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와 한국

1500년 역사적 만남의 현대적 재현



새로운 문화 콘텐츠 보고로서 중동과 이란


오랜 숙적인 미국과 이란이 핵협상을 전격 타결하고 중동 최대 시장인 이란에 대한 37년간의 경제제재가 해제됨으로써 중동에 새로운 제2의 붐이 찾아오고 있다. 이란 시장 개방은, 첫째 중동 갈등의 해결국면 조성, 둘째 유가안정을 통한 세계경제 기여, 셋째 침체에 빠진 한국경제 성장 동력 견인 등에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란은 세계 4위의 원유생산국에 세계 최대의 천연가스와 우라늄광을 보유하고 있다. 나아가 중동 최대의 농산부국으로 인구 8천만의 높은 생산성을 가진 나라다.

이번 칼럼에서는 이런 경제적인 것 외에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1200년 페르시아 문명의 후예들이 품고 있는 어마어마한 문화유산과 ‘Korea’에 관한 그들의 소중한 역사적 기억을 소개하고자 한다. 1500년 역사적 만남의 현대적 재현이야 말로 멋진 문화교류의 꽃이 아니겠는가?



브르카를 쓴 여인 사진 (박종우, 2010)





‘대장금 신드롬’과 한류열풍


연구차 1년에 5-6차례씩 중동 지역에 갈 때마다 나는 한국인이란 이유만으로 최고의 대접을 받을 때가 많다. 한류 열풍 덕분이다. 그들은 선뜻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한국을 좋아한다. 케이팝(K-Pop)과 드라마를 중심으로 한식·태권도·축구·게임·한국어 사랑은 기본이고 한국인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대학생도 적지 않다. 나라마다 운영되는 ‘코리아 카페(Korea Cafe)’는 수만에서 수십만 명의 회원을 거느리며 중동 문화지도를 새롭게 그리고 있다.

2006년 소개된 이집트에서의 ‘겨울연가’ 열풍도 대단했지만 2007년 이란에서 방영된 ‘대장금’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6개월 평균 시청률이 90%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대장금 신드롬’엔 일종의 문화적 배경이 숨어 있다. 궁궐 내에서 온갖 모함과 중상모략에 시달리면서도 최고 상궁 자리에 오르는 대장금의 드라마틱한 휴먼 스토리는 근대 서구 열강의 침략과 식민 지배로 수많은 침탈을 당해 온 중동 지역 이슬람인의 고통과 꽤 많이 닮아 있다. 중동인들은 대장금이 던지는 희망과 성공의 메시지에도 위안을 얻는다. 그들이 대장금을 보며 “이건 내 얘기야(This is my story)!”라고 외치는 건 그 때문이다.

대장금 같은 한국 사극은 전형적 권선징악 구도와 언뜻 히잡과 비슷해 보이는 극중 궁궐 의상도 이슬람 특유의 종교적 미풍양속과 조화를 이루어 문화적 친근감을 준다.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 사계절이 뚜렷한 가운데 어디서나 계곡물이 흐르고 형형색색의 꽃과 나무가 만발한 경치도 중동인을 매료시킨다. ‘알라가 코란에서 약속하신 파라다이스나 유토피아가 바로 저런 곳이 아닐까?’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실제로 적지 않은 아랍고전에서 고대 신라를 ‘동방의 유토피아’로 묘사하며 극찬하는 대목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금요일 밤 모스크 (박종우, 2010)


바로 이 대목이다. 한국과 중동사이에 있어왔던 오랜 역사적 교류와 문화적 접촉을 밝히는 일이야말로 1500년간이나 잊혀왔던 두 세계를 다시 연결시켜주고 무슨 이유로도 설명되지 않는 조건 없는 친한적 친밀감을 진정한 문화교류로 승화시킬 수 있는 최고의 콘텐츠다. 아랍 상인들은 9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해로를 통해 신라에 빈번하게 내왕했다. 그들 대부분은 귀국을 포기하고 신라에 눌러 살았다. 척박한 사막 오아시스에서 물과 초원을 그리며 살아가던 그들에게 사계절의 아름다움과 풍성한 먹을거리, 광물과 금이 풍부한 신라야 말로 최고의 거주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신라를 사라져 버린 낙원 아틀란티스에 비유하기도 하고, 아무리 불치병 환자라도 신라에 오기만 하면 씻은 듯이 나아버린다고 기술하면서 한국의 쾌적한 삶의 조건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의 한국을 향한 동경은 신라이후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고려초기에는 대식이라 불리는 아랍상인들이 수백 명씩 사절단을 이루며 개성을 드나들었고, 몽골의 간섭을 받던 고려 말에는 한반도에 그들만의 집단 공동체를 이루며 모스크까지 짓고 살았을 정도다. 그러면서 우수한 이슬람 과학기술과 유용한 첨단 정보를 우리사회에 전달해 주었다. 조선 초기 세종대왕 때는 음력의 정비는 물론 각종 과학기기의 발명에도 커다란 공헌을 했다. 이슬람 대표들은 임금의 초청으로 궁중에 초대되어 코란까지 낭송할 정도로 우리사회와 이슬람문화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공주의 천년사랑-쿠쉬나메의 대발견



이란 고대 채색화 ‘이란의 왕자가 신라의 공주를 만나는 장면’(필자촬영· 제공)

신라를 기록한 페르시아 문헌(필자 제공, 영국 국립 박물관 소장)


최근에는 쿠쉬나메라는 고대 이란 서사시가 발굴되어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다. 쿠쉬나메는 고대 신라를 기록한 페르시아 고전 서사시로,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공주의 천년 사랑을 담았다. 2013년 영국 국립박물관에서 국내학자에 의해 발견된 이 필사본은 전체 8백여 쪽 중에서 신라부분이 5백 쪽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소중하고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650년경 사산조 페르시아가 아랍의 공격으로 멸망하자,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자 피루즈와 왕실가족들은 중국 당나라에 피신했다. 그런데 651년 중국 당나라 고종과 이슬람 제국사이에 공식 외교관계가 수립되면서, 적국의 왕실 가족을 보호해 주기 어려웠던 당나라는 이들을 내쫓게 된다. 그리고는 역사기록에서 이들의 존재는 사라진다. 그런 그들이 놀랍게도 쿠쉬나메란 서사시에서 페르시아 왕자 아비틴이란 이름으로 신라로 이주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신라는 삼국통일을 앞두고 고구려, 백제와 치열한 전쟁을 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첨단 기술과 무기를 갖추고 국제정세에 밝은 페르시아 왕자일행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신라왕은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였고 아비틴 일행은 화랑도에게 군사기술과 폴로경기를 가르쳐 주는 등 신라의 통일에 큰 업적을 세우게 된다. 무엇보다 페르시아 왕자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릎 쓰고 아름다운 신라공주와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 후 페르시아 왕자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신라공주를 데리고 다시 험난한 바닷길을 따라 페르시아로 돌아가게 된다. 고토회복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페르시아 왕실 가족들은 신라에서 생활했던 소중한 기억과 경험들을 소상하고 흥미롭게 기록했다. 신라는 그들에게 구세주의 땅이었고 이제 어머니와 할머니의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이 책에는 신라의 기후, 지리, 천문지식, 궁중의례와 음식, 복식, 음악 등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가 담겨있다. 동시에 실크로드를 따라 펼쳐진 장대한 전쟁과 이주, 모험과 고난, 사랑과 이별, 배신과 복수 같은 풍성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처럼 고대 한반도와 세계의 교류는 실크로드라는 문명의 젖줄을 통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새로운 세상과 물자, 문화에 대한 우리민족의 진취적 호기심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것이 오늘날 세계를 휘젓는 한류의 원동력이자 한국인의 글로벌 DNA의 원천이라는 생각이다. 이미 1500년 전 한반도는 당시 지구촌에서 유행하는 트렌드와 패션, 사치품과 앞선 기술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고대 왕 묘에서 발견된 봉수형 페르시아 유리(국보 193호), 페르시안 카펫의 사용, 아라베스크 문양과 페르시아제 장신구 등이 좋은 예이다. 이러한 긴밀한 문화적 친밀감이야 말로 서구와 중국, 일본과는 다른 우리만의 강한 경쟁력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서구와 이슬람 세계는 1200년간이나 지배-피지배 관계였기 때문에 이슬람 세계에서는 강한 반서구 정서가 팽배하고, 서구는 지울 수 없는 이슬람포비아(이슬람공포증, 이슬람혐오증)를 멍에처럼 지고 살아간다. 또한 대부분의 중동사람들에게 중국은 값싼 상품제조국가이자 퍽 신뢰하기 힘든 이미지가 아직은 강하게 남아있다. 일본에 대한 이미지는 좋은 편이나 우수한 기술과 세련된 상품을 만들어내는 본받고 싶은 나라이지만, 왠지 차갑고 계산적이라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 상대다. 그에 비하면 ‘KOREA’는 그냥 좋다.





이슬람, ‘협력적 동반자’로 껴안아야



페르세폴리스 앞스핑크스 상 (박종우,2010)


그렇다면 중동인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는 어떨까. 아랍과 이슬람, 아랍과 이란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채 ‘이슬람=테러리스트’ 담론에 휩싸여 우리의 협력 파트너인 절대 다수 이슬람 주류 공동체를 적대시하는 구조적 모순 속에 있다. 중동·아랍인들은 한국이 좋다며 ‘코리아’ 브랜드를 찾고 한국말과 문화를 배우려 하는데 우린 왜 그들을 친구로 받아들이지 못할까. 이슬람 문화엔 중동인의 삶과 역사가 담겨 있다. 유럽 르네상스를 가능케 한 학문적 원동력이 된 것도 이슬람 문화다. 따라서 중동인을 좀 더 잘 알려면 우선 이슬람 문화에 대한 인문학적 이해가 따라야 한다. 중동을 ‘테러와 전쟁으로 얼룩진 곳’이 아니라 ‘인류의 오랜 문명과 깊은 영성이 발아되고 뿌리 내린 본향’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



〈쿠쉬나베〉라고 쓴 이슬람 켈리그라피 (필자 제공)


이제 서구 중심적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벗어나 우리의 눈으로 중동인을 바라보고 그들을 친구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지구촌의 미래를 함께 짊어지고 갈, 생각이나 가치는 나와 좀 다르지만 더없이 필요한 이웃으로 바라보자는 얘기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슬람문화와 아랍 사회의 관습, 중동-오리엔트의 찬란한 역사에 대한 기초적 이해, 문화교류 사업을 북돋우고 중동사람들의 한류열풍에 화답하는 한국어, 한국문화 보급 창구의 확대와 효율적인 운영, 친한적 한국학 전문가의 육성과 지원, 정기적인 스포츠-문화교류행사 지속, 중동지역에 남아있는 고대 한국학 자료 발굴조사, 인류문화유산에 대한 공동조사와 발굴 프로그램 등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어야 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잃어버렸던 16억인구 이슬람 국가 57개국, 지구촌 1/4의 친구를 다시 얻는 첩경이다.


이 희 수(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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