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예술

피와 땀이 서린 현장이 살아있는 전시를 기대한다.








전시를 보다 풍성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보기 위해 1980년대 광주에서 실천으로서의 미술 작업을 활발하게 하신 두 분 작가님을 모시고 예술은 시대의 정치적 현안에 응답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신경호 작가는 서양화를 전공했고,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동하셨고, 허달용 작가는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광미공)’의 동인으로 활동하셨다.

민중미술의 태동은 광주의 '광주자유미술인협회(광자협) ‘의 결성과 서울에서 '현실과 발언(이하 '현발')의 결성으로 시작한다. 이 두 단체의 결성이 곧 민족민중미술사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광자협'은 8월에 창립선언문을 준비하고 9월에 광주 근교 송정리의 공원에 모여 활동의 방향을 모색했고, 이듬해 광주 오월을 맞았다. 광주 5.18의 참혹한 현장 속에서 미술은 기록과 증언으로 언론의 기능을 하며 치열하게 사회와 만났다.






1980년 10월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은 대학로의 미술회관(현재 아르코미술관) 지하 전시실에서 창립전을 개최하면서 민중미술의 서막을 열었다. 그러나 작품의 사회비판적 수위에 놀란 당시 관장은 개막식 직전 전시 취소를 지시한다. 김정헌 작가를 비롯한 참여 작가 3인의 항의가 있었지만, 관장은 운영위원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라며 단호하게 취소를 종용했다. 전시장의 전기가 차단되자 캄캄한 지하에서 개막을 위해 모여 있던 작가와 관객 20-30명은 급히 초를 사다 촛불로 작품을 비춰가며 관람했다. 창립전이 무산된 ‘현발’측은 이후 미술회관에서 전시 작품을 철수하고 대책을 모색하던 중 전후 사정을 전해들은 동산방 화랑 박주환 사장의 도움으로 인사동의 동산방 1, 2층으로 옮겨 ‘현발’ 창립전을 열게 되었다.

《베를린에서 베트남까지》 전시에서는 전 세계의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작가로는 김정헌, 민정기, 노원희, 홍성담 작가 등이 소개 되고 있다. 김정헌, 노원희, 민정기, 최민화 작가는 ‘현실과 발언’의 창립멤버이고, 오월판화연작을 소개한 홍성담 작가는 '광주자유미술인협회(광자협)'를 공동으로 결성하여 5.18민주화운동과 문화예술운동에서 활동하였으며, 이후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광미공)를 주도했으며, ‘민족미술인협회(민미협)’ 등에서 활동했다.

1988년 광주에서는 시각매체연구회와 광주전남목판화연구회를 주축으로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광미공)’를 결성한다.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는 ‘뜨겁게 달아오른 `80년 5·18 이후 뜨거워진 시대변혁의 욕구와 실천의지들로 긴장이 높아있던 1988년 10월 28일 YWCA소강당에서, '민족민중미술'이라는 민족적 리얼리즘 형식을 바탕으로 미술의 시대적 소명과 사회현실에 대한 적극적 참여 역할을 모색하며’ 결성하였다. 1989년 5월 3일 남봉미술관에서 창립전을 갖고, 2002년 ‘아홉 번째 겨울미술학교’를 끝으로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중반, 그리고 2002년 해체까지 오월이면, 금남로 거리에서 거리미술전을 선보이며 가장 가까이 민중 곁에 자리하며, 광주현대미술사의 획을 그었다.





(홍성담 작, 대동세상)




신경호 작가: 내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딱 10년을 생활하고 1977년에 광주로 내려왔어요. 그 때 홍성담, 황재형 등을 만났는데, 돌고개집 골목길 입구 푸줏간에서 소주를 마시면서 “선생님! 그림을 그렇게 그려도 됩니까?”라고 물어서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그림이라고 하는가? 대체 무엇을 그리려고 하는가?”하고 물으니 “아니 선생님처럼 그림을 그렇게 그려도 되느냐”고 다시 묻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면 그림이 되는 것이지, 그림을 이렇게 그려야 된다고, 그런 놈이 있어?”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나는 사실 ‘현실과 발언’의 창립 전부터 함께했지만, 발기인은 아니오. 당시 미술판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시대를 증언함으로써 저항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에 집중을 했어요. 그래서 ‘현실과 발언’이 ‘미술이 정치의 도구가 되어도 좋다’라는 생각에 동의한다면 참여하겠다고 말했어요. 처음 시작은 ‘현실과 발언’이라는 이름도 없었죠. 그 때는 박정희 시대였죠. ‘정치적 발언으로서 미술’에 대해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1978년도 말엔가, 김정헌 작가의 장형이 경영하던 대학로 정림건축 지하에 1주일마다 모여 그동안 시도한 에스키스 등 자료를 가지고 와서 격렬한 토론을 했지요. 박정희가 죽고 타켓을 잃어버린 듯 했어요. 표적이 사라져버린 것이죠! 이후 광주에서 80년 오월을 지켜봤고, 80년 10월 창립전이 억압 받았고, 그러면서 우리들의 그림은 ‘불온한 것’으로 몰렸어요. 우리는 미술의 형식과 내용 그리고 시대현실에 대해 생각하면서, 예컨대 그림이라고 일컬어지는 것, 또는 과거 예술의 영역에서 축출했던 것까지를 포함한 모든 가시적 대상을 다양하게 실험함으로써 미술의 영역을 확산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만화, 판화, 포스터, 콜라주 등을 다양하게 동원했지요. 즉 과거의 미술 기법으로 보면 미술이 아닌 것들을 미술의 이름으로 불러와 실천하려고 했어요.







허달용 : 나는 사실 대학 때 이른바 학생 운동권은 아니었어요. 박관현 열사가 돌아가시고, 수업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동양화를 통해 작업에 집중하면서 광주에서 80년대를 보냈어요. 그 때는 술만 먹고 다녔지요 (웃음). 모이면 그림 그리기 보다는 뭔가 회의만 지속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용어로 ‘택’짜는 이야기만 많이 했지요. 그림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광미공)이 결성될 때, 전남대 이태호 교수님으로부터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당연히 함께 참여했어요. 졸업하고 이런 단체가 있구나 하고 알게 되었지요. 미안한 마음과 두려움으로 함께 참여했습니다. 주로 유화와 수목을 하다가, 내용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림은 무엇일까, 무엇을 그려야 할까 늘 생각하던 시기였죠. 처음 창립전은 전일빌딩에 있는 남봉미술관에서 창립 전시가 열렸어요. 몇 번 열리다가 당시 안기부의 통제로 결국 1992년부터 금남로 거리로 나오게 되었어요. 그 덕분에 정말 거리에서 노가다를 많이 했습니다.(웃음) 금남로 거리에서 ‘오월전’을 할 때는 거리에서 했기 때문에 그림을 매일 매일 걸고, 치우고, 걸고, 치우고, 또 걸었어요. 망월묘역에서도 걸개그림을 걸었고요. 오월에는 유독 비가 많이 왔습니다. 일만 했던 기억이 나죠. 일은 힘들었지만, 미술은 금남로 거리에서 민중들과 함께 호흡하며 당대 미술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광미공)’은 1989년 5월 3일 ‘창립5월전’을 시작으로, 1990년 <10일간의 항쟁, 10년간의 역사전>(남봉갤러리), 1991년 <5월에 본 미국전> (망월묘역), <걸개그림‘오월전사’ 제작> (망월묘역 중앙상단 전시), <삶의 현장전>, <일하는 사람들전>, 1992년 첫 금남로 거리전 <더 넓은 민중의 바다로>전, 1993년 <일하는 사람들전>, 오월전 <희망을 위하여>, 겨울미술학교, 1994년 <황토현에서 금남로까지>, <민중미술15년전>(국립현대미술관), 5월전 <희망의 무등을 넘어>, 1995년 오월전 <5월 특별법 제정을 위한 35인의 가해자 얼굴전> (금남로 거리) 등 전시를 개최하며, ‘오월전’으로 대표되는 정기 ․비정기전과 민중민족미술을 지향하는 안팎의 여러 기획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했다.


허달용: 나는 스타보다는 지역의 젊은 작가들의 그림을 더 보고 싶어요. 홍성담과 같은 작가는 이제 민중미술가로서 우뚝 섰다고 생각합니다. 홍성담의 작품뿐만 아니라, 광주시민들은 더욱더 다양한 감각과 시선으로 전시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해요. 광주에는 여러 시선의 작가들이 존재합니다. 또한 새로운 세대 작가들에 대한 가능성도 살펴야 하구요. 의미를 부여하는 일, 기획자들은 좀 더 치열하게 현장에서 작가들과 만나고 전시를 기획하면 좋겠어요.







신경호  : 저는 광주시민들이 질문할 수 있는 전시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색과 형태에 대해 보다 치열하게 관객들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세대가 미술을 만나는 방식, 예술을 읽는 방식을 새롭게 고민해 봐야겠죠. 정말 살아 있는 전시가 아시아문화전당에서 이루어져야 관객은 더욱 관심을 갖게 된다고 봅니다. 그것은 질문이 있는 전시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밑바닥에서 혹독하고 치열하게 전시 기획을 통해 예를 들면 ‘신학철’ 작가를 새롭게 다른 시대와 작가와 잇고, 다시 보게 하는 방식으로 전시하면 좋겠어요. 임옥상씨의 작품 북에서 남으로 넘어오는 문익환 그린 그림을 왜 <베트남에서 베를린까지>에서 놓쳤는지 아쉽습니다!


허달용 : ‘현실과 발언’의 경우, 1987년 6월 항쟁을 거치며, 미술과 현실의 관계가 더욱 밀접하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1985년 ‘힘’전과, 신학철 ‘모내기’ 등을 기관에서 탈취하면서 오히려 현실에 더욱 영향력을 끼쳤다고 보고 있습니다.


신경호  : 미술은 더욱더 다양한 방식으로 분화하였습니다. 전통 회화로부터 구호로서의 그림, 플래카드, 걸개그림, 만장 등으로 확장하였습니다. 전두환 정권 당시에도 블랙리스트가 존재했어요. 오히려 작품의 의미를 정권에서 만들어내는 셈이었어요. ‘현실과 발언’이라는 명칭은 최민, 성완경, 故 원동석선생이 ‘현실’과 ‘발언’의 의미와 의의를 집중 토론하고 전체의 동의를 얻어 <현실과 발언>의 이름을 획득한 것이지요. 1987년 6월 항쟁과 ‘현실과 발언’의 영향관계에 대한 가설은 맞는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거대한 우상이 사라지자 ‘현실과 발언’ 회원들의 생각도 차츰 미술이 종래 가졌던 역할과 기능에 대한 회의에서 탈출, 기존 미술권력이 쥐고 있던 권능을 깨부수는 방향으로 이행하였는데, 제가 아직도 삭이지 못한 응어리는 미술은 왜 정치적 발언을 금기시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마오쩌둥 그림>



신경호  : 이번 전시에서 눈에 들어왔던 작품은 <뉴욕 앞에서>(1974)에요. 그림을 보니까 ‘손을 흔드는 마오쩌둥’의 모습이 보였는데, 당시 중국 역시 정치와 예술과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봐야 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전시 안내자에게 물으니, 이번에 중국 작가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의아했어요. (※<뉴욕 앞에서>(1974)는 아이슬란드 작가 에로의 작품이다) 안내자의 말로는 당시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문화에서 중국 체제가 억압적이므로 자유로운 예술 활동이 없었고, 그래서 저항 예술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정말 그럴까, 예술이 그러한가,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도에 대한 저항, 국가에 대한 저항, 인간에 대한 저항 등 저항의 형식은 사실 다양한 것이거든요. 과연 무엇에 대한 저항인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광주는 억압 속에서 예술이 자라났다는 것을 우리는 상기한다.


허달용 : 요즘은 다양한 예술 형식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합니다. 예전에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작품이 좋았지만, 요즘은 다시 고민케 하는 작품이 좋습니다. 신경호 작가의 <넋이라도 있고 없고> 시리즈 작품들도 요즘 다시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아시아문화전당에서 ‘아시아의 타투’전을 보았는데, 위안부 할머니의 얼굴을 타투로 묘사한 것이 참 좋았습니다. 그러한 작품들이 좀 더 이러한 전시에서 관객들과 만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스타 중심 보다는 주변부가 보이는 전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살아있음이라고 생각해요.


신경호  : 나는 사람들에게 자문해 보길 권하고 싶어요. 아름다움이라는 환상에 대해서, 무엇이 진정한 아름다움인가에 대해서 말이죠. 아름다움의 기준은 단 하나 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질문해야죠. 또한 아름다움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가치를 의심해 봐야죠. 그래서 순혈주의나 교조적인 것이 아닌,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 있는 그러한 전시를 희망하고 있어요. 그래서 현장의 피와 땀이 서린 살아 있는 전시를 만나고 싶습니다.









(글, 인터뷰 ACC 웹진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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