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일상을 반추하는 사진
ACC 전시작가 이세현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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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현 작가
사진작가 이세현은 역사적 장소와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작업으로 풀어간다. 2018년 대만 샤우롱아티스트빌리지, 2019년 광주 롯데갤러리, 2021년 서울 류가헌갤러리와 부산 예술지구p에서 역사적 장소에 대한 고민을 담은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2018년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 프로젝트, 2019년 [각자의 시선](ACC), 2020년 [연대의 홀씨](ACC), 2021년 광주비엔날레 5.18특별전 [메이투데이] 등 다수의 그룹전에서 개성 있는 사진 작업을 선보였다. 그리고 2010년 광주 대인시장 레지던시를 시작으로 2015년 상하이 히말라야 미술관 레지던시, 2017년 일본 요코하마 코가네쵸 레지던시, 2018년 대만 타이난 샤오롱아티스트빌리지, 2021년 부산 예술지구p 레지던시 등에 참여하면서 사진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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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진지하게 계획했던 일보다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인생의 항로가 결정되는 경우가 있다. 게다가 그렇게 우연히 벌어지는 일들이 여러 번 겹쳐지다 보면 그저 우연이 아니라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이세현 작가가 사진을 전공하고 지금과 같은 작업을 하게 된 사연을 들으면서도 역시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란 말을 떠올렸다.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이세현 작가는 수능시험을 보는 날 기이한 일을 경험했다. 수능시험 3교시가 시작되자 그는 문제 3개를 풀고나서 시계를 보았다. 약 10분이 지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들어 다시 시계를 확인해 보니 어느새 시험종료 10분 전이었다. 황당하게도 그 몇십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험 시간에 졸아본 적도 없는 그였다. 시간이 증발한 것인지 기억이 증발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수능시험을 망치고 나오면서 그는 많이 울었다. 하지만 대학에 가기 위해서 어디든 원서를 내미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지원한 여러 대학에 모두 합격했고 그는 다른 도시의 대학에 갈 심산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가 집에서 가까운 대학에 다니길 원했다. 그곳은 고3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지원했던 사진학과가 있는 대학이었다. 사진학과라고 하니 너무 낯설었다. 그렇지만 사진 작업을 핑계로 좋아하는 여행을 마음껏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덜컥 그 대학을 선택해버리고 말았다. 사진에 대해 완전히 문외한이었던 그의 앞길에 미지의 사진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카메라를 능숙하게 다루는 학생들이 대부분인 사진학과에서 초보자였던 그는 좌충우돌하며 사진에 대해 하나씩 배워 나갔다. 카메라와 필름 외에도 암실, 현상, 인화 같은 사진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생소했지만 한편으론 그저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재주가 없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열심히 작업했다. 특히 다큐멘터리와 보도사진 작업을 함께 하는 동아리에 들어간 뒤로 각종 집회나 사건 현장 등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익혔다. 그리고 교수, 선배 들과 함께 우리나라 해안선을 따라 여행하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가 원하던 대로 사진 촬영을 위해 많은 곳을 다니게 된 것이다. 이 시기의 경험이 그의 사회적 인식과 작업의 밑바탕을 형성시켜준 셈이다.
2009년 대학 졸업 후 이세현 작가는 한동안 대학 은사였던 사진작가 최광호의 스튜디오에서 조수로 일하며 작업했다. 그러던 중 2010년 최광호 작가가 6.25전쟁 60주년을 기념하는 사진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사진 프로젝트는 전국의 6.25 전적지와 민간인통제구역을 답사하며 사진으로 해석하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최광호 작가의 작업을 돕기 위해 이세현 작가도 짐을 챙겨 따라 나서게 되었다. 사진작가 일행이 도착한 곳은 민통선 안에 있는 강원도 양구의 펀치볼(Punch Bowl) 지역이었다. 6.25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그 지역에는 여전히 지뢰가 많아서 위험을 알리는 표시가 곳곳에 눈에 띄었다. 그 때문에 안내 담당 군인은 일행에게 단독 행동을 철저히 금지시켰다. 그런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이세현 작가는 우리가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살고 있음을 새삼 절감했다. 초소로 향하는 일행의 맨 뒤에서 걸어가던 그는 그때의 느낌을 표현하고자 지뢰 표지판 앞에서 순간적으로 땅에 있는 돌을 집어 공중으로 던졌다. 그리고 재빨리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Boundary」 연작이 처음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돌을 던진 후 촬영하는 행위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대학시절 엠티(MT)에서 술을 깨려고 해변의 자갈을 공중에 던지며 촬영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에게 돌 던지기는 단순한 유희와 달랐다. 돌 던지기에 대한 강렬한 기억은 어린시절에 각인되었다. 1980~90년대 최루탄이 난무하던 광주의 거리에서 시위대가 돌멩이를 던지던 광경이 바로 그것이다. 그때 보았던 돌들은 저항이자 외침의 의미였다. 「Boundary_Punch bowl」에 등장한 돌은 오랜 세월 변함없이 역사적인 장소를 지켜보는 존재이다. 그렇게 역사적인 장소에 밀착되어 있던 돌이 작가에 의해 공중으로 솟구치면서 역사적인 장소는 과거의 이야기로 망각되지 않고 현재의 의미로 되살아난다. 작가는 이런 작업 방식에 대해 과거의 역사를 품은 장소와 현재의 기록, 해석하는 행위가 만나며 의미 있는 '경계(Boundary)'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Boundary_Punch bowl」을 시작으로 그는 역사적인 장소에서 돌을 던지는 작업에 비중을 두게 되었다.
「Boundary_Punch bowl」 작업을 한 뒤 이세현 작가는 2011년 광주 대인예술시장 레지던스 프로그램 참여를 계기로 광주에 둥지를 틀었다. 그러면서 역사적인 장소를 찾아다니며 「Boundary」 연작을 해 나갔다. 그 장소들은 대부분 근현대사에서 비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났던 곳이다. 2015년에는 4.3 관련 유적지에 가려고 제주도로 향했다. 제주도에 도착해 그곳에 사는 지인을 무작정 찾아갔다가 카카오 본사 옆에 '카카오 오름'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카카오 오름은 카카오 본사를 지으면서 파낸 흙으로 조성한 제주도의 첫 번째 인공 오름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이세현 작가는 호기심이 일었다. 인간이 자연을 모방해 만든 오름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그렇게 찾아간 카카오 오름에 올라 돌을 주워 몇 차례 공중에 던지면서 계속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촬영한 사진들을 살펴보니 흥미롭게도 카카오 오름 위에는 돌과 인간과 새들이 함께 있었다. 마치 계획적으로 연출이라도 한 것처럼 모든 요소들이 짜임새 있게 배치된 모습이었다. 우연한 순간을 포착한 이 사진에는 르네 마그리트의 회화를 연상케 하는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Boundary_Oreum」이라고 명명한 이 사진 작업을 계기로 그는 이미 공식화된 역사적인 장소가 아니더라도 동시대의 현장을 자신의 시각으로 기록하면 세월이 흐르면서 역사적인 장소로 기억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공식화된 역사적 장소와 개인적으로 기록하고픈 동시대의 현장을 두루 찾아다니던 이세현 작가는 경주에서 약간 색다른 작업을 시도했다. 그는 과거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경주를 가끔 찾곤 했는데, 특히 황룡사터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을 촬영하며 감동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9년에는 고분 근처의 숙소에서 며칠 묵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여러 왕릉들을 둘러보며 한때 화려하게 빛나다 사라져버린 그들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고 세월의 덧없음을 느꼈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던 중 하루는 숙소 근처에 있는 쌍상총(雙床塚)에 눈길이 갔다. 그 옛 무덤 옆에는 묘지기처럼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고 주변엔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는 그 풀들을 보며 불현듯 자연의 변화와 순환을 떠올렸다. 커다란 바위가 부서져 돌이 되고, 돌이 모래가 되고, 모래가 흙이 되고, 다시 흙이 퇴적되어 바위가 되듯이 자연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순환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오랜 세월 변하지 않고 역사적 장소를 지켜보는 존재는 돌뿐이라고 굳이 규정할 필요가 없는 셈이었다. 그리고 무덤이 조성되던 당시를 기억하는 존재는 무덤 주변의 풀들이었으며 그 풀들이 죽어서 태어나기를 계속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렇게 장소와의 교감을 나누던 그는 발 밑에 있는 풀들을 한 움큼 뜯어서 허공으로 던져 올렸다. 풀들이 날아오르는 모습은 그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세현 작가'라고 하면 '돌 던지기' 작업, 즉 「Boundary」 연작을 그의 대표작으로 떠올리기 쉽다. 그만큼 남다른 이미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Boundary」 연작 외에도 그가 카메라를 처음 들기 시작한 이후로 지금까지 꾸준히 해 온 작업이 있다. 바로 「Episode」 연작이다. 이 연작은 매일 자신과 주변의 일상을 관조하면서 사진이라는 이미지로 글을 쓰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찍은 이미지 하나하나는 자음과 모음 또는 단어들처럼 이어져서 감성적인 시나 흥미로운 소설이 되고, 시사적인 보도문이 되기도 한다. 대학시절부터 시작된 이런 방식의 작업은 2011년 인사아트센터의 개인전과 2012년 광주비엔날레 포트폴리오 리뷰 전시를 거치면서 점점 발전해 왔다. 최근 「Episode」 연작의 면모를 잘 보여준 전시회로는 [2020 ACC CONTEXT-연대의 홀씨]를 들 수 있다. 이 기획전의 주제는 비동맹 운동의 역사와 문화예술적 실천에 주목하면서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로 인해 곳곳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갈지 질문하고 연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전시장에 선보인 그의 작품 「Episode_연대의홀씨」에는 마네킹, 커피잔, 농구대, 플라스틱 의자, 시사 잡지, 사료 가게, 마스크, 지구본, 쓰레기,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 촛불집회, 5.18사적지 전일빌딩 등 일상을 채우는 평범한 사물들과 특별한 사건 관련 이미지들이 나열되어 있다. 하지만 단순하게 나열된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사진들이 여러 형태로 모여 있고 그 사진들 간의 거리는 불규칙하다. 마치 단어들의 조합과 띄어쓰기로 이루어진 문장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작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진들은 좀 더 크게 배치되어 있다. 그런 사진들은 보다 강조하는 단어인 셈이다. 그 큰 사진들 중에 유난히 눈길을 끄는 것은 「Episode_Spectacles of Collision #힘을내볼까」이다. 지구본과 박카스병이 함께 버려져 있는 화단 풍경은 관객에게 모종의 메시지를 던지는 듯하다. "지구야, 여기저기 문제가 많지만 힘을 내다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작가는 이렇게 사진 하나하나가 연대를 위한 작은 홀씨처럼 의미 있게 작용하기를 바랐다.
「Episode」 연작은 2021년 제13회 광주비엔날레 5.18특별전 [메이투데이]에도 초대되었다. 전시장소인 (구)국군광주병원은 5.18사적지이기 때문에 「Episode」 연작 중 그런 장소성과 연결되는 사진들이 전시되었다. 「Episode_Maytoday」라는 제목이 붙은 이 작품은 (구)국군광주병원의 창문들과 그 주변의 벽에 설치되었는데, 사진들을 살펴보면 5.18 당시 주요 장소였던 (구)전남도청, (구)505보안부대, (구)국군광주병원, (구)광주교도소 등에서 찍은 것들과 현재 광주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찍은 것들이 섞여 있다. 이 작품은 두 가지 면에서 흥미로운 교감 방식을 보여준다. 첫 번째는 전시 장소와의 교감이다. 창문에 붙어 있는 사진들이 창문 너머 바깥 풍경과 어우러지며 (구)국군광주병원이라는 장소에 흡착되고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창문틀을 통해 보이는 바깥 풍경도 하나의 사진 작품처럼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보통 전시작품을 설치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창문을 이용해 오히려 좋은 효과를 불러일으킨 셈이다. 두 번째는 관객과의 교감이다. 하늘의 헬기들, (구)전남도청 앞 분수대 이미지가 담긴 5월 달력, (구)국군광주병원 주변 숲 속의 동상 좌대 등 5.18을 암시하는 5종의 사진들이 여러 장씩 붙어 있고 그 옆에는 '한 장씩 가져가세요'라는 지시문이 쓰여 있다. 작가는 관객들이 그 사진들을 가져가서 각자의 생활공간에 붙이고 감상하기를 바랐다. 그런 작은 행위들이 역사적 사건과 그 의미를 계속해서 함께 기억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 때문인지 전시작품 중 눈에 띄는 「Episode_Maytoday #터전을불태우다」라는 사진은 인물과 타오르는 불이 겹쳐진 장면을 우연히 포착한 것이지만 여전히 빛을 발하는 역사적인 사건의 의미를 은유하는 것처럼 읽힌다.
이세현 작가는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자기 얼굴의 상하좌우와 잠을 잤던 자리를 촬영한다. 그리고 일어서서 증명사진처럼 자신이 눈을 뜬 모습과 눈을 감은 모습도 차례로 촬영한다. 마치 신성한 의식을 행하듯 날마다 스스로 사진작가의 정체성을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동하는 곳으로 무작정 가본다. 그곳에서 장소가 지닌 이야기를 생각하고 사소하지만 관심이 가는 사물들을 관찰하며 카메라에 담는다. 그러다 보면 영감이 떠오르고 작업에 대한 생각도 점점 구체화된다. 요즘 그는 기존에 촬영했던 역사적인 장소들을 다시 찾아다닌다. 그곳에 남겨진 역사의 작은 흔적들을 하나씩 하나씩 마주하며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자신이 현장에서 채집한 이미지들을 보다 많은 이들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로 승화시키기 위해 어떻게 작업을 보여주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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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백종옥 icezug@hanmail.net
사진. 이세현 802564s@naver.com
2022.2