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로 읽는 아시아

사랑을 이루지 못한 영혼들이 돌아가는 땅 나시족 신화와 정사 情死




<인샹리장>의 한 장면: 김선자 ⓒ


이 사진은 중국 영화계의 5세대 감독을 대표하는 장이머우(張藝謀)의 대형 야외공연 <인샹리장(印象麗江)>의 한 장면이다. 젊은 남녀가 하얀 말을 타고 높은 산을 가리키며 그곳을 향해 가고 있다. 마치 다정한 연인이 산책을 하는 것 같은 모습이지만 사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나시족(納西族) 서사시의 한 장면이다. 사랑하는 연인이 부모의 반대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정사(情死)를 하여, 머나먼 설산(雪山) 꼭대기 어딘가에 있다고 하는 죽은 연인들의 낙원을 향해 떠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위룽설산 아래 자리 잡은 리장고성: 김선자 ⓒ


윈난성(雲南省) 리장(麗江)에는 오래된 고성(古城)이 있다. 고성의 골목길에는 차갑고 맑은 물이 흐르고, 고성 뒤에는 5,500미터에 달하는 아름다운 위룽설산(玉龍雪山)이 솟아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성에는 관광객이 넘쳐나고, 오래된 그들의 신화나 서사시는 이미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구 30만 명에 불과한 나시족이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들은 만만치 않은 문화적 전통을 보유하고 있다.











리장 스터우청의 나시족 마을: 김선자 ⓒ


나시족이 거주하는 곳은 해발고도가 2,600미터 이상 되는 고원지대이다. 생존환경이 상당히 취약한 그곳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맑은 물이기에 리장 사람들은 물이 있는 곳엔 어디나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뱀 모양의 꼬리를 하고 있는 그 자연신을 ‘수’라고 부르며 제사를 올린다. 수와 인간은 형제였으며 각각 자신의 영역에서 살았다. 그러나 인간이 점점 많아지면서 자연신의 영역을 침범하여 산을 파괴하고 물을 더럽히자, 자연신이 분노하여 홍수를 내린다. 인간 역시 자신들이 노력해 개간한 농경지를 자연신이 망친다고 화가 났다. 결국 나시족의 천신은 인간과 자연신의 분쟁을 조정하여 인간과 자연이 각각 자신의 영역에서 균형을 이루며 살아갈 것을 권했고, 이후 자연과 인간은 서로의 영역을 지키며 살았다. 지금도 리장의 물이 맑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신화는 인간과 자연의 균형에 관한 알레고리이다.



리장 위수자이(玉水寨)의 자연신 ‘수’의 모습: 김선자 ⓒ


그러나 이렇게 맑은 물이 흐르는 리장에도 슬픈 역사는 있다. ‘정사’에 얽힌 이야기가 그것이다. 윈난성의 여러 민족들에게는 죽음 뒤에 가는 세상에 대한 신화가 있다. 그 세상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민족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곳이 ‘조상들의 땅’이라는 것이다. 티베트 쪽에서부터 머나먼 이주의 과정을 거쳐 윈난성으로 내려와 거주하게 된 민족들은 죽은 후에 영혼이 최초로 떠나온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살한 영혼은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영원히 불멸하는 그들의 영혼은 구천을 떠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윈난성의 여러 민족들은 자살을 금기시 했다.하지만 유독 나시족의 땅에는 20세기 중반까지도 ‘정사’ 풍조가 성했다. 왜 그랬던 것일까. 리장은 원래 유교 이데올로기에 물든 중원 지역과는 관계가 없는 땅이었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이어지던 그 사회에서는 연애가 자유로웠다. 그러나 몽골의 쿠빌라이 칸이 윈난에 내려왔다가 물러간 후 한족의 명나라 정부가 이곳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족의 유교이데올로기 역시 이 땅으로 들어왔고, 청나라에 들어서면서 점차 부모가 정해주는 사람과 혼인을 강요받았다. 습속의 변화는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래서 리장 인근에는 연인들이 떨어져 죽었다는 절벽, 목을 맸다는 나무, 죽음을 택할 때 마셨다는 독약 등에 관한 이야기가 수없이 많이 전승된다.











정사한 연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 김선자 ⓒ


물론 이데올로기적 요소도 있었겠지만 나시족 연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에는 그들의 영혼이 죽은 뒤에 정사한 연인들의 낙원에 가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신화와 관련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부르는 ‘구치’라는 곡조는 너무나 슬퍼서 듣는 사람을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것이 고통에 빠진 연인들을 위룽설산의 낙원으로 이끄는 신화 속 여신의 노래 소리와 같았기 때문일까. 부모의 중매를 거부하는 연인, 동성 연인, 세상에서 ‘불륜’이라 일컫는 연인들이 이승에서 욕을 먹으며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기보다는 차라리 안온한 여신의 낙원으로 떠나 그곳에서 연인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기를 소망했다. 사랑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닐진대, 그러한 선택으로 내몰렸을 그들의 상황을 생각하면 새삼 가슴이 시려온다.



정사한 연인들의 낙원이 있다고 여겨겼던 위룽설산: 김선자 ⓒ


김선자(연세대학교 중국연구원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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