연대를 통해 상상력을 무한히 확장시키는 방법이다. 다종다양한 창작자들 사이의 네트워크적인 결합은 예술가 개인이 가늠할 수 없는 신선한 작품을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그 결합 과정에는 수많은 어려움도 공존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하고, 타 분야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소통과 협력을 해나가야만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다보면 다른 차원의 지평이 열린다. 김제민 작가는 현재 포스트휴먼을 주제로 전시퍼포먼스를 준비 중이다. 이는 이전 작업과 연결된 것으로 오류를 통해 진화하는 기계와 인간의 문제를 다룰 예정이다. 여기엔 기술의 진화와 인간의 오류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이 깔려 있다. 이 작품에서도 역시 다방면의 전문가들과 함께 인공지능, 가상현실 등 여러 매체를 실험할 계획이다. 그는 첨단 과학기술에 기반한 매체들에 주목한다. 그것들이 인간들의 삶에 점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에는 기술의 발전 속도가 너무나 빠르다. 새로운 매체를 이해하고 활용하기도 전에 또 다른 신기술이 등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급속한 변화에 적응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하지만 김제민 작가처럼 예민한 촉각을 지닌 예술가들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예술과 기술의 연금술적 혼융을 시도하면서 창의적인 예술과 그것이 펼쳐질 세계를 끊임없이 상상한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88개의 건반이 있는 피아노로 자신이 상상하는 세상을 끊임없이 그려냈던 노베첸토처럼.




헤테로토피아-김제민 2014




ACC에서는 국내•외의 많은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레지던스 프로그램들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레지던시' 섹션에서는 매월 참여예술가 1명(팀)을 집중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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